기업은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 중 어느 쪽을 선호할까? 기업의 규모, 산업의 특성, 당면한 과제, 직무의 성격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는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고,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다. 고도로 전문화된 직무에 적합하다.
반면,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는 여러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다양한 업무를 소화할 수 있는 유연성과 적응력이 뛰어나다. 종합적인 시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있으며 조직 전체를 조망하고 다양한 구성원을 이끌어야 하는 리더의 역할에 적합하다.
당연히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 둘을 절충한 'T자형 인재'를 선호할 것이다. T자형 인재는 특정 분야에서는 깊이 있는 전문성(T의 수직선)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다른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이해(T의 수평선)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현실 세계에서 T자형 인재가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인 최근에는 아무래도 스페셜리스트를 좀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걸로 보이지만 정민이 직업 생활을 할 당시의 대기업은 제너럴리스트가 대세였던 것 같다.
일례로 '보직 순환'이라는 인사 정책의 대전제가 있어서 모든 직원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3~4년에 한 번씩 다른 부서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덕분에 다양한 직무, 여러 유형의 사람들과 더불어 다이내믹한(?)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이런 흐름에 실려 다니다 보면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보다 '사무직' 또는 '관리직'이라 불리는, 두리뭉실하고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경력자로 분류되는 부작용이 따랐다.
회사에 곧 인사이동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2월이면 승진과 함께 순환 보직을 전제로 한 대규모 전보 발령이 정기적으로 있었는데, 이번에는 설연휴가 빨라 그전에 인사 명령이 난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의례 그렇듯이 그즈음의 회사 분위기는 설렁설렁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대부분이 일손을 놓고 지냈다.
티를 내지 않고 있었지만 사실 정민의 과장 진급은 이미 언질을 받아서 알고 있었다. 강구점에 근무하면서 담당하는 PC의 매출 실적이 나쁘지 않았고, 팀장인 이 부장이나 점장인 강성인 상무로부터 싫은 소리 한 번을 듣지 않았으므로 어쩌면 예측 가능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대리 진급부터 입사 동기들보다 빨랐으니 과장 진급도 가장 먼저였다.
평소처럼 설맞이 행사 준비에 바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이 부장이 정민을 불렀다.
"박 과장 축하해. 그동안 잘했으니까."
"감사합니다. 부장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입니다."
"근데 전보 발령이 났더라? 알고 있었어?"
"네? 저는 아직 인사명령지를 못 봐서..."
그럴 리가 없었다. 이 부장이 잘못 보았을 것이다. 정민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부랴부랴 인사명령지를 찾아보았다. 과장 승진자 명단에서 본인의 이름을 확인한 다음, 급히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정말 있었다. 새로 받은 보직은 부성점 ○○팀 ○○파트장이었다. 문제는 그 부성점이 서울이 아닌 먼 지방에 있다는 점이다.
부성점이 낯설지는 않았다. 정민이 기획실에 근무할 당시 이슈가 있던 곳이다. 주거래 은행 심사에서 해당 부지가 '비업무용 부동산의 용도 외 사용'으로 분류되어 거액의 과태료 부과가 예고되었다. 나대지를 유료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그게 문제가 된 것이다.
주거래 은행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기획실에서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현장 실사가 있기 전날 모래를 실어다가 주차장을 덮어 주차 구획선을 없애고 나대지로 보이게 하였다. 그런 다음 사진을 찍어 실사팀에게 자료로 제공하였다. 그들은 이를 근거로 용도 외 사용이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낼 것이다.
평소 관계 유지를 잘해온 덕분에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때마다 선물을 실어 나르고 식사 대접을 했던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이 부지를 매각할 것이냐 아니면 백화점을 신축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했다.
정민을 포함한 몇 사람이 투입되어 투자 수익 분석과 사업 타당성 조사를 했다. 해당 지역의 성장성, 주거 인구와 유입 인구의 소비 성향, 지역 백화점 외에 다른 경쟁사가 진출해 있지 않은 선점 효과 등을 감안하여 백화점 신축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신규 출점하게 된 부성점에 이번에는 정민이 발령이 난 것이다.
