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은성학생(가명) 출근 잘했습니다. 그동안 신경써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실습 기간에도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A기업 인사팀장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훈훈하다. 요새는 누군가 나에게 앞으로 뭐 하고 살 거냐고 물으면,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며 살고 싶다고 대답한다. 33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득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왔다. 대인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도 그만큼 쌓여 있다. 여전히 쉽지는 않지만 이제는 날 선 마음을 내려놓고 싶다. 모름지기 나뿐만 아니라 퇴직한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은성이가 현장실습을 시작한 A사는 업력과 규모가 있는 중견 기업이다. 그 회사는 최근 결원이 된 사무직 직원을 채용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업종이 보험이다 보니 채용 직무가 다른 회사처럼 일반사무직임에도 선입견을 가진 학생 부모님의 반대로 채용이 무산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 추천 의뢰가 왔을 때 취업부장과 나도 이런 부분에 주목하였다. A사를 방문하여 근무 환경을 살펴보고 해당 직무에 관해 인사팀장과 면담한 결과, 우리 학생들을 면접에 보내도 무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B학생과 은성이가 지원했으나, B학생은 합격하고 은성이는 탈락했다. 은성이는 결석이 많고 자격증을 갖춘 것이 없어서 객관적인 취업 역량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합격 통보를 받은 B학생이 지원 의사를 철회했다. 이유는 '보험회사라서 부모님이 반대한다.'는 것이다. 사전에 충분한 설명과 이해가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합격하고 나니 마음이 바뀐 것이다. 인사팀장은 이런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본인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며 곤혹스러워했다. 진심으로 사과했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은성이가 마음에 걸렸다. B탓을 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라면 결과적으로 은성이는 괜찮은 자리 하나를 놓치는 것이다. 단독으로 면접을 봤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인사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성이가 면접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점이 없었고 단지 상대 평가의 결과였다면 탈락자로서 보다는 차점자로서 은성이에게 기회를 줘 볼 수 없겠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다음 날, 면접관 3명 중에 은성이를 선택한 분도 있었다며 현장실습 동안 평가에 따라 최종 채용 전환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면서 A사 인사팀장은 좋은 학생 옆에는 좋은 선생님이 있는 것 같다며 사실은 이 부분을 가장 많이 감안했다고 했다.
이로서 은성이에게는 다시 한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부디 현장실습 기간 중 좋은 평가를 받아서 4주 후에는 정식으로 채용 전환이 이루어지기를.
현재 은성이 외에도 여러 학생의 현장실습이 진행 중이다. 다행히 특별한 사건 사고 없이 순탄하다. 안전한 현장실습 진행과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취업부 교사와 담임선생님은 매일 긴장의 연속이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들 이다 보니 무슨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다. 어느 날 불쑥 학교로 돌아올 수도 있다.
현장실습의 준거 법령으로는 직업교육훈련촉진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산업안전보건법,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총론(교육부 고시), 기타 교육청의 세부 지침 등이 있다. 매뉴얼이 책으로 한 권이다. 물론, 임금 체불 사업장,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 산재 다발 사업장, 사망사고 발생 사업장 같은 유해 기업으로부터 학생 보호하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다만, 현장실습 제도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들도 있다. 우선, 너무 복잡하다. 학생 한 명을 현장실습 내보내는데 필요한 서식만 해도 17종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런 복잡한 방법을 택하지 않아도 채용이 가능한데, 굳이 그런 어려운 절차를 감수할 리가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까다로운 현장실습 절차 때문에 오히려 취업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 하나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로 전공 적합성이라는 것이 있다. 현장실습을 교과 교육의 연장선으로 보고 '전공과목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너무 방어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취업 범위가 지나치게 축소되는 부작용이 따른다.
학생의 인권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절대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규정의 일률적인 적용과 규제 일변도보다는 좀 더 융통성 있는 해석과 적용이 필요하다. 사실 기업이라는 곳에서는 본인 전공에 부합하는 직무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장실습'하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다음 소희'가 떠오를 것이다. 2023년 2월에 개봉한 정주리 감독의 작품으로 김시은, 배두나가 출연한 영화이다. 한국 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국제 비평가 주간 폐막작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영화는 한 통신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학생의 자살 사건을 소재로 하였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열악한 일자리와 부당한 대우, 그로 인해 이어지는 사건들이 악순환되는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콜센터의 악습과 퇴사율 90%가 넘는 직장에 학생을 밀어 넣게 되는 시스템적 오류를 조명하였으며,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눈을 감고 돌아서는 어른들의 모습까지 반영되어 관객들의 공분을 샀다.
그런데 실제로 학교에 근무해 보니 영화처럼 위험이 보편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물론 다른 학교의 일부 위험한 직군의 경우 여전히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어 이에 대한 경각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 학교는 시스템적으로 잘 컨트롤되고 있다. 학생들을 보내지 말아야 할 곳과 보내도 될 곳이 아예 처음부터 확실하게 구분되고 있다.
모쪼록 지금 현장실습 진행 중인 모든 학생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실습을 마치고 무사히 정규직 채용 전환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A사 인사팀장님, 감사 인사는 제가 먼저 드려야죠. 쉽지 않은 여건에도 본교 학생을 채용해 주고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