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들쭉날쭉하지만 나름 독서를 하는 편이다. 밥 먹는 속도가 빠른 만큼 읽어대는 속도도 빠른 축이다. 40이 넘어 인지하게 되었는데 ‘문자 중독’이라고 수 있을 만큼 비어 있는 시간엔 늘 읽어 댄다. 요즘은 디지털 미디어와 매체의 파편화로 스마트폰 하나로 다양한 글들을 접하게 되지만, 살림이 곤궁하기 전엔 개인적으로 eBook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유를 말하자면 늘어 세울 수도 있지만, 오랜 독서 습관에서 ‘정주’할 수 있는 몰입감을 종이책만큼 얻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던가 싶다. 읽어 낸 만큼 뒤로 보내는 책장들이 두껍게 쌓이는 쾌감과 남은 책장이 얇아질 때마다 목표의 완주에 대한 희열이 조금씩 밀려드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독서에 대한 남다름이 있다면, 영화 보기와 달리 독서를 매우 전투적으로 했다. 비판적 사고로 첫 장을 들추곤 했다. 학부 때 두꺼운 러시아 장편들을 깨알같이 하루 이틀에 읽어 내고 분석에 가까운 에세이를 써야 했던 기억이 자리 잡기도 하였고, 직업의 특성상 기술문서와 숫자 가득한 가설과 증명의 ‘제안서’를 늘 달고 있어야 하는 환경도 한몫했다. 그래서 좀처럼 ‘서평’은 물론 간단한 '독후감'을 남기지 않았는데, 남기더라도 책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자제했다. 콘텐츠와 내용에서 오는 개인의 생각을 정리하는 정도로 남겼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독서의 습관이 비판적 읽기가 몸에 밴 채로 남아 있고, 책을 쓴다는 작업이 얼마나 가열찬 고민으로 고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인가를 잘 알기 때문에 맘 속의 비판을 그대로 전하지 못함에 있었다.
소위 '베스트셀러'나 '입소문'에 오르내리는 책을 당장 잡아 보지도 않았다. 한 뜸 들이고 집어 들어 보곤 했다. 한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의 세평을 뒤로하고 그 책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크기 때문이었다. 몇 해 전 유시민 작가의 <역사의 역사>와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는 사람들의 추천 반, 개인의 호기심 반으로 집어 들게 되었다. 유 작가의 책은 문장 자체가 선호하는 문장이고, 주제 또한 좋아라 하는 역사서에 대한 이야기라 제법 잘 읽힌 책이었다. 그리고, 무언가 주장보다 설명과 해설이 많은 책이어서 상식과 지식의 창고에 쌓기에 좋은 독서가 되었다. 물론,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 적정심리학
하지만,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는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 오래간만에 만난 '힘든 책'이 되었다. 힘든 책이 되는 경우는 나의 이해와 상식의 언덕을 넘어선 언어들로 구성된 현학적이고 난해함이 가득이거나 처음부터 '아닌데'라는 생각이 깊게 들어서는 내 안에서 내용을 처음부터 가로막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 책은 후자의 경우였다. 정혜신 박사의 평소의 행보와 생각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입장이지만, 책의 내용이 좀처럼 내 것이 되기는 힘들었다.
책의 전반적인 이야기가 '공감'과 '동의, 그리고 '동조'라는 것들의 구분되지 않은 주장의 동어반복이 시니컬하고 비판적인 내 성향을 깨뜨리지는 못한 이유도 있지만, 책을 열면서 처음 부분인 추천사에 강한 거부감(이 부분은 개인적인 견해이니 자세함은 접겠다.)이 들었던 것이 선입견을 작용한 모양이었다.
그분이 풀어낸 진심 어린 경험담에 대하여 나는 이러쿵저러쿵 평가할 마음은 없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풀어낸 이 책에 대해서도 감히 평할 생각도 없다. 읽기 어려웠다는 고백 속으로 하고 말하고 싶은 날 선 이야기는 뒤로하고 공감하기도 하면서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드는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다. 책 서두에 언급한 '적정기술'과 저자가 주장하는 '적정 심리학'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더 나아가 이해하여 '동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적정기술'이란 흔히 제3세계에서의 기아대책이나 난민 구호를 떠 올리는 오류를 야기한다. '적정기술'은 사회에서 추구한 '기술'이 그저 부가가치적인 '사회공헌'을 넘어 '공유가치 추구'를 위한 개념에서 시작한 움직임이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은 주로 개발도상국 지역의 문화적, 정치적, 환경적 면들을 고려하여, 삶의 질 향상과 빈곤 퇴치 등을 위해 적용되는 기술로 알려져 있다. 원래 첨단기술과 하위 기술의 중간 정도 기술이라 해서 '중간기술'이나, '대안기술'이라 불렸는데 용어의 거부감이나 의미의 확장을 위해 '적정'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보통 떠올리듯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저개발국에 적용된 적정기술은 물 부족, 질병, 빈곤, 문맹 등의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술들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적정기술은 소외 계층이 직면한 사회적 문제 해결에 유용한 기술 개발 방향성을 제시하는 케이스도 많이 있다.
