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일 같은 독서와 삶
완벽과 최적을 양극단에 두지 말아야 한다
- <별일 없어도 읽습니다>, 노충덕 -
작가의 글 속에서 '진지한' 독서에 대한 동조를 오래간만에 찾았다. 젊은이들이 최적만 추구하면 빠진 놈이라 손가락질받고 늙은이들이 완벽만 강조하면 꼰대가 되기 십상이라며, 파울로 코엘류의 <브리다>를 가져와 삶의 태도의 두 가지 양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건축가의 태도와 정원사의 태도. 늘 고행 같은 고단한 일상을 견디어 내는 정원사 같은 삶은 결국 성장이라는 과실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삶도 독서도 이와 같은 일이라 말하며 문사철이라는 인문의 사유 속에 책들의 이름을 간명한소개로 추임새같이 거명해 준다.
서평을 묶어 책으로 엮는 일이 유행이다. 아마도 블로깅과 업로드의 시대에 조응하는 시류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영미 출판계에서 '서평 작가'는 베스트셀러 라인업에 든 지 오래다. 국내에서도 일 년에 수 백 권을 읽어 낸다는 신기한 능력을 자랑하는 자칭 작가들도 여럿이다. 그들 중 상당수, 독후감을 서평이라 이야기하는 용기가 불편하다. 사유와 관념이 배제된 체 주변의 이야기와 인연들을 끌어다가 평론이라 이야기하는 그 용기가 한편으론 부럽기까지 하다. 뭐 이해는 한다. 진지함은 늘 재미에 지는 시대니까.
사실 노충덕 작가의 <별일 없어도 읽습니다>도 같은 결의 독후감 모음이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브런치에서 만난 그의 책소개가 저서까지 이끌게 되었다. 그의 브런치 포스팅 글은 진정한 '책소개'였다. 책을 간단하면서도 제법 한눈에 들어오게 간추려 소개했다. 그 이상도 다른 덧붙임도 거의 없었다. 자신의 신변잡기의 수다들도 배제하고 그 책의 내용과 자신이 집중한 관점을 정리한 독서 노트였다. 그래서 밀리의 서재라는 독서 플랫폼을 가입한 기념으로 온라인 책장 첫 칸에 <별일 없어도 읽습니다>를 담았다.
책은 그 흔한 서평 모음집이 아니었다. 일종의 '독서론'이었다. 그 독서론의 중심에는 ‘관독(觀讀)’이라는 독서의 태도가 있다. 간서치라고 불렸던 조선후기 서생 이덕무가 정리한 구독에는 없는 또 다른 독서의 개념이다. 관독이라는 것은 관점을 투사한 독서의 방법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책 읽으려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목록에 독서법을 다룬 책이 여러 권 있다. 다독, 정독, 남독 등 책을 읽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책마다 사람마다 다르다. 책을 읽다 보면 관점이 생긴다. 관점을 가지고 읽는 관독(觀讀) 경험을 나누고 싶다. 칼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행동을 결정한다고 하지만, 의식이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은 자명한 철학 원리다.
- <별일 없어도 읽습니다>, 노충덕 -
책을 읽는 방법도 일종의 논점이 되어 버렸다. 일 년에 칠팔 백 권이 넘는 책을 읽는다는 신기한 독서 방법부터 재독 삼독 필사에 이르는 집중독서인 심독과 그 반대편의 속독, 간독까지. 독서를 대하는 입장과 태도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나름 나름이다. 무엇이 더 나은 독서의 태도인지, 어떤 책을 어떤 방법으로 읽어 내야 하는지에 대한 책들도 넘쳐 난다. 이런 기술과 묘수의 방법이 아닌 작가가 이야기하는 관독은 관점을 가지고 책을 읽는 태도에 대한 철학이다.
