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는 교체되는 것인가? 교대되는 것이다.
한 동안 애써 접어 둔 이름이 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굳이 접어둔 이유는, 그저 단어의 쓰임새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가족 관계로서의 존재, 그리고 갈등과 연민이 교차했던 그 이름이 아직 버겁기만 하다. 아내가 막내 사랑 깊었던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기라도 하면, 애써 대화를 돌려세우거나, 대꾸하지 않고 불쾌하다고 쓰여 있는 것만 같은 미간만 잔뜩 주름잡곤 했다. 소천하신 지 9년이 지났고, 그리움과 애틋함보다는 원망과 한탄 가득한 제자신이 부끄럽지만, 좀처럼 마음 고쳐 먹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우리 세대의 아버지들이 그러하시듯이 부친은 항상 드라마 같은 서사로 자신의 삶을 설명하곤 하셨다. 십 대 소년의 눈물겨운 전쟁 피난 스토리, 월남 파병은 안 갔지만 그 보다 힘겨웠다는 맹호 부대 전방 근무 이야기, 모래 바람 가득한 사막에서 버틴 파견 근로자의 무용담은 외울 정도가 되어 기억 깊숙이 남아 있다. 어릴 적 고개 괴어 기울이다가 사춘기가 되고, 성인이 되면서 방구석 1열의 관객은 점점 등을 돌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런 아들은 어린 시절 롤모델이었던 아버지를 커가는 머리 핑계로 반면교사로 둔갑하여 묘사하곤 했다. 집안에서만 불평 가득한 '안방 순사', 불공정과 부정에 침묵하는 '비겁한 자산가', 그리고 기승전'빨갱이' 탓이라는 경북 출신의 골수 우파 신봉자인 모습이 고와 보이지 않았다. 대학 진학과 더불어 알게 된 세상의 실상과 부침 가득한 살림살이에 모든 것이 '무능하고 둔감한' 부친의 탓이라 자위하며 성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아들들은 열성 진보주의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좌파가 된 것은 아버지 탓이 되어 버렸다.
세상에는 수많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있다. 성경의 비정한 아버지 아브라함과 순종의 아들 이사악의 이야기부터,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와 같은 숱한 부자간의 왕위 쟁탈의 역사까지 부자간의 갈등과 애증의 이야기는 인류의 역사와 같이 하는 듯하다. 하기야, 제우스도 그의 아버지 티탄과 크로노스의 살을 찢고 나왔으니, 인간사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쉽지 않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19세기 러시아 작가인 이반 뚜르게네프(투르게네프)는 그의 대표작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소설에서 그 시대의 부자간의 이야기를 그려 내었다. 세대의 갈등이 곧 시대의 갈등으로 표면화하는 직접적인 주제 의식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의 원제는 <Отцы и дети>로 복수형인 아버지'들'과 아들'들'이 정확한 표현이다. 어느 한 가정의 개별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버지들과 아들들, 즉 세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더 관심이 가는 지점은 그 소설 속의 모습이 두 세기가 지난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뚜르게네프 소설 속의 아버지들은 귀족의 정신과 예술에 대한 낭만에 젖어든 세대다. 그 당시 유럽과 러시아에서 수십 년을 지배한 문화ㆍ철학의 기조가 낭만주의였으니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들들은 낭만만 가득한 아버지들이 마뜩하지 않았다. 예술과 교양을 강조하던 아버지들에 대한 반항으로 아들들은 '니힐리즘'이라는 허무주의에 기초한 유물론자가 되어 갔다. 아들들은 예술 감상과 감성 추구의 활동보다 개구리 해부나 과학적 실험과 증명에 몰두했다. 아들들 가슴에 깊게 자리 잡은 것은 탐미적 미학적 고찰이 아니라 거칠고 직접적인 유물론적인 사고였다.
