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의 습관은 화자의 입장이자 작가의 태도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044037.html#ace04ou
생각된다, 확인된다, 판단된다, 예상된다….
이런 ‘된다’는 말을 참 많이 쓰는 이상한 세상입니다. 다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말에 없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본디 우리말에는 피동 표현은 있어도 수동 표현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때렸다와 맞았다, 잡았다와 잡혔다 같은 표현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생각한다와 생각된다, 판단한다와 판단된다는 괜찮지 않습니다. 이런 말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영어의 수동태 표현을 그대로 번역해서 쓰면서 우리에게 익숙해졌습니다. 요즘은 교과서에서도 이런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글쓰기에도 이런 틀린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사 본문 중-
우리의 일부 문화 습관에 대해 일본 문화의 잔재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비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언어의 사용, 즉 '말과 글'에 대해서는 생각할 지점이 참 많아 보인다. 아직 우리들의 말과 글 중에 일제강점기에 묻어난 일본식 표현이 참 많다. '다만, ~다만'이라는 표현부터, 조사의 남발, 그리고 다 망쳐 놓은 시제의 혼재 등이 대표적이다. 국뽕은 아니지만 조어학적으로 언어학적으로 한국어는 일본어보다 몇 단계 더 진화되었다고 생각이 들기에 이런 잔재들의 우성 생존은 이해가 어렵다.
어느 날 신문 칼럼을 보다가 초등학교 선생님의 '~된다'라는 일본어식 표현에 대한 우려를 보았다. 비판 이유는 '피동'과 '수동'의 미묘하지만 엄청난 차이에서 시작한다. 피동은 능동적 행위의 상대적 동사로 때리다-맞다, 잡다-잡히다 등의 능동의 주체와 피동의 주체를 명시하는 '주어'가 있는 동사가 된다. 그러나 '~된다'는 표현에는 '주체-주어'가 모호하다. 확인된다, 예상된다, 요구된다 등 '된다'의 남용은 책임과 주체가 될 대상을 가려 버린다. 일본어 특유의 '주어 없는 표현'이 되어 그들의 '애매모호한' 중립 아닌 중립의 표현으로 변질한다.
이런 표현을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애석하게도 '기사'형식의 신문, 방송, 잡지 등이다. 기자들은 아주 습관적으로 이 '~된다'의 표현을 쓴다. 가장 많은 표현이 '확인되었다'라는 전언의 표현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유용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리포팅 결론의 주체를 애매모호하게 하여 분쟁을 피하고 오보와 가짜 뉴스의 지적에서 아주 조금은 핑계를 만들 수도 있으니까. 아주 습관적인 '전언(傳言)-말을 옮김'의 대표적인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남의 말을 빌어 자기의 주장에 힘을 싣고, 결국 책임의 소재는 두리뭉실 가려 버리는 참 못된 습관이다.
기자들의 은어에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 헤드라인을 여전히 야마라고 하고, 취재구역을 나와바리라고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전통은 여전히 고수 중이다. 말의 습관은 화자의 입장을, 글의 습관은 작가의 태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자들의 언어 습관에는 태도, 즉 의도가 있다. 책임의 회피, 그리고 특권의 의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의사들의 굳이 알아보기 힘들고 들어 먹기 힘든 영어 단어를 고수하는 데에도 비슷한 이유에서 말미암은 입장과 태도가 있으니까.
SNS와 플랫폼에서 글을 읽다 보면 거슬리는 표현들이 적지 않다. 피동, 수동의 표현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주어의 문제에 도달한다. '내가 줄까요?'라는 물음과 '당신이 가질래요?'라는 물음의 목적은 한 가지다. 그러나 그 말을 받아들이는 청자의 느낌은 똑같을 리가 없다. 화자의 입장과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풍성한 우리말의 동사태를 잘 이용하고 사용하는 것도 작가의 역량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한참 멀었다.
내 글에는 번역투의 말이 많다. 핑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외국문학을 전공하다 보니 온통 번역서를 끼고 다녔다. 대부분 일본어의 중역본들이라 그 잘못된 번역에 물들어 버렸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 가장 많은 글을 쓰는 일은 제안서와 보고서였다. 비즈니스, 정보통신 컨설팅을 하면서 책임 주체가 모호하게 만들 법기술의 언어를 입과 손에 달고 살았다. 시간이 지나고 문학의 언어를 다시 쓰려고 했을 때 많은 장애를 만나 여전히 좌절하며 지내고 있다.
"결국 넣고 빼는 일이라면 섭취와 배설 중에 무엇이 더 깨끗한 활동일까 궁금해졌다. 오만 것 다 삼키고 들이마시는 입보다 몸속의 노폐물 빼다 버리는 항문이 더 정결한 활동의 주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찌 되었는 입은 제대로 간수 못하면 정말 더럽다."
-언젠가 끄적인 메모 중-
최근 tvN에서 방영한 <무쇠 소녀단>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았다. 철인 3종 경기에 입문하는 여성 배우들의 도전기에서 건강한 응원을 얻었다. 그들이 이루어 낸 성취는 스스로가 완주’하고’ 달성’하였기’ 때문에 방송 이상의 의미가 남았다. 그녀들의 성취와 달성에 ‘된다’라는 불필요한 조동사가 끼어들긴 어렵다. 성취 ‘되거나’ 달성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성취의 순간에도 주체의 노력과 시간을 무시한 체 ‘합격되었다’, ‘취직되었다’, ‘성공되었다’라는 표현을 부지불식간에 넘치게 뱉고 쓰고 있다. 누군가 합격하고 취직하고 성공한 성취들이 가려지기 십상인 말들이다.
남의 말은 3일 간다고 한다.
주체가 되고 주어가 되는 삶은 말과 글부터 아닐까 싶다. '된다'는 '이루다', '완성하다'라는 뜻의 능동적 표현이 본딧말이다. 밥이 되다. 시간이 되다. 일이 되다. 혹은 특전사의 "안 되면 되게 하라"의 구호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