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5일 윤석열이 헌정사상 최초로 체포 구금되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새벽부터 긴장감으로 속보 뉴스를 고쳐가며 대다수의 국민들이 목격한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한순간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큰 불상사 없이 체포 영장이 집행되었고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아직 현직인 대통령은 공수처로 압송되었다. 정말 불행 중 다행만 있을까? 여러 이유로 크게 보도되진 않았지만 윤석열 탄핵 반대 지지자로 보이는 50대 남성이 스스로 분신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이 집행된 15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있는 경기 과천시 정부과천청사 인근에서 남성 1명이 분신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연합뉴스)
1월 18일까지 보도를 통해 알려진 경찰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지난 15일 밤 8시 5분께 공수처 인근에서 분신을 시도한 50대 남성이 전신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고 있다. 전날 긴급 수술을 받았으나 현재까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행이라는 말이 쑥 하고 들어갈 일이 틀림없다.
문제는 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다. 우선 극단적인 우파 인사로 온갖 집회를 이끄는 전광훈 씨는 분신 사건 이후 '효과 있는 죽음을 줄 테니, 기다려라'라고 극단의 행동을 부추기는 부적절한 언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미 극우 지지자들의 부조리한 인식에는 이러한 돌발 행위를 '순교'라고 이르는 지경까지 치닫고 있다.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반대 진영이 더 심각하다. 진보 정치 지지자들과 진영의 오피니언들은 이 죽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합리적인 판단으로 또 다른 극단의 행동을 동요하는 언급자체를 자제하는 경향이 공식적 입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강한 성향의 지지자들은 '보수 꼴통의 최후'라며 그저 미성숙한 사회인지 때문이라고 혀를 차곤 한다. 극단적 분열의 상황에서 벌어진 비극 뒤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뒷말들이다.
말의 정합을 따지기 전에 진보 정치 지지자들은 '은근한 우월의 자의식'을 극우 세력들에게 가지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보편적 인식으로 드러날 때가 있어 걱정이 된다. 정말 극우 포퓰리즘 지지자들은 그저 '아스팔트 지지층'이 되어 버린 무지성의 좀비들일까? 어쩌면 이런 근거 미약한 자의식이 지금의 어지러운 정국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향수적 박탈'이 극우를 만든다
작년 12월 방영한 EBS의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에서 미국의 정치학자인 조앤 윌리엄스는 미국과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의 핵심 지지층은 중산층이라고 이야기한다. 계급론과 페미니즘 학자답게 남성들의 극우 포퓰리즘 쏠림현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들의 주류가 빈곤층이 아닌 중산층이라 분석 진단하고 있다. 이들 중산층의 극우 지지 성향은 '향수적 박탈(Nstalgic Deprivation)'에서 기인한다는 설명이다.
향수적 박탈은 지금보다 과거가 더 나았다고 느끼면서 발생하는 박탈감을 말한다. 예전의 나였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았을 것이라는 일종의 회귀적 사고다. 자신의 경험이나 실제 과거에 비춘 박탈이 아닌, 익히 들었던 이전 시대의 평균에 비추어 느끼는 상대적 박탈을 말한다. 한국 남자 청년들이 여성 우대나 군복무 불이익 등의 변화에 대해 느끼는 박탈은 이전 세대가 가진 기득과의 격차에서 비롯한다는 이론이다.
EBS의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에서 미국의 정치학자인 조앤 윌리엄스는 향수적 박탈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EBS)
여기에서 중요한 지점은 일반적인 경제계급론에서 하단인 빈곤층이 느끼는 격차보다 중산층이 이전 시대의 중간 계급들과의 격차를 더 크게 느낀다는 데에 있다. 가능했던 계급 추월이 이제는 극복하기 힘든 깊고 넓은 격차를 실감하고 이 좌절감을 표출하는 방법 중 하나가 극우 포퓰리즘에 대한 지지로 나타난다는 이야기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의 상황과 한국의 극우화와는 양태가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아스팔트 우파', '돈벌이 노인들'이라는 싸잡은 폄하로 그들의 창궐을 극복할 진단은 요원하기만 하다. 생각보다 극우적 사고는 소위 중도층이라는 정치 소극 관여층에도 깊게 스며들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욕망의 본전 심리'에 기인한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팽창한 사회의 기반 플랫폼에서 개인은 이미 각자도생의 파편이 되어 버렸다. 그저 사생활이라 단순화할 수 없는 개인화의 파편들은 살아남기 위해 연결의 욕구를 발생시킨다. 초연결 사회니 연대 사회니 하는 말들은 개인화로 고립된 객체들의 생존 전략이자 욕구가 된 지 오래다. 가장 뚜렸단 증거가 사회연결망마다 각종 뉴미디어마다 넘쳐흐르는 해쉬태그다. 해쉬태그의 정의로 이리 묶이고 저리 나뉘는 개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임시 준거를 갈급하게 되는데 이런 현상이 정치에 파급을 미치면 정치세력화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극우는 한 낯 유행이 아닐지도 모른다
극단적 믿음은 상식이라는 보편적 가치마저 쉽게 무너뜨리기 일쑤다. 문제는 이런 비상식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질 때 스스로 자정 할 수 있는 힘을 잃는다는 데에 있다. 거기에 더해 이틈을 니치 마켓으로 이해해 파고드는 무서운 욕망의 잇권이 개입하고 있다. 계엄과 탄핵의 국면에 보수성향 극우 유튜버들은 그야말로 떼돈을 벌어 들이고 있다. 이뿐인가 혼란의 틈에서 정치적 입지를 새롭게 세팅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눈꼴사나운 일이 연일 거듭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정치인이 이준석이다.
