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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Dec 16. 2024

[짓기] 정치를 혐오하십니까?

정치혐오의 덫에 걸린 편나누기

정치 혐오, 혐오 정치


'정치를 혐오하다'를 줄여서 '정치 혐오'라 치자. 그렇다면 '혐오 정치'를 풀어내면 '혐오를 조장하거나 이용하는 정치'라고 정의되지 않을까. 뭐 이견이 없다고 하고, 중요한 것은 이 '혐오'의 위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포위되었다는 것이다. 정치는 혐오의 사면'혐'가에 빠져 진퇴양난이 된 것일까? 정치를 이야기하자면 '혐오'가 먼저 떠오르는 것. 어쩌면 '혐오'의 덫에 걸려든 것일지도 모른다. 혐오라는 거대한 공갈의 덫. 이런 말이 들리면 더욱.


"정치는 더러우니 가까이 오지 마세요.
투표도 마시고,
그냥 우리끼리 하게 놔두세요!"


세상은 커다란 시장이다. 무엇이든 파고 사는 것으로 견주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경제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 가치관도 주거니 받거니 거래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의 영역은 고도의 거래인 셈이다. 무엇과 거래가 될까. 보통 자리와 이해관계가 거래되고, 권력의 이임과 행사가 거래된다. 그 거래의 장이 대표적으로 국회다.


여기에서 함정에 빠지거나 덫에 걸리기 십상이다. 바로 '정치'와 '장사'에 대한 모태 본성적 혐오감의 잠재 때문이다. 신언서판의 선비들이 추앙받던 한 반도에서 정치는 모리배들의 수작이고 장사는 아랫것들이 비루한 꼼수라 여기어졌다. 그러니 '장사치', '정치꾼'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것이 예삿일이 되었지. 그들이 하는 행위는 행실과 혼돈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치는 혐오스럽게 느껴진다. 특히 거래와 비교되는 장사의 영역이라니 역겨워진다. 태생부터 그리되었다. 이것이 큰 덫인 줄도 모르고.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28483.html


현존하는 정치'꾼'들은 이것을 아주 잘 안다. 그저 아는 정도가 아니다. 잘 이용한다. 우려먹고도 계속 우려 본다.  대선 이전에 강준만 교수는 언론의 환경이 바뀌었다 이야기했다. '운동장의 기울기'는 정파적 의제 설정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아니, 하더라도 미미한 영향이라고 한다. 오히려 '흥미'와 '호기심'이 의제 설정의 최우선 고려 요소가 되었다고 진단했다. 당시 동의하기 좀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 이해가 제법 되고도 남는다.


언론은 스스로의 헤게모니인 ‘의제 설정 버린  오래다. '정론'이라는 것은 낡은 책의  줄이 되었다. 지금의 언론은 경제적 득실을 위해 대세를 좇아 다닌다. 그래서 더욱 우려먹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정치인들의 의도는 혐오를 증폭해 민중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권력은 소수가 독점해야 되는데, 민중의 정치 참여는 권력 파이의 크기를 손톱만큼 줄이는 일이니까.


언론은 알면서 힘을 잃은  흥미와 자극을 내세워 프레임을 새롭게 만들면 그만이다. 콘텐츠는 다를 것이 없으나, 장르를 바꾸고, 내러티브를 변화하며, 자막도 새롭게 넣지만, 여전히 ‘혐오의 공갈 투성이다. 온통 지저분한 가십만 풀어놓는 이유가 무얼까?  다른 공갈의 프레임을 연쇄 반응하고자 하는 설계가 되기 때문이다. 언론은 돈이 되고 정치꾼들에겐 접근금지의 방어막, 그린벨트가 만들어지니까.



