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의 소년
소나기의 소년
소나기를 다시 읽은 것은 4년 전 여름. 작가 양성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48 시간 미션이 있었다. 그 규모는 케이 팝스타와
비견할 정도로 버거웠다고나 할까. 그 과제는 주어진 등장인물의
솔로 가사를 쓰는 것이었다.
그 중 한 작품이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였는데 소녀보다는 소년을 선택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했다. 본디 약간은 새침하고 예쁘고 도시에서 왔으며
깍쟁이 같으나 마음은 착한 ‘소녀’의 목소리보다는 투박한 소년이
그나마 내가 가진 투박함과 비슷하지 않을까 어리 석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 아무래도 써지지 않아 나중엔 결국 소년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고
소녀의 입장으로 가사를 써서 낼 수밖에 없었다.
학창시절 문학시간에 읽어봤고 그 내용도 별 게 없어서 냇가에서
이유없이 돌을 던지고 소나기를 피하고 또 소년이 소녀를 업어 주고
나서 흰 스웨터에 소년의 티셔츠 색이 물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의 죽음을
부모님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는데 소녀의 알 수 없는 유언을 듣는 소년.
패러디도 많이 되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고 그 옛날엔 영화로도 만들어
졌기 때문에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 서른이
갓 넘어 다시 소년, 소녀 감성으로 느껴보는 소나기는 이젠 소나기보다는
간헐적 집중 호우를 쏟아내고 안개 낀 것 같은 99%의 습도의 나날들을
이어가던 바뀐 한국의 여름처럼 거리감이 너무도 많이 느껴졌다.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리면 땅의 열기는 조금
더뎌지고 가뭄도 해결되고 쨍쨍한 햇살도 덜 야속하게 느껴지는
예전 한국의 여름이었다. 그리고 속속들이 촌스럽게 감정과 생각을
구구절절 써내는 말이 아니라 담담하면서도 가슴을 감자 껍질벗기듯
벗겨내듯 소년과 소녀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담긴 호흡들. 써 있는 단어들
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문장과 문장 사이, 행동과 행동사이의
여백. 그 경지를 느껴보며 헤아려 보는 소년의 마음은 알 것 같으면서도
영원히 알 수 없는 마음이다.
소년은 시골 아이이고 표현도 서툴지만 행동에는 또 거침이 없다. 소녀의
생채기를 입으로 빨아내고 풀을 짓이겨 소녀의 무릎의 상처를 치료해 준다.
병원에서의 치료랑은 다른 소년 식의 치료에 소녀는 무릎을 맡긴다.
그리고 소녀에게 줄 꽃을 꺾어 시들해진 꽃들은 버리는데 그 마음은 소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면서 예쁜 꽃들만 고르려는 노력이다. 이를 보고 말라가는
꽃들도 버리지 말라는 소녀.
국어 시간에 배울 때는 보라색이 죽음을 암시한다든지 시든 꽃이 소녀 자신의
병약함을 암시한다든 지 외우고 그랬던것 같은데 다시 읽어 보니 그런 것에
참 뼈마디가 저릿해지는 아련한 슬픔이 느껴졌다. 각종 수식어구와 표현을 찾아
내고 집착했던 나는 참하고 밋밋해보여도 그 마음을 더듬어 알 수 있는 말에는
참으로 무지했구나 싶었다.
소년이 소녀 주변을 맴돌며 나무작대기로 잡풀을 후적이며 허공을 휘두르는
모습은 어린 시절 오빠가 많이 하던 행동이다. 그건 그저 난 잘 모르겠는 쉐도우
복싱이었고 오빠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쉐도우 복싱이 있었으리란
생각도 해본다. 아마 글쓴다고 괜히 골머리 싸안고 있는 모습이 가끔은 이해안되는
쉐도우 복싱이려나. 여하간 이건 여담에서 더 넘어간 여담이고.
그런 소년의 행동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 짝사랑(혹은 같이 좋아했던) 남자 아이의 마음일
지도 모른다. 내가 건네 준 편지에 답은 절대 안하고 은연 중에 고개를 돌리면
계속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던. 그리고 난 그 시선이 너무 은근해서
피할 수밖에 없고 또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던. 하지만 답장도 없고 영원히
빗나간 마음들. 그 마음들은 우주에서 떠돌고 떠돌아 아직도 나에게 답장이
도달하지 않은 것이겠지.
!여담의 여담!
시험 본 가사를 이래 이래 썼다 하니 그런 소년이 어디에 숨어 있는 지
너무도 감격하며 ‘그거 참 재밌겠다’고 뜻밖의 반응을 보여준 아빠.
유년 시절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딘가에는 숨어있는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