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후

그저 그런 괜찮은 일요일이었어

by moonbow

오후에 느릿느릿 일어났다. 아직까지 후유증이 몸에 남아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아니면 아직 마무리 하지 않은 일을 다시 하기에는

이른 그런 재활의 나날들이었다.


어떤 직관과 예감들이 더 잘 맞고

내 직감들에 더 귀를 기울이는 나날들이다.

더 감각들이 예민해지고 몸의 감각에도 귀를 기울인다.


4시 공연에 늦지 않으려 273버스에 몸을 태웠다.

매우 무더운 날이었다. 소극장에 가기 위해 지나가는 길 곳곳에

과거의 기억이 묻어 있었다.


연극은 한 시간 남짓이었지만 그 무게와 약간의 혼잡함으로 인해

기운이 빠졌다. 아니면 지하의 기운과 옆의 남자 관객이 너무도 힘들어 해서

그런 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더위 때문인지도.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시원했다. 답답한 공간보다 길거리가 더 온도가 높았지만 시원했다.


자주 가던 카페에 갔다.

카페의 이름이 바꼈다.

그림 카페로. 동화책을 봤다. 너무도 예뻤다.

샤케라또를 마시고 조금은 고요한 시간을 보냈다.


1층에 내려가니 길고양이 급식소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축 쳐진 채 쉬고 있던 고양이가 있었다.

내가 부르니 대답을 했다.


젖꼭지가 튀어나온 걸 보니 임신을 한 듯.

피부병도 있고 몸이 매우 더러웠다.

마음이 안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데리고 병원에 가고 싶었다.


큰 사치를 부리는 셈으로(이제는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다.)

서프레제트를 봤다.


여성 참정권에 관한 영화였다.


곡성을 보는 대신 선택한 영화다.

당분간은 너무 하드한 것을 보지 않기로 한다.

당분간만....


집에서 쫓겨난 주인공이 비가 오는 날 창 밖에서 아들에게

모션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서 울었다. 옆에 두 여자가 앉아 있었기에

입을 막았다.


아름다워서 슬픈, 슬퍼서 아름다운 건가.


그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 부터 생각하던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

20대 때 고민했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

새삼스럽게 페북과 뉴스를 달구고 있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는 걸 안다.


주로 여자 주인공을 내세우는 나는 이미 포기할 건 포기했다.

포기한 자에게 주어진 자유다.


갈 길이 멀고 포기할 건 포기했지만

갈 수 있을 때까지 걸어갈 것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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