'공갈'의 프레임, 공포심


공갈이란 공포심을 느끼도록 윽박지르거나 을러 대는 행위를 말한다. 때론 ‘거짓말’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공갈의 일성은 대체로 어처구니없게 다가 오지만, 지속되는 압박감에 의해 결핍이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쌓게 된다. 이것이 공갈의 효능이고 이런 공갈의 효능은 생각보다 유효하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세력(정치인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력을 추종하는 세력)은 항상 대중에게 공갈을 하고 협박을 한다. 그들은 고상하게 ‘수사학’이라고 하기도 하고, 약간 솔직하게 감정선을 자극하는 ‘선동’이라고 하기도 하며, 대놓고 “아니면 말지” 식의 전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하게 비약하자면, 정치권이 가진 유일한 병기는 ‘호소를 위장한 공갈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공갈의 효능은 매번 패닉 상태의 외상환자에게 놓아준 모르핀처럼 유효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이와 같은 공갈의 행위는 정치행위 마지막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성행하는 유효한 공갈의 메뉴는 다름 아닌 '혐오'니까.


2016 촛불, 사진=박 스테파노

‘정당정치의 목적 넘버 원’이라고 할 수 있는 정권의 창출에 대한 도전이 다른 정치세력에게서 오는 것뿐만 아니라, 그간 눈 내리 깔고 무시하던 대중과 시민에게서 다가온다면 정치꾼들은 어떨까? 당황스럽고 불편하기까지 할 것이다. 요즘 그 ‘공갈의 행위’는 교묘하고 발전된 형태로 우리에게 결핍과 상실이라는 공포감을 주입시키고 있다. 더러우니 다가오지 말라고. 바로 '혐오감 조장'이 그것이다.


"우리는 진정성으로 무장된 대중이라 소용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 공포감은 실로 무섭게 스며들고 만다. 그리고 그 방법 또한 업그레이드하고 다양한 형태로 이종 변형하여 실체를 느끼기도 이전에 우리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을 조성한다.


미디어는 사실에 대한 중립적 보도라는 자세를 어정쩡하게 취하고 있지만, 사실 이와 같은 충돌과 갈등의 시대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주저하고 있다. 아니 부러 외면하고 회피하고 있다. 그저 외신 처리하듯 하는  건네기만으로 특권층에게 주는 경고는 충분하기 때문.



'혐오'는 공갈세력의 신종 무기


면과 면은 맞대어 선을 만든다. 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균형 있는 대치의 명징이다. 하지만 선이라는 개념은 면을 만들어 낸 자의 의도된 개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치기 어린 초등학교 시절 짝과의 책상 나누기처럼, 줄 그어 놓고 이편저편 갈라놓기가 대세인 세상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그 면에 안주하기보다, 선위에 위태하게 아슬아슬하게 서있다. 그들의 가치관을 두 묶음으로 나누어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는 이들은 중도층이라 부른다. 그리고 대중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들을 향한 공포감의 조성이란 다중적이고 비유적이며 분산적이다.


 천억 개발이익과 수십억의 퇴직금, 부모 찬스와 사찰 이야기, 청와대 공무원의 무시 무시한 이야기와 치기 어린 유튜브 방송, 할아버지적 6.25 이야기 같은 어느 탈북민의 이야기, 그리고 무언가  수는 없지만 국회에서 벌어지는 사실공방 등은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결핍의 공포감을 던져 준다. 그리고, 마침내 개개인의 '의혹' 비추며 동질의 가치관을 추종했던 사람들을 주저하게 만든다. 실체가 없는 언급만으로  상실의 공포감은 충분하다. 더럽고 지저분한 역겨움을 먼저 만드니까.


흐밋한 광장 2016, 사진=박 스테파노

이들에 대한 공갈의 형태는 때로는 흑색선전으로, 때로는 주요 사안이 아닌 가십성 이슈의 창출로, 때로는 의제 설정에 의한 교묘한 편집으로 다양하게 던져진다. 효과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다양한 공갈의 확산으로 인한 관심사의 분산만으로 충분하니까. 지금의 현안의 코어가 무엇인지 잠시라도 잊게 해 주면 되는 것이다. 집요하고 교묘한 전략이고 전술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무리들에게 혼란과 자중지란의 단초를 마련하여 준다. 현장에 있지 않는 한 사실을 해석하기 힘든 떡밥을 던져 프레임에 가두어 두고, 서로를 비판하고 실망하고 분노한다. 전체적이고 거시적 담론을 마치 점 같은 현상이고 사건이고 구체적 제안으로 설명하여 이쪽과 저쪽을 갈라놓으려 한다.


