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not Who am I - 이게 진짜 나야?
진정성 있는 사과
정치인들이나 셀럽들이 유권자들이나 대중들에게 물의를 야기했을 때 해결의 마지막 수단으로 ‘사과’를 선택하곤 한다. 예전과 달리 유명인들의 말과 행동이 거의 실시간으로 드러나는 노출의 시대에 그 사과마저 식상하고 흔한 노력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과의 효용을 가늠하는 척도로 흔히 ‘진정성’을 거든다. 진정성 있는 사과라는 것은 사과를 하는 사람의 진심을 대변하리라 유추되지만, 사과를 받는 사람이 진짜로 받아들이는지는 여전히 애매하다. 말의 효용을 떠나 사람들은 ‘진정성’이라는 척도로 자신만의 기준을 삼는다. 이처럼 최근 들어 쉽게 쓰는 ‘진정성’이라는 말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화, 경제, 정치적 파급은 생각보다 넓고 깊게 스며들고 있다.
대중문화기획자이자 컬럼리스트인 에밀리 부틀은 진정성이라는 말과 그 쓰임현상에 대한 의문을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라는 책에 풀어놓았다. 원제가 <This is Not who am I>라는 영문 도서의 한글판 제목에 직관적으로 ‘진정성’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 한국 독자들의 이목을 당길 수 있다. 한글판 제목이 의미 없지 않음은 책의 서문을 펼치면서 금세 수긍할 수 있다. 에밀리 부틀은 문학비평에서 시작된 ‘진정성’이라는 말의 효용보다는 그늘과 악용애 대한 의문을 단어의 정의부터 시작한다.
<데미안>의 유명한 첫 구절, '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는 문학적 진정성을 이야기할 때 흔히 예시로드는 문장이다. 이처럼 문학에서의 진정성은 작가가 구성하는 세계의 비현실성은 고스란히 작가의 개인 내면 우주에서 비롯한다는 고찰적 비평에 의거한다. 제법 어려운 개념인데, 쉽게 설명하자면 진정성은 ‘개인의 기준에서 판단하는 진리와 그 기준’에 대한 개념이다.
영어 authenticity라는 단어를 ‘진정성’으로 번역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말에도 자리 잡게 되었다. 영한사전을 들추어 보면 진정성에 대한 유의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비즈니스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단어는 integrity나 sincerity인데, 이 두 단어의 결은 authentivity와는 사뭇 다르다. 앞선 두 단어는 보통 '신의, 성실'에 대한 진위 여부의 판단이다. 사회의 법과 규율, 타자와의 계약 관계에서의 이행이 진짜 이루어졌는가의 개념이다. 반면 진정성이라고 번역되는 authenticity는 어원어두인 auto-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이라는 의미를 내포해 '자기 소유를 달성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타인, 사회관계에서의 성실, 진실, 신의의 의미보다는 자기 안의 진짜 마음, 양태를 나타내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우리말 단어 ‘진정성’이란 말은 표준어 사전에 등재되지도 않은 신조어다. 신조어라고 하지만 그 탄생의 연한이 MZ세대들의 억지 줄임말, 괴기한 합성어보다는 훨씬 오래된 말이다. 쉽게 가져다 쓰는 말일수록 그 말의 탄생에 대한 고찰은 건너뛰기 십상이다. 진정성이라는 말은 ‘진정으로~’라는 명사로 독립할 수 없는 말을 어원삼아 개념, 성질의 의미를 가진 ‘~성’을 붙인 단어다. 영어의 원단어와 번역의 틈 때문에 우리말에서의 쓰임은 더욱 오용의 가능성이 높아져 있다.
에밀리 부틀은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를 통해 진정성이라는 거짓의 진짜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그 이유를 문화, 정치, 개인의 자아실현 등의 다양한 현상을 관찰하면서 사례 분석을 시도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예술 미학의 관점에서 시작한 진정성이라는 개념이 자본주의에 포섭이 되면서 그 의미를 잃었다고 주장한다. 천박한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세상에서 지난 세기까지 이어져 온 도덕률은 유효기간을 다했다. 그런 이유로 진정성은 개인주의의 도덕적 버팀목이 되어 널리 퍼졌다.
에밀리 부틀이 정의하는 진정성의 첫 번째 의미는 '사물의 진정성'이다. TV쇼 <진품 명품>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그 물질이 표방하는 가치의 갈음을 뜻한다. 두 번째 의미는 질적인 측면의 진정성으로 우리가 흔한 말로 쓰는 '진정성이 있다'라는 공감의 평가다. 마지막 의미는 자아의 진정성이다. 이는 웰빙과 미니멀리즘처럼 자기 자신 내면의 진짜를 찾는 일이다. 다른 말로 진실의 판가름은 자신의 자아에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한다.
진정성이라는 말은 진실이나 진리라는 의미에 기생할 우려가 있다. 자칫 진정성이 진실이나 사실을 의미한다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진정성은 오히려 거짓이라는 논리 개념에 더 가깝다. 누군가 사과를 하였다고 했을 때, 그 사과의 진실은 사실 성실성의 유무에 의해 가름이 난다. 즉 사과는 받는 사람의 공감과 수긍, 납득이 전제되는 것이 사회 규준이다.