정민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지방으로 가는 인사이동은 어느 정도 사전에 본인과 협의가 선행되는 것이 관례였다. 더욱이 분명 기획실 홍 부장이 이 내용을 알았을 텐데 왜 아무런 정보가 없었을까? 당시 홍 차장은 부장으로 진급해서 기획실장을 맡고 있었다. 만약 이렇게 지방에 근무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이 회사 지망을 재고했을 것이다.
기획실 홍 부장에게 전화했다. 그는 전화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시간 내서 한 번 들르라고 했다. 정민은 곧바로 본사로 향했다. 정민을 본 홍 부장은 만면의 미소를 지었다. 영업부서에서도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과장 진급을 축하한다고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홍 부장은 정민이 궁금해하는 내용을 인사부 오정록 이사를 만나서 직접 들어 보라고 했다. 오 이사를 찾아간 정민은 느닷없이 지방점으로 발령이 난 이유를 알고 싶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오 이사는 한참 동안 정민의 인사 기록 카드를 살폈다. 당시에는 전산 처리가 안 되던 시절이어서 개인별 인사 기록 카드가 존재했다. 중간마다 '좋아! 좋아!'를 연발하던 오 이사는 카드를 내려놓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야, 나는 너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다?' 그리고는 사뭇 진지하게 정민이 궁금해하는 '그 이유'를 들려주었다.
'부성점은 오픈 1.5년 차로 경쟁사 보다 그 지역에 먼저 출점하여 성과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경쟁사들이 동시 출점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 선점 효과와 점유율 우위를 잃지 않도록 대비하라는 사장의 지시가 있었다. 부성점이 내놓은 대응 전략은 매장 리노베이션이 필요하며 특히, 해외 명품과 글로벌 브랜드같이 새로운 MD 전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이에 따라 해당 분야에 경험과 성과가 있는 인원을 선발했는데 그중 한 명이 정민이다.'
발령이 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3일 이내에 새로운 근무지에 출근해야 한다. 업무 인수인계는 그다음에 사정에 따라 적절하게 진행하면 된다. 정민은 이틀 후 서울역에서 새마을호 첫차에 몸을 실었다. 한강 철교를 지나며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 물결이 높게 일렁였다.
혹시 오 이사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감언이설로 정민을 현혹한 것이 아닐까? 달콤한 그의 말들은 독이든 성배였을까? 자신은 과연 그럴만한 역량과 가치를 지닌 사람일까? 어쨌든 단순히 연고가 없는 지방이라는 이유로 인사 발령을 거부할 수는 없다.
어렴풋한 새벽빛을 뚫고 기차는 거침없이 내달렸다. 문득 바다가 생각났다. 맞다. 그곳에는 바다가 있었다. 일단은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어쨌든 느낌, 그게 나쁘지 않았다.
정민이 기차 안에서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세상은 다른 일로 온통 시끄러웠다. 한동안 별다른 활동 없이 잠적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갑작스럽게 기자회견을 열고 해체를 발표했다. 기자회견 소식이 전해지자 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일부 팬들은 기자회견장에서 오열하거나 실신하기도 하였다.
서울역에서 부성역까지는 새마을호 열차로 4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지금 KTX의 두 배이다. 역 광장을 가로질러 길가에서 택시를 탔다. 바람 냄새부터 서울과 달랐다. '○○백화점으로 가주세요.' 그런데 택시가 움직이지 않는다.
왜 출발하지 않느냐고 묻자 택시기사가 뭐라고 한다. 알아듣지 못하였다. 사투리가 심했다. 게다가 억양이 강하고 목소리 톤이 높다. '내가 뭘 잘못했나? 이 분이 뭐라는 거지?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건가?' 당황스러웠다.
택시 기사는 합승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쪽 방면으로 가는 손님 한 명을 더 태우겠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 그냥 가달라고 하자 택시기사는 혼잣말인지 아니면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또 한바탕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퍼붓더니 신경질적으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
사무실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백화점 전 층을 둘러보았다. 대형 백화점 사이즈는 아니었다. 그리고 뭐랄까, 지방점 답다. 뭔가 20% 정도 부족했다. 꼭 있어야 할 MD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오 이사의 말대로라면 그것이 정민이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이유였다.
자신이 담당할 층을 반복해서 몇 바퀴를 돌아보았다. 고객의 입장에서 'must go & must buy'할 만한 핵심 요소가 보이지 않았다. 이 어수선하고 가벼운 매장을 어떻게 하면 매력있는 매장으로 바꿀 수 있을까? 할 일 참 많겠다!
