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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물의 의미

선생님, 믿기지가 않아요

by 화문화답

느닷없는 전화 한 통


오후 5시가 넘어가자 교무실이 텅 비었다. 교감 선생님 혼자 남아서 뭔가를 고민하고 있다. 거의 매일 저런다. 아무도 없는 이 시간이 좋다고 한다. 모르겠지만 알 것 같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인사하고 교무실을 나선다. 학생 서넛이 자전거를 타며 사진을 찍고 있는 교정을 지나 교문 밖으로 나왔다.


성글어지는 나뭇잎 사이로 하얀 조각구름이 언뜻언뜻 눈부시다. 코끝에 내려앉는 바람 자락은 살폿하다. 한낮에도 쌀쌀하더니 오늘은 온화한 날씨를 회복했다.


집까지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데 중간에 들를 데가 있어 6시쯤 집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한낮이다. 아내는 퇴근 전이다. 요새는 저녁이 있는 삶이라기보다는 '저녁 집안일'이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삼식이가 아닌, 집안일을 많이 하는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대출이나 보험 아니면 보이스피싱 전화일 것이다. 퇴직한 이후로는 십중팔구가 그런 전화니까. 그런데 전화가 끊기지를 않는다.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 김선아 학생이다. 무슨 일이지? 학생들이 내게 물어볼 게 있을 때는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하지만 이렇게 바로 전화를 거는 경우는 드물다.


"선생님, 저 선아예요."

"응 그래, 선아구나. 얘기해."


수화기 저편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아, 울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선생님, 믿기지가 않아요."


나와 관련이 있고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면? 아, 맞다. 오늘이 정동은행 합격자 발표하는 날이다. 다른 일이라면 내가 아닌 담임 선생님께 전화했을 것이다. 오후까지 기다려봤는데 소식이 없길래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그런가 보다 했었다. 언제나 내가 먼저 합격자 발표를 보지 않는다. 지금 이러는 걸 보면 자신이 불합격한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인가? 그래서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인가?



정동은행에 도전해 보자


정동은행 직업계고 특별채용 대상자를 추천해 달라는 공문이 교육청에서 왔다. 이런 고졸 제한 경쟁 채용은 취업을 목표로 하는 직업계고 학생에게 한마디로 '절호의 찬스'이다. 성적, 자격증, 경험활동, 성격, 가능성 등 이런저런 조건에 부합하는 학생을 추리니 김선아 한 명이었다.


서류 전형 합격자에 한해 필기시험, 인성검사, 면접 전형, 신체검사까지 한 날에 진행되는 스케줄이었다. 적잖이 부담되는 일정이다. 또한, 필기시험에 직업기초능력뿐만 아니라 지원 분야 상식이 포함되어 있어 공부할 양도 적지 않다. 반면, 이에 부담을 느끼고 지원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있어 경쟁률이 다소 떨어지는 장점이 있다.


김선아를 교무실로 불렀다. '선생님, 무서워요. 해보기는 할게요. 근데 제가 될 수 있을까요?' 김선아의 첫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합격 문턱까지 갔던 기성은행 탈락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이럴 때는 판에 박힌 말이지만 듣고 싶어 하는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어. 만약 불합격하더라도 그 기업이랑 네가 안 맞는 것 일 뿐이야. 회사에서는 딱 자기들이 원하는 유형의 사람만 뽑거든.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계속 도전하는 것이 중요해. 알겠지?'


NCS 직업기초능력은 제한 시간에 맞춘 문제풀이를 반복하여 감을 유지 하도록 했고, 직무 관련 상식은 책을 사서 보되, 모르는 것은 그냥 넘어가고 알만한 것만 개념을 정리하도록 했다. 정동은행에 관한 배경 지식은 홈페이지 소개에 나와 있는 내용 위주로 파악하고 숙지하도록 했다.


기성은행을 준비하면서 집중 교육을 했던 덕분에 B.E.I 면접에 대해서는 특별히 더 해줄 것은 없었다. 혹시라도 느닷없이 다른 면접 유형을 들고 나올지도 모를 경우를 대비해 토론, 토의 면접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을 알려주고, P.R.E.P와 S.T.A.R.R기법을 이용해 구조적으로 답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면접 예상 질문을 20개 정도로 압축한 다음, 문제당 서너 줄 분량으로 답변 스크립트를 만들도록 했다. 선아의 성격상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결국 면접장에서 버벅거릴 확률이 크기 때문에 완전히 체화될 수 있도록 반복해서 말하는 연습을 시켰다. 특히, '면접 119' 상황에 대처하는 요령에 좀 더 비중을 두었다.