관점이라는 것은 독서나 학습으로 이루어진 진리에 대한 탐구다. 이 탐구는 시대를 넘어 보편성을 지닐 때 비로소 증거로서 논증 간능한 관점이 된다. 관점을 가지면 타인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반대로 나의 주장을 변경할 수도 있는 유연함이 생긴다. 그 논쟁적 사유의 조건으로 작가는 첫째로 취향과 주장을 구분하고, 둘째로는 주장은 반드시 논리적 증명이 되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관점을 앞세우고 뒤세우기 이전의 필수 조건이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비현실의 현실화다. 글을 쓰는 행위는 비현실적인 활동이다. 쓰는 일은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 세계를 읽는 독자들은 자신의 삶으로 관점을 가져와 비현실을 현실화한다. 인생과 삶의 지침으로 삼고 성공의 멘토로 여기며 이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닫는 선지의 자각으로 받아 들이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서라는 노력은 관점이 개입된 사유가 되어야 한다. 이 관독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책 읽기의 첫걸음이자 기본이 되는 책을 고르는 힘을 길러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현명함이란 질문하고 듣는 태도가 바르고, 침묵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단순한 언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 <별일 없어도 읽습니다>, 노충덕 -
요즘 출판, 도서, 문학계에서는 ‘자서전식 에세이’가 유행이다. (이 유행의 이유에 대해서는 최근에 접한문화평론가 에밀리 부틀의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를 통해 자세히 이야기 나눌 생각이다.) 이는 진짜와 허상이 교차하는 ‘진정성’이라는 거짓에 대한 유행이기도 하다. 자신의 경험과 자기만의 주관적 사고에 대한 글들이 넘쳐난다. 이런 자기애 넘치는 허상과 진짜의 경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 메시지를 따라가기란 참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런 유행에 기대어 소위 서평이라는 것들도 책자랑 아니면 독서량 자랑의 ‘자서전적 에세이’로 온통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충덕 작가의 책은 이런 부류의 서평들에 지친 사람들에게 일종의 가이드를 준다. 작가는 자신의 사유와 메시지를 관점으로 묶어 정리하면서 그 관점의 형성과 보충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흔한 책소개가 아닌 관점과 메시지에 연관된 책을 열거하거나 아주 간단히 소개해 낸다. 이 지점이 형편상 독서를 잠시 멀리한 비루한 자에게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작가의 브런치를 엿본다면 알 수 있지만, 독서나 감상 후 기록의 기본이자 가장 어려운 ‘간추려 기록하기’에 충실한 독서노트가 바탕이 된 기술들이 책을 이룬 듯하다.
문학비평을 공부하던 시절, 은사님의 주문은 감정의 배제와 탈개인화였다. 그것의 시작은 작품을 간추리는 서술, 줄거리 요약의 훈련이었다. 최근 서평이니 영화평이니 하는 글들이 넘쳐 난다. 사실 대부분이 ‘참 좋았다’라는 감상을 유행하는 문장과 자서전 에세이로 섞어 내는 인상비평, 아니 비평이라는 지칭이 아까운 감상 일변도의 독후감, 리뷰들이 넘쳐난다. 그 속에서 작품의 핵심을 간추린 요점을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관점을 세우고 그 관점에 맞는 독서노트를 레퍼런스로 제시하는 노충덕 작가의 <별일 없어도 읽습니다>는 독서의 자세를 고쳐 잡고픈 모두에게 추천해도 손색이 없겠다 싶다. 꽤 긴 시간 동안 잊었던 독서를 다시 시작하는 나에게는 특히.
산다는 것은 별일 없는 하루하루가 모여 나름 나름의 인생을 만드는 시간의 작업이다. 신은 회초리가 아닌 시간으로 벌을 준다고 했던가. 진지하고 전문적인 사유와 고찰이 재미로 가득하고 개인적인 특이함에 묻혀 버린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문사철이라는 인문학의 시간 채찍이 더 필요한 세상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특히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문제를 풀어 해결할 힘을 갖는 일이다. 현실이 품고 있는 문제를 풀어 새롭게 하고 더 나아지게 하는 일에 도움을 주는 일을 지혜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독서는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한 아는 것 知, 생각하는 것 思, 설명하여 쓰는 것 識 , 주장을 갖는 것 見의 훈련이자 시작이 아닐까.
지사식견(知思識見)을 거쳐 꼬인 실타래를 풀어야(解) 지혜다.
- <별일 없어도 읽습니다>, 노충덕 -
* 노충덕 작가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