극우 준동의 지분이 이준석에게 상당 부분있음에도 여전히 애매한 입장만 가득이다. (YTN)
갈등의 국면을 적극 해결하는 노력보다 자신의 대권 도전을 알리는데 시간을 쓰는 정치인이다. 그리고 이 정치인이 지금의 급진 극우 청년 세력을 인큐베이팅한 장본인이다. 에프엠코리아 같은 극단주의 청년 사이트를 자신의 선거마다 적극 활용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반페미니즘, 반개혁의 어젠다를 공약으로 내 건 장본인이다. 윤석열 내란 탄핵 정국에서 잠시 거리 두기를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표가 필요한 시기가 오면 이준석은 다시 이들과 결탁할 것이 뻔하다.
이런 의도적 세력화에 더해 잠재적 창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이러스 잠복기처럼 극우 극단주의는 어느새 일상의 주변까지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가장 큰 우려가 '중산층의 붕괴 추락'이다.격차의 인식은 아래보단 위로부터의 간극이 더 크게 벌어진다 느껴질 뿐이다.이런 좌절감 속의 청년 계층들은 아버지 세대를 떠 올릴 수밖에 없다. 자신의 아버지는 이루지 못했더라도 계층의 수직 상승이 가능했고 노력이 담보된다면 중산층의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높았던 이전 세대의 그 옛날에 대한 향수가 박탈감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이 출석한 가운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이 열린 지난 18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연합뉴스)
윤석열 내란 우두머리 혐의자의 구속이 결정되자 그 새벽에 수백의 무리들이 서부지방법원을 습격하여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상대 진영의 성향 다른 시민들이 아닌 그저 폭도들의 폭동이었다. 경찰과 일반시민이 구타당하여 크게 다치고 법원은 유리창, 차단 셔터, 사무집기들이 파손되었다. 더 우려되는 점은 이런 폭력의 양태가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는 예감이다. 여전히 이들을 부추기어 금전 이득을 취하는 기성세대와 정치세력들이 있고, 격차 해소를 위한 골든타임을 놓친 이 사회의 욕망 그물망이 그들을 계속 걸려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전쟁이 아닌 재난에 처한 세상
일탈의 행위와 판단에 손가락질하는 것은 쉽다. 세상에 어른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저 나이 많은 노인들만 가득하지 진정한 어른들은 자취를 감추거나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극우 포퓰리즘 지지자들의 법원 폭동을 보고 혹자들은 신천지니 사랑제일교회니 5만 원 받고 온 용역들이니 하며 애써 의미 축소하곤 한다. 이 진단이 매우 위험한 내일을 맞이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지금을 전쟁이라 여기고 갈등과 대립만 세운다면 답은 없다. 이 상황을 일종의 재난으로 이해해야 한다. 재난에서는 피아의 식별보다 구출과 소생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근본이 포용의 노력이다.
세상은 언제나 부모의 세대와 자식 세대 간의 갈등과 대립은 늘 현재 진행형이다. 어느 시대가 되었든 아버지들ㆍ어머니들과 아들들ㆍ딸들은 한 편으로 서로의 관심, 이해,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질책, 원망, 미움을 쏟아 낸다. 이런 양가적 심리와 양상이 역사의 한 축을 이끌어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코로나 시국이라는 난생처음의 전 세계의 위기 속에도 중대 선거는 치러졌다. 절박하고 긴급한 일상은 뒤로 하고 밥그릇 싸움을 하는 정치 무리배들을 뒤로하고서라도, 세상은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언론과 미디어 플랫폼에서는 유독 '청년'이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었다. 청년 세대가 직접 표현하기도 하고 기성세대가 꼰대가 아닌 척, 이해하는 척 말을 거들었다.