정 박사도 '적정 심리학'이라는 말을 꺼내 들었다. 마음이 최악의 응급상황에 있을 때는 최고의 전문가를 찾아 나서는 것보다 우선, 그 마음에 '공감'하여 최악의 순간을 다스리는 '적정'의 상담과 심리학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해했다. 일견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적정기술'을 이야기할 때, '~짜리'의 기술이라 설명하곤 한다. 장애 어린이 재활병원을 짓기 위한 재단에 있을 때 상임이사와 가장 많이 대립한 부분이 이 '~짜리'에 대한 해석과 대처였다. 모금이나 홍보행사를 하기 위해 많은 손과 자금이 필요하게 된다. 그때마다 상임이사는 '100원으로 1,000원 같은' 서비스를 요구했다. 참 그럴싸한 말이다. 하지만, 100원을 지불하면 받게 되는 서비스나 용역은 100원짜리로 받게 된다.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말이다.
기업에서도 최종 의사결정 시에 가격을 후려치는 협상이 흔하게 일어난다. 10억짜리 컨설팅을 6억에 계약하고서 담당자는 뿌듯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6억짜리' 컨설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가격에 맞추기 위해 투입되는 인력의 레벨을 조정하고 기타 비용을 줄이기 위해 검증과 검토 자료의 풀을 축소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모른 체 하기 일쑤다. 이런 면에서 '적정기술', '중간기술'은 유효하다. 지불 능력이 없다면 지불한 만큼의 기술을 제공받아 compelling needs를 최소한이라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니까. 0과 10 사이의 선택지에서 양자택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적정기술이란?
적정기술 개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환경적 맥락을 잘 고려하여 적절한 비용으로 개발된 솔루션이 니즈를 갖춘 수혜자에게 공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활용되지 않는 솔루션은 사회적 편익과 변화를 창출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 존재 가치를 잃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정혜신 박사의 주장에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급박한 상황에서는 심리적 CPR을 하는 치유자가 될 수 있으며, 그 시작과 중심은 '공감'이라는 이야기에 대해 전반적으로 반대말을 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누구나'가 진짜 적정한가에 대한 의구심은 남아 있다. '적정기술'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환경적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을 적절한 비용으로 솔루셔닝 할 수 있는 '전문적'인 능력이다. 이 부분을 간과한 이야기라면 책에서 말하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적정기술'의 인용은 적절하지 않게 느껴진다. '적정기술' 또한 훈련받고 검증된 '기술자'에 의하여 고안되고 적용되는 것이다.
책에서 말하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자칫 훈련되지 않고 준비되지 않는 사람의 접근이 아픈 마음을 더욱 악화시키지 않을까 걱정되는 대목이기도 싶었다. 아니 그런 '상담사'들을 실제로 많이 보았다. 기승전'예수'로 끝나는 종교 상담사부터, 무조건 '트라우마' 판정하는 분들까지. 이분들이 전문가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전문가의 자격이 없어서 벌어지는 일은 아닌지 의문이 드는 지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서 말하는 '공감'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지 심리학이나 상담에서 뿐만 아니라 '공감'은 실제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 방법이라 생각한다. 20년 가까운 직장생활 중 고맙게도 대중이나 소규모 청중을 향해 발표, 강의, 제안을 하는 기회를 많이 가졌다. 그를 위해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하고 훈련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준비된 세션이 끝나고 하게 되는 Q&A에서의 대응인데, 보통 그 시간에는 늘 '비판적'이고 '날 선' 지적들이 이어지게 된다. 그런 질의를 Objection이라고 하고, 그를 위한 응대를 'objection handling'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가장 중요한 첫 응대의 기술이 '공감하라(empathize, sympathize)'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라 부르기도 어렵지만, 형식은 질의자의 질문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확인'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그리고 공감의 언어나 제스처를 말하게 된다. 그리고서는 그 '공감'이 왜 '동의'로 이어지지 않는지, 나의 생각은 어떻게 다른지 논증하기 편해지게 된다. '공감'은 그런 딱딱한 비즈니스 자리에서도 서로의 이해의 거리를 좁히는 좋은 작용을 한다.
앞으로 책 읽기의 자세에 대해 반성을 해 보았다. 나를 가두면서 방어기제로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읽기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공감'이 감정이 아니라 이해의 부분이라면, '공감'은 곧 '동의'로 이어질 수 있는 여력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정리해 본다. 어찌 되었든 완독 메모를 수년만에 꺼내어 본다. <당신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