사무실은 매장의 한쪽 구석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백화점은 판매 공간 위주로 공간 계획을 잡기 때문에 사무실 환경은 우선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각 층 사무실은 형편이 비슷하다. 사무 공간이라기보다는 고객 서비스와 매장 관리를 위한 전초 기지 정도의 수준이다.
여직원 한 명과 남직원 두 명이 책상에 깊이 몸을 묻고 있었다. '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자, 셋이 화들짝 일어나며 '안녕하세요. 새로 오시는 과장님이시죠?'라며 합창을 한다. 아마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정민이 파트장을 맡게 된 ○○파트는 총 5개 PC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리 두 명과 주임 8명, 조장이라고 불리는 6급 여직원 5명 그리고 POS를 담당하는 캐셔 15명이 근무하고 있다. 그 외에 각 브랜드의 판촉 사원 수를 합치면 100명 가까이 되었다.
기다리고 있던 남자직원 두 명은 그중 주임급이었다. 대리들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차하급자가 기다리고 있어야 마땅하거늘, 지금 밀당 하자는 수작이다. 분명 '누가 남아서 과장을 맞이할 것인지'를 놓고 자기들끼리 설왕설래했을 것이다. 그 장면을 상상하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으므로 점장과 팀장 도착 신고는 오후로 미루고 식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근처 식당으로 가자는데도 주임들은 분위기 파악도 할 겸 굳이 직원 식당으로 가자며 앞장섰다.
어쩌면 이때부터가 서울에서 온 신임 파트장을 골탕먹이려 이들의 작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훗날 같이 일하며 겪어보니 이들이 그 정도로 치밀하거나 계획적이지는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부성점은 직원식당이 지상 8층에 있었다. 직원들은 고객용 엘리베이터 타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므로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탄다. 직원용이 늘 붐비기 때문에 비어 있으면 화물용을 타기도 한다.
직원 식당 입구에는 줄이 길게 서 있었다. 전에 근무하던 강구점은 한식과 양식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부성점은 메뉴가 한 가지로 통일되어 있었다. 식비는 직영 사원은 회사에서 제공해 주었고 판촉 사원은 절반을 본인이 부담하였다. 케이터링이나 전자 태그 기능 같은 것이 도입되기 이전이므로 식당은 백화점에서 직접 운영했고 종이로 된 식권을 사용했다.
줄이 줄어들면서 좀 더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이상한 냄새가 훅 들어와 정민의 코를 찔렀다. 비린내였다. 정민은 냄새에 민감한 편이다. 언젠가 전라도 지역에 문상을 갔을 때였다. 동행한 직원들이 상갓집을 찾지 못할 때 정민이 삭힌 홍어 냄새만으로 그 집을 찾아낸 적이 있었다.
속이 살짝 메스꺼워졌지만 숨을 삼키며 참았다. 여기서 돌아선다면 서울에서 내려온 과장이 직원 식당에서 나는 비린내 때문에 도망갔다고 한동안 직원들의 입방아에 오를 것이다.
자율 배식이 아니어서 식판을 들고 배식 창구를 따라 이동하다가 마지막에 국을 담은 그릇을 받았다. 미역국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반찬을 훑어보았다. 김치, 진미채 볶음, 돼지고기 볶음, 콩나물 무침, 그 어느 것도 비린내가 날 만한 것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국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순간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올랐다. 자세히 보니 미역국에 소고기가 아니라 부서진 생선살이 들어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미역국이었다. 주임 한 명이 눈치를 챘는지, 이 국의 이름은 가자미 미역국이며 이 지역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라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정민은 이른 아침부터 기차를 타느라 배가 고팠지만 이미 속이 뒤집혀 거의 밥을 먹지 못하였다. 주임들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음흉한 미소를 보자 왠지 '신고식'을 제대로 치른 느낌이 들었다.
가자미 미역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라는 말은 앞으로도 자주 등장할 거란 뜻이다. 정민이 신임 파트장으로 부임하는 첫날 맞닥뜨린 문화적 충격, 택시 기사와 가자미 미역국은 과연 험난한 이곳 생활의 예고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