반면 '진정성 있는 사과'라는 것은 받는 사람과는 크게 상관없이 사과를 하는 자아의 확증에 달려 있다. 자기 자신의 기준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느낌을 주고받으면 진정성은 성립된다. 그 성립의 판가름은 늘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와 목격자의 몫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성은 거짓을 잘 포장하여도 솔직하다면 상관없다는 태도가 된다. 진정성의 기준은 언제나 개인의 자아 내면의 나름 나름일 뿐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 진정성이라는 가짜의 진짜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에밀리 부틀은 문화비평가답게 셀럽과 예술의 영역에서 그 현상을 쉽게 찾아낸다. 현대사회의 문화 트렌드인 인플루언서와 자서전적 소설-에세이의 유행에서 진정성의 민낯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의 셀럽은 비범한 재능을 가진 히어로들이었다면 현대의 셀럽은 평범한 일상을 내세운 인플루언서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리얼리티쇼나 블로깅, 업로드하는 솔직해 '보이는' 모습에 대중들이 열광한다. 그 뒷면에 잘 짜인 각본과 뒷광고, 가십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단이 아닌 개인 개인의 자아 내면 기준으로 진정성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되었다.
영웅은 큰 사람 Big man이고,
셀럽은 Big name이다.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에밀리 부틀-
1990년 힙스터들이 이끌었던 하위문화에 대한 반발은 그들의 코어를 밀어내기보다는 그대로 수용하여 다른 유행을 만들어 내었다. 드러내는 듯 아닌 듯하는 브랜드와 트렌드를 자신의 일상과 동화하는 착각을 만든다. 인플루언서들의 일상이 마치 자기 내면의 자아라는 착각. 자신이 이상적이라는 프로토타입을 가상으로 만들어 인플루언서나 셀럽들의 면모와 동기화하는 내적 자아도취가 진정성이라는 껍질을 만든다. 진정성은 어찌 보면 자신에게 솔직하다는 착각의 거짓일지도 모른다.
문학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은 쉽게 목격된다. 자전적 이야기가 대유행이다. 한국의 글쓰기 면면을 보아도 자전적 에세이, 수기형태의 수필,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들이 넘쳐 난다. 문학이란 본디 비현실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엄청난 거짓이다. 그 거짓에 빠져 거짓인 것을 알면서도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얻는 일이 문학과 예술의 작용이다. 그러나 자전적 작문들은 그 반대의 길에 서있다.
자전적 이야기의 성행 이유가 정보획득의 개방으로 인한 경험의 진위에 대한 시비를 피하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명제에 대한 맹신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일은 나만 보는 비밀 일기장이 아닌 이상 누군가 읽어 주길 바라는 행위다. 그 전제로 말미암은 글쓰기라는 활동은 본질부터가 꾸미기, 거짓에 수렴할 수밖에 없다. 자전적 이야기는 자신만의 고유한 소재는 될 수 있으나 기술한 모든 단어와 문장, 문단이 진실이고 사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단 그것에 대한 진정성이라는 착각은 그런 유형의 글쓰기의 버팀목이 된다. 에밀리 부틀은 문학뿐 아니라 음악 등 다른 예술의 영역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책은 후반부에 자아실현이라는 심리학적 범주에서의 진정성을 이야기한다. 일종의 자기 돌봄(self care)로서의 진정성을 이야기한다. 인터넷 시대에서의 진정성은 더 나은 무엇을 추구하는 것보다 현재의 상태 그대로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집요한 노력이다. 그 노력의 형태는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을 부각하는 순수성과 고백의 형태로 나타난다. 소셜미디어가 온갖 아이러니로 혼탁해질수록 자아실현이라는 암묵적 목적이 있었던 업로딩, 포스팅, 블로깅, 자저선적 에세이는 일종의 고백성사가 된 지 오래다.
진정성은 오늘날의 극단적인 분열적 정치 상황을 초래하였다고 말한다. 바로 소셜미디어 등의 파편화된 미디어가 분열의 정체성 정치로 떠밀었다는 주장이다. 진정성은 이쪽인지 저쪽인지 분명한 편가름을 강요한다. 그래서 현대사회의 정치적 논쟁인 진보와 보수, 정치적 올바름, 젠더와 페미니즘 등 정체성에 대한 편가름은 진정성이라는 핑계로 대립을 양산한다. 변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라며 말이다.
진실이 반드시 진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에밀리 부틀-
문학에서의 진정성은 거짓이 있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서사에서 충분히 흡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거짓을 인정하는 솔직함이 진정성이라 할 수 있다. 진정성은 이런 이유에서 고백의 개념으로 팔리고 자신의 가식을 인정하는 개념으로 팔린다. 그렇다고 해서 그 거짓과 가식이 교정되거나 해소되는 것까지 진정성이 담보하지는 않는다. 이 지점이 에밀리 부틀이 던지는 질문이다. "This is not who am I"라는 말은 의역하자면 "이게 나야?"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오래된 물음 '나는 누구인가'라는 원초적 철학 명제에 이른다.
나의 삶이 남들보다 더 진짜 삶인지 증명하고픈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결과 자아실현이라는 무게 없는 말에 짓눌리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아실현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화하는 과정과 그 결실이다. 진정성이라는 말 하나로 진정한 자아실현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착각은 일종의 성급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려는 노력은 긴 인간 역사에서 오래된 노력이다. 그 노력의 기록이 철학이고, 역사이며, 문학이다.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는 요즘 시대에 적용할 예시들을 들어 개념을 정리하는 개념서로 읽힌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물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등도 일종의 개념서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쓸모를 재발견하면서 쇼펜하우어와 샤르트르를 소환하지만, 그 깊은 사유를 갑자기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철학이라는 다소 무거운 세계를 열기 위해 도어 오프너로 개념서를 읽어 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단 그 개념의 정리와 정의가 보다 정교하고 포괄적이며 보편적이면 더욱 좋겠지만.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이자면, 번역은 참 중요하다. 관련 분야의 인사이트가 담보되고 문장의 완결성이 뒷받침하는 번역이 아쉬운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