소위 '허무주의자-니힐리스트'는 활력이 없거나, 삶의 의지를 잃은 염세주의자와는 다르다. 이들은 아버지들의 시대를 지배하던 가치들을 '무'(nihil)로 돌리고자 하는 능동적인 반항과 저항, 그리고 혁신의 주창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아버지들의 눈에는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교양 없는 '반항아'와 '부적응자'로 보였을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적대감이야말로 '아들들'의 최대 원동력이 된다.
러시아 근현대사에서 이 '니힐리스트'의 영향은 양분되어 평가받는다. 혁명과 사회주의 태동의 근간이 된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고, 반대로 보수적인 교종 주의자들은 이들을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존재라고 비판했다. (체르니쉡스끼와 도스또옙스끼의 세계관 비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되었든, 아들들은 사회의 주류가 되고 근간이 되는 세계관과 가치관의 시대를 만든다. 혁명 시대에 낭만과 교양이란 유산계급의 가치 없는 비생산적 행위라 치부되었다. 냉전시대의 굳건한 이념 세대가 나이가 들고 아버지들이 되자, 그 후대는 또다시 자유와 개방을 외치며 빅또르 초이와 뻬레스뜨로이까에 열광하는 아들들이 된다. 돌고 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 순환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듯하다.
소설 속의 지난 시대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세상은 언제나 부모의 세대와 자식 세대 간의 갈등과 대립은 늘 현재 진행형이다. 어느 시대가 되었든 아버지들ㆍ어머니들과 아들들ㆍ딸들은 한 편으로 서로의 관심, 이해,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질책, 원망, 미움을 쏟아 낸다. 이런 양가적 심리와 양상이 역사의 한 축을 이끌어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코로나 시국이라는 난생처음의 전 세계의 위기 속에도 중대 선거는 치러졌다. 절박하고 긴급한 일상은 뒤로 하고 밥그릇 싸움을 하는 정치 무리배들을 뒤로하고서라도, 세상은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언론과 미디어 플랫폼에서는 유독 '청년'이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었다. 청년 세대가 직접 표현하기도 하고 기성세대가 꼰대가 아닌 척, 이해하는 척 말을 거들었다.
그 세대들은 취업은 어렵고, 공부는 더 어렵고, 경쟁은 버겁고, 나만 외롭고, 남들만 행복하고, 이 모든 게 내 탓은 아닌 것 같고, 나의 포기는 끈기의 부족이 아니라 어쩔 도리 없는 현실 탓 이리고 말했다. 꼰대 중의 꼰대의 마음으로 그 '징징거림'이 참 거북했다. 그리고, 정치적 꼼수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연일 정치권의 구애에 마치 중요 존재가 된 것만 같아, 아우성은 드세졌다.
아버지 선배 세대들의 잘 못으로 기인한 잘못이라는 생각에, 철없는 정치인은 그 아버지들을 포위하라고 '세대 결합론'이라는 것을 내어 놓았다. 알맹이 없는 관심 종자들은 미디어와 정치꾼들의 주목에 우쭐해졌다. 된장인지 똥인지 맛도 보기 전에 목에 둘러준 빨간 목도리가 올림픽 금메달 성취 마냥 자랑하고만 싶어 졌을 것이다. 구직과 취학, 그리고 소득의 불평등이 자신의 세대에서 심화되었다며 울부짖었다. 진짜 사실인지 아닌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만, 참 듣기 불편했다. 그렇다. 꼰대 중에 꼰대가 맞았다.
하지만, 그들의 아우성을, 그들의 괴로운 호소를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보기 시작했다. 기시감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익숙하고 귀에 익은 이야기들이었다. 바로 내가 나의 아버지에게, 나의 세대 아들들이 아버지들에게 대들며 반항하던 그 마음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내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저도 어느새 그때 답답하고 융통성 없고 비열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뉴스에 연일 달라진 세대의 '이념' 지형을 이야기한다. 언론은 기득권의 나팔수라는 꼬인 생각으로 보면, '세대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갈라 쳐 놓아야 정치로 밥을 먹는다는 사람들의 공갈 프레임이다. 진영이 견고해 보이는 4050 세대에게 더 이상 '이념의 프레임'은 작동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가진 자와 못 기진 자로 자영업,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라는 계급으로 갈라놓는다.