선아는 의지가 강했고 잘 따라왔다. 스스로도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다. 이 학생의 가장 큰 장점이다. 짧은 준비 기간이었지만 전반적으로 순탄하고 순조로웠다. 내 판단으로는 이제 합격 가능성이 51%까지 올라왔다.



또 사시나무가 되었다고?


오전 7시 30분.


"선생님, 저 도착했어요! 아직 입실 시간 전이어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요. 30분이나 일찍 와버렸어요."

"그래, 잘했어. 여유 있게 도착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 침착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4-7-8 호흡법 알지?"


오전 11시 30분.


"필기 끝나고 점심 먹고 있어요. 1시에 면접 시작인데 저는 앞번호라서 바로 볼 것 같아요."

"그렇구나. 체할라. 천천히 조금만 먹어. 연습 많이 했으니까, 면접관 하고 즐겁게 대화한다고 생각하고."


지금 이런 말이 도움 될까 싶지만 적어도 누군가 곁에 있다는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김선아, 제발 잘해라. 워낙 긴장을 잘하는 성격이라 걱정이 됐다.


오후 2시.


"선생님, 망한 거 같아요. 안 떨고 싶었는데 앉자마자 정신없이 떨어서 실수 많이 했어요."

"(뭐? 이번에도 사시나무가 돼버렸다고?) 그랬구나. 괜찮아. 어쨌든 끝까지 마치느라고 애썼다. 수고 많이 했어."

"죄송해요. 열심히 도와주셨는데."

"뭘 벌써 그래. 아직 발표가 난 것도 아닌데."


내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선아는 평소 담담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긴장을 하면 목소리까지 덜덜 떤다. 부디 면접관께서 어린 학생이라는 점과 면접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선아의 진면목을 발견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도 선아는 정동은행에 딱 맞는 인재상이다.



믿기지가 않아요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인생의 묘미는 의외성에 있지 않은가. 힘 빼고 기다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달래 보았지만 선아는 말없이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내가 너무 무리한 시도를 한 것일까? 그래서 저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선아는 이후에는 하향 지원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가정 형편상 졸업 전에 일단 어디든 취업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운 친구이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눈 깜짝할 사이에 졸업이 닥칠 것이다.


선아에게 적합한 기업체 채용 공고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또 무심한 시간이 흘러갔고 우리의 머릿속에서 정동은행은 잊혀갔다. 그러다 오늘, '김선아 정동은행 발표'라고 적혀 있는 책상 달력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퇴근했었다.


"떨어졌다고 생각해서 발표를 안 봤거든요. 근데 지금 보니까 합격이라는 거예요. 선생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모양이다. 그렇겠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덩달아 불안해진 나는 휴대폰을 들고 거실을 서성거렸다. 집에 도착했지만,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선아가 합격 통지서를 캡처해서 보내왔다. '확인 완료!'라는 메시지와 함께.


"선생님, 혹시 지원한 사람 다 합격시킨 거 아니겠죠? 진짜 너무 감사해요. 선생님 없었으면 저 이번 연도에 취업 못했을 거예요. 꼭 선생님께 보답하겠습니다. 면접 연습할 때는 그렇게 올라가지 않던 입꼬리가 지금은 내려올 줄을 몰라요."


"그래, 잘했어. 정말 잘했어. 전부 네가 해낸 거야. 부모님께 말씀드렸어? 정말 기뻐하시겠다. 선생님께는? 얼른 담임선생님하고 취업부장 선생님께 전화드려."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말라고 가르쳐 놓고 내가 선아보다 더 들떠있다. 전화를 끊고 그제야 소파에 주저앉았다. 선아와 함께 준비하던 시간과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너의 눈물을 기억해


다음 날 아침, 선아가 교무실에 들어섰다. 제일 먼저 나에게 다가오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래, 많이 힘들었지? 지금 네 눈물의 의미를 꼭 기억해. 녀석을 (마음으로) 꼭 안아 주었다.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임을, 매사에 더 낮은 자세로 임할 것을,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활짝 피어나기를 바라며' 어깨를 (마음으로) 토닥여 주었다.


취업부장과 담임을 통해 합격 소식이 전파되었는지 취업부 선생님들과 다른 몇몇 분들이 선아에게 다가와 축하를 해주었다. 시끌벅적해야 할 교무실 분위기가 왠지 숙연해졌다. 취업부장이 교감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께 인사를 시켜야겠다며 서둘러 선아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교문 앞에 현수막이 걸렸다. '축! 정동은행 최종 합격! 3학년 1반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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