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속으로
원래 잠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중 고등학교를 지나고 입시를 거쳐야 하는 삶에서는 잠을 줄이는 것이 가장 당연하고 잠을 많이 자는 것이 얼마나 나태하고 잘 못된 일인가를 학교 선생들로부터 끊임없이 들어야만 했다. 환절기에는 잔병치레가 많아서 고3 3월(내 생일이었다), 자습을 빼고 먼저 쉬러 갔다. 다음날 날 쳐다보고 너무 심각하게 실망한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하지만 잠이 보약이고 밤새서 벼락치기 공부를 해보면 정리되지 않은 지식들이 수면부족탓에 이리엉키고 저리 엉키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또 시간이 날 때마다 잠을 자고. 중학교 때 수련회를 갔다온 후에 이틀동안 잠만 잤다. (고맙게도 엄마는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뭐라고 했는데 못 들은 걸수도)
생각해보면 체질과도 관련이 있나보다. 아빠도 아침잠이 많은 편이었고 오빠도 잠이 많고 아침 잠이 역시나 많은 편이어서 학창시절 아침엔 항상 전쟁이었다. 나도 아침 수업은 거의 쥐약이나 마찬가지였고.
초등학교 때 엄마가 아파 중환자실에 있을 때 임종을 지키기 위해 병원 복도에 있어야 할 때도 잠이 그렇게 쏟아졌다. 엄마침대에서 생명력을 잃어가는 가느다란 손을 잡고 기도를 하다가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엄마의 손에 내 손자국이 깊게 멍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친척들이 뭐 저렇게 잠을 자냐고 힐난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그렇게 잤던 것은 병원 복도에서 이제나 저제나 대기해야 했던 탓도 있겠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무의식이 컸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때는 그렇게 내 자신이 쓸모없고 그저 어른들의 눈에 비친 짐덩어리라고 생각이 될 뿐이었다.
그 이후에 성인이 되어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할 때도 그렇게 잠이 쏟아졌다. 대학에 오니 다 내가 따라잡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농촌에서 자란 특혜를 받고 대학에 왔다는 것이 우연히 알려지자 한 20명 남짓 모였던 식당에서 북한에서 왔다, 함경도 특례라는 식의 야유와 놀림이 크게 이어졌고 모든 40개의 까만 눈이 나만 향하던 순간도 있었다. 난 시력이 거의 없는 두더지처럼 어둠 속으로 파고 들어갔고 그들의 눈과 말로 내 자신을 업신여겼다. 그들만큼 약삭빠르지도 못했고 현실을 빨리 파악하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인 ADHD처럼 불안감에 책을 보고 같은 문장을 계속해서 본다든지 눈의 위치가 책의 여러 곳을 흐름없이 방황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머리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물론 천재(한국에서 열광하는)는 아니었지만 정서적 문제가 학습을 방해했던 거다. 하지만 난 내 머리와 나만을 탓했다. 그래서 학생을 가르치다가 자기는 돌대가리다, 뭐다 하는 자책을 하면 잔소리의 길이를 갖춘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속상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 힘으로 해결을 못하지만 다 내 탓인거 같을 때는 자책과 분석을 하다가 내 풀에 지쳐서 쓰러진다. 그리고 긴 잠을 잔다.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터졌을 20대 후반에는 직장이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면 될 것을 그 때는 겨우 겨우 구한 직장이었기에 두려움이 더 컸는 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풀려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며칠을 잠을 못 자는 위험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물론 그 이후 이틀을 내리 자고 나니 진정이 되었다. 항상 튼튼하고 덩치가 크다는 소리를 들었던 내가 영양제를 두 팩을 맞았다고 하니 내 자신도 놀랄 일이었다.
그 이후에도 일상생활로 돌아오다가 과제를 못 해 잠을 자지 못하고 글의 돌파구를 못 찾아 잠을 잘 수가 없다가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도 크고 내가 진 짐이 너무 무거우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지혜롭게 내 몸은 잠으로 날 보호해주기도 하고 내게 경고하기도 했다.
극단과 극단은 맞닿아있다고 했던가. 과수면 상태는 불면증과 닿아있다. 과수면 상태가 이어지다가 또 불면증이 이어진다. 이런 패턴을 바로 잡으려면 운동을 하고 핸드폰을 멀리하고 수면 전에 일정한 의식을 치르는 게 좋다고한다. 잠옷을 입는다든지 내일 마실 보리차를 끓인다든지. 하지만 너무 쉬워서 하기 어려운 일이다.