그것도 부족하니 위, 아래로 잘라 세대 간의 벽을 높이게 만든다. 가뜩이나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애증의 관계를 부추기면서 말이다. 저들이 너희들의 연금을 빼먹는다는 이야기는 정말 최악의 쓰레기 이간질이다. 300회 넘는 국민연금은 내가 납부했지 미래 세대가 납부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세대 간의 애증의 드라마들은 역사의 시계를 가게 하는 시계 밥일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서 그렇게 사랑만으로는, 반대로 증오만으로는, 걸어갈 수 없는 아버지들과 아들들은 단지 세대'차이' 때문에 갈등하는 것은 아니니까. 아버지들과 아들들의 시계는 같이 가는 것 같지만, 사실 다른 시간을 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는 기쁘고, 누군가는 슬프며, 함께 좋다가도 서로 반목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같은 듯 다른 시간을 걸어가면서, 아들들은 어느 사이 아버지들이 된다. 돌아가신 아버지들은 영원히 사라지는 세대가 아닐지도 모른다. 소천하신 아버지가 문뜩 이렇게 기억의 조각을 불러 내듯, 지금의 아버지들은 먼 훗날 후세의 어느 시간에 투영하여 시대의 정신이 부활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미려한 역사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고대 폼페이의 폐허에서도 '요새 젊은것들은'으로 시작하는 글귀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내가 들었던 말을 내가 하는 말이 되었으니, 가만히 곱씹어 본다면 누구 한 세대에게 기분 나쁜 말이 아니고, 오히려 익숙한 정감의 표현처럼 들린다.
최근 엄중한 시국에 광장의 모습이 변모하였다. 불과 8년 전 유사한 상황에서 광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4~50대의 중년들이었다. 매번 무거운 분위기에 분노를 실어 촛불을 밝혔다. 그런데 요즘의 광장은 1~20대의 여성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 손에는 촛불대신 응원봉을 색색이 들고 요즘 유행가에 맞추어 목소리를 높인다. 축제와 같은 광장. 어쩌면 꿈꾸던 광장의 모습이 생각보다 일찍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세대는 서로의 알력으로 밀어내고 밀리는 교체의 대상이 아니라 시간이 주는 기회를 틈타 자연스럽고 무리 없게 교대한다.
십 수년을 사업 실패와 화재 사고의 후유증으로 늘 아픈 사람이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몇 날이 생각난다. 고집 피우며 병원행을 거부하던 단신의 노인을 들쳐 안았던 그날의 무게가 생각난다. 이런저런 사정과 법규로 대학 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끝내 호스피스 요양원으로 옮겨 다닌 아버지는 방문한 가장 아들을 돌려세우기 일쑤였다. 바쁜 사람 오지 말라던 손사래가 기억난다. 모친이 노래처럼 부르던 9남매 맏며느리, 파견 근로자의 남겨진 아내, 부도낸 사업가의 가족으로서의 골 깊은 시댁살이의 푸념은 어느새 머리 깊게 사실로 인지되어 있었다. 그것이 핑곗거리로 삼아 약해지고 노쇠한 아버지를 참으로나 많이 미워했다.
아버지의 무게는 어느새 한숨 쉬는 힘도 안 들게 되었다. 그 가벼운 노인네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을 이리저리 다니던 그 시간이 기억난다. 예의 같은 것 신경 쓸 겨를 없이 철새 둥지 같이 흐트러진 머리의 노인의 뒤통수를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그 어릴 적 없던 시절, 아버지와 단둘이 나들이를 갔던 그 첫 기억의 창경원 벤치를 떠올려 본다. 폼 날 것 없던 통닭 한 마리와 환타 한병, 그리고 아빠하고 나만의 시간의 그 행복한 순간을 떠 올려 본다. 그때도 아버지는 아마도 전쟁 피난 이야기, 사우디 사막 이야기, 고등학교 때 패싸움 이야기를 들려주셨을지도 모른다.
참 그립습니다. 유난히 닮은 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