남북 관계에 대한 입장, 최저임금과 52시간 노동제 이슈, 일자리와 산업정책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과 성토 그리고  정권에 대한 공격적인 묻지  폭로는 이들을 분열시키고 위축시킨다. 이것이 공갈의 힘이고, 공갈 미디어의 힘인 것이다.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가 혐오의 대상이 되길 바라는 기득권


"정치는 똥물 속의 진주를 걷어 올리는 일이죠"
- 여느 정치인의 공갈 중 -


공갈이라는 프레임의 덫이 어느 정도 효능을 발휘한다면, 이번 정권뿐 아니라 앞으로도 시민이 중심이 되는 정치활동도 밝은 전망을 하기 어렵다. 이들의 최종 목적은 선거의 승리나 정치 이벤트의 성공이라기보다, 대중들의 철저한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는 것이니까.


일반인이, 서민이, 대중이, 시민이 ‘감히정치행위를 하는 것이 못마땅한 세력들의 추악한 방어이고 공격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미디어의 공갈 형태에 대한 뒷면을 우리가 사실적으로 관찰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 일상은 버겁고 인생은 힘겨운지도 모르겠다.


혐오스런 마츠코, 사진=씨네21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상>이라는 영화가 있다. ‘혐오스런이라는 형용사는 53살의 마츠코에게 붙은 별명이었다. 집을 치우지 않아 사방이 쓰레기 천지이고,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은  고독하게 살아가는 그녀를, 이웃 사람들은 ‘혐오스런 마츠코라고 불렀으니까. 가족마저도 저버리고 그녀를 버렸고, 연인들도 결국 떠나 버렸다. 짐승처럼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던 마츠코는, 누군가에게 살해하고 말았다. 영화는 이처럼 지독하게 불행한 여인의 인생을 추적하는 형식의 이야기다.


영화의 '혐오스런'이란 별명은 마츠코가 스스로 조장한다. 그것은 이웃들에게 조롱과 멸시 이상의 원초적 감정을 준다. 바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은 마츠코 입장에서 엄청난 효과적인 공갈이 된다. 그녀의 진면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관심괴 접근을 차단해 주니까. 관계를 맺지 않으니 더 이상 버림받을 일도 아니니까. 그런 마츠코는 인생을 지켰을까? 아니다. 죽음을 맞이한다. 미스터리로 남고 그녀의 인생은 그저 이야깃거리로 흐르고 만다.


이처럼 '혐오'라는 공갈은 효과이다. 윤석열과  정치 체는 '혐오의 정치' 주도했. 노동 혐오, 여성 혐오, 정치혐오.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는 모르고 랬을? 아니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혐오를 조장해 자신이 쥐고 있는 정치권력을 지키려고 . 누구로부터? 똑똑하고 현명한 어느 누구든지. 그런 경고를 제도권의 정치세력들은 외면했다. 자신들도 마찬가지니까. 그 후과가 오늘날의 계엄과 탄핵정국이다.


무지한 대통령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권의 무지, 무능, 무치는 이미 드러난 현실이다. 보다 ' 잘난'사람들은 세상에 넘쳐난다. 그들이 정치에 개입하겠다고 득달 같이 달려드는 것이 지금 정치 기득권에게는 가장 공포스러울 것이다. 정치권력이라는 진주를 가장 더러운 똥물 속에 가두어 두고 싶은 것이다. '혐오'라는 손가락이 거세어질수록 그들은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상을 보고 진실을 가늠하기란 점점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미디어와 언론에서 쏟아 내는 정보에 대한 판단과 검증에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귀찮음의 결과가 오늘과 같은 내일을 가져다줄 뿐이라면 어떻게  것인가? 그래서 고민과 다짐은 필요하다.


2016 광화문 촛불, 사진=박 스테파노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생활하기 어려웠다면, 지금부터 그렇게 하면 된다. 그것조차 버거운 삶이라면 일상 중 특별한 한때 노력해서 함께 하면 된다. 그 특별한 때가 바로 지금, 그리고 바로 오늘일지도 모른다. 오늘 바로 세우지 못한 나무는 내일 바르게 자라지 못한다. 오늘 고쳐 잡지 못한 물길은 내일 바다로 갈 것이라 장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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