그 세대들은 취업은 어렵고, 공부는 더 어렵고, 경쟁은 버겁고, 나만 외롭고, 남들만 행복하고, 이 모든 게 내 탓은 아닌 것 같고, 나의 포기는 끈기의 부족이 아니라 어쩔 도리 없는 현실 탓 이리고 말했다. 꼰대 중의 꼰대의 마음으로 그 '징징거림'이 참 거북했다. 그리고, 정치적 꼼수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연일 정치권의 구애에 마치 중요 존재가 된 것만 같아, 아우성은 드세졌다.
아버지 선배 세대들의 잘 못으로 기인한 잘못이라는 생각에, 철없는 정치인은 그 아버지들을 포위하라고 '세대 결합론'이라는 것을 내어 놓았다. 알맹이 없는 관심 종자들은 미디어와 정치꾼들의 주목에 우쭐해졌다. 된장인지 똥인지 맛도 보기 전에 목에 둘러준 빨간 목도리가 올림픽 금메달 성취 마냥 자랑하고만 싶어 졌을 것이다. 구직과 취학, 그리고 소득의 불평등이 자신의 세대에서 심화되었다며 울부짖었다. 진짜 사실인지 아닌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만, 참 듣기 불편했다. 그렇다. 꼰대 중에 꼰대가 맞았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는 탄핵 반대 집회를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하지만, 그들의 아우성을, 그들의 괴로운 호소를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보기 시작했다. 기시감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익숙하고 귀에 익은 이야기들이었다. 바로 내가 나의 아버지에게, 나의 세대 아들들이 아버지들에게 대들며 반항하던 그 마음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내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저도 어느새 그때 답답하고 융통성 없고 비열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필요한 것은 힐난보다 포용
뉴스에 연일 달라진 세대의 '이념' 지형을 이야기한다. 언론은 기득권의 나팔수라는 꼬인 생각으로 보면, '세대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갈라 쳐 놓아야 정치로 밥을 먹는다는 사람들의 공갈 프레임이다. 진영이 견고해 보이는 4050 세대에게 더 이상 '이념의 프레임'은 작동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가진 자와 못 기진 자로 자영업,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라는 계급으로 갈라놓는다.
그것도 부족하니 위, 아래로 잘라 세대 간의 벽을 높이게 만든다. 가뜩이나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애증의 관계를 부추기면서 말이다. 저들이 너희들의 연금을 빼먹는다는 이야기는 정말 최악의 쓰레기 이간질이다. 300회 넘는 국민연금은 내가 납부했지 미래 세대가 납부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최근 엄중한 시국에 광장의 모습이 변모하였다. 불과 8년 전 유사한 상황에서 광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4~50대의 중년들이었다. 매번 무거운 분위기에 분노를 실어 촛불을 밝혔다. 그런데 요즘의 광장은 1~20대의 여성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 손에는 촛불대신 응원봉을 색색이 들고 요즘 유행가에 맞추어 목소리를 높인다. 축제와 같은 광장. 어쩌면 꿈꾸던 광장의 모습이 생각보다 일찍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세대는 서로의 알력으로 밀어내고 밀리는 교체의 대상이 아니라 시간이 주는 기회를 틈타 자연스럽고 무리 없게 교대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시위에 사용된 응원봉. BBC 캡처
세대 간의 애증의 드라마들은 역사의 시계를 가게 하는 시계 밥일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서 그렇게 사랑만으로는, 반대로 증오만으로는, 걸어갈 수 없는 아버지들과 아들들은 단지 세대'차이' 때문에 갈등하는 것은 아니니까. 아버지들과 아들들의 시계는 같이 가는 것 같지만, 사실 다른 시간을 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는 기쁘고, 누군가는 슬프며, 함께 좋다가도 서로 반목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같은 듯 다른 시간을 걸어가면서, 아들들은 어느 사이 아버지들이 된다. 돌아가신 아버지들은 영원히 사라지는 세대가 아닐지도 모른다. 소천하신 아버지가 문뜩 이렇게 기억의 조각을 불러 내듯, 지금의 아버지들은 먼 훗날 후세의 어느 시간에 투영하여 시대의 정신이 부활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미려한 역사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