글을 쓰는 일이 처음엔 알 수없이 꽁꽁 얼어붙은 내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놓는 자기 치유의 일환으로도 생각해왔는데 극을 쓰고 피드백을 듣고 작곡가를 만나고 배우를 만나고 공연을 올리고 관객을 만나는 일이 고통으로만 다가온 때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 전통춤을 이어나간 무용수 최승희를 모델로 한 이야기를 쓰고 난 후 나는 철저히 앓았다. 친일파로 등록된(매국노와 친일파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승희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이냐는 비판과 한국 전통춤을 무대에서 했다고 세계적인 무용가가 됐다고 쓰는게 뭘 알고 하는 소리냐는 비난, 그녀의 가족이 한국전쟁당시 그녀의 월북으로 여태껏 얼마나 고통받고 살았는지 모르냐고 그걸 건드리냐는 비난이 이어졌다.
내가 그녀의 열정을 너무 높이 사서 이를 잘 녹여내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친일파를 다룬 몇몇 영화가 엄청나게 망한 예를 들며 아직 다 쓰지도 않은 원고를 짓밟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름 내내 고민해 엉터리지만 초고를 써간 그 노력조차 짓밟힌 느낌이었다. 차라리 조금씩 보여주는 것이 이런 비난과 욕을 덜 먹는 일이고 요령임을 나중에야 조금 알았지만 7개의 45분 뮤지컬 팀에서 난 철저히 소외된 느낌을 받았다. 공연 이후에는 긍정적인 평도 받았지만 그런 말들에 일희일비 휘둘리는 나로써는 이미 너덜너덜한 겨울 방학을 맞이 했다.
잠이 오지 않는 증상이 심해졌다. 입 안이 써서 낮에는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그러다 밤 12시가 되면 자극적인 맛을 찾아 치킨이나 빵을 먹었다. 그리고 소화가 되지 않고 잠이 안와 오전 10시 12시가 될 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 했다. 누워서 말러의 교향곡과 슈베르트의 피아노와 바흐와 쇼팽과 베토벤을 들었다. 가슴 깊이 뽑아낼 수 없는 못이 있는 사람을 위해 이런 클래식은 존재하는 구나, 흐느끼면서 음악과 함께 가슴깊이 아파했다.
낮에 자는 잠은 얕고 괴로운 악몽의 연속이었다. 일어나면 꿈에서 일어난 불쾌한 기분이 없어지지 않았다. 나이가 많은데다 다른 경력이 전무했던 나는 빨리 졸업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작곡가 파트너는 구해지지 않았고 거절도 많이 받았다. 작은 거절에도 상처받는 나는 이를 더 심한 타격으로 받아들였고 일이 안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것인지 졸업은 멀어지고 글쓰기는 교착상태에 머물렀다. 게다가 마음이 급할 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을 세상은 몸소 체험하게 해주려는 지 글을 봐준 강사에게 다소 감정이 많이 섞이고 조롱어린 '넌 너의 글을 못 쓸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이 말 듣고 너 울 줄 알았다'라는 말을 듣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로써 나는
아직 날 것이고 내 태도가 애매한 글에 대해선 보여주지 않고 더 품고 있어야 할 필요성을 간절히 느꼈고 여러 선생님에게 비슷한 피드백을 들었지만 그 전달의 언어와 태도의 차이가 내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게 되는 지도 확실히 경험하였다.
아직도 나에게 글을 피드백 받는 다는 것은 악몽과도 같은 일이다. 잠으로 도피하는 나는 어느 순간 잠 속에서도 더 고통받았다. 과수면상태에서 현실보다 더 잔혹한 내 잠의 세계를 경험한 나는 전혀 나답지 않은 일이지만 꿈꾸지 않기 위하여 잠을 참은 적도 있다.
아직도 나는 과수면과 수면부족 사이를 오간다. 큰 슬픔과 분노와 평온 사이를 오간다. 졸업하고 그 다음 해까지 뮤지컬을 쓰며 망가져 삐걱거리는 몸을 펴고 접고 고통을 느낀다. 아프지만 그 이후엔 평온이 찾아올 것을 아는 기분좋은 몸의 고통이다. 숨을 깊이 쉬는데 날개뼈 아래 등쪽이 아프다. 그간 숨을 쉬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 몸의 감각을 다시 하나하나 되돌이킨다. 아마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잠이 든다. 고양이 세 마리가 나를 보며 잠든다. 고르릉 고르릉 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이젠 사람처럼 코까지 골며 자는 고양이의 배를 만지며 스르르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