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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Dec 07. 2024

[짓기] 정치는 ‘나의 것’

가장 정치적인 상황은 일상

잠시 정치라는 것을 지웠다.

뭐 세상은 정치는 정치대로 일상은 일상대로 라는 예전의 생각으로 회귀한 듯했다. 그런데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말도 안 되는 국민 주권의 농단 사건뿐 아니라, '정치'를 자기들만의 점유물로 소유하고자 하는 이들의 프레임으로 주권의 주인인 국민은 소외되어 있었다. 자신만의 일상 정치는 온 데 간데없고 '노빠', '그네 빠', '~빠'라고 하는 정치인을 셀럽화하여 그들의 만들어 낸 거짓 후광에 자신의 일상을 숨기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지식인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더욱 그러했다.


일상을 쌀값과 가난, 그리고 그리움과 사랑 타령하다, 오래간만에 지난 글을 끄집어 읽었다. 무려 12년 전의 이야기.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정치지형과 정치 민도의 수준이고, 변한 것은 내 나이와 세상에 대한 열정의 상실뿐이다. 그때의 글을 읽어 보니 세상은 여전하다. 그래서 좌절감도 있지만 반대로 희망도 보이는 것.


그때 그 글을 다시 나누어 본다.


요즘 세상은 편 가르기가 대세이다.

일단 좌로 우로, 북으로 남으로, 파랗고 빨갛게, 그리고 내편과 네 편으로 나누어 보고 시작한다. 그런 세상에 똥침을 날려 주리라 다짐하는 일상 속에서도, 나도 모르게 선을 그어 놓고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을 가는 눈으로 째리 보고 있다. 그렇나 나도 어쩔 수 없는 요즘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정치는 합의된 힘의 실천행위라고 한다.

다시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풀어낸다면, 정치는 범퍼카처럼 서로 좌충우돌하는 이념과 실리의 계산 속에서 공동의 최대 이익을 창출하는 합의의 행위가 선행되는 것이다. 그것은 갈등의 조정이고 서로의 양보이며, 합의된 힘에 대한 숭고한 약속이다. 그러기에 합의된 숭고한 힘을 이끌어 냄에 있어서 어찌 진통이 없겠는가. 특히 요즘처럼 같은 방향을 쳐다보는  같은 무리끼리도 서로 애써 외면하고, 계산하고 요구하는 세상에서는 더욱 심한 산고의 진통이 뒤따. 어느 누구도 쉽게 해결하지 못할 거라 우려만 하면서 뒷짐지기 십상이다. 하다 못해 초인적인 영웅이나 슈퍼스타의 등장으로 ''하고 해결되기를 바라는 지도 모르겠다.


요즘의 정치환경은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20세기의 정치적 리더십이란 영웅들의 등장으로 그들의 고유한 정치철학과 이념을 실천하는 '그들만의' 숭고한 정치적 행위였다면, 21세기의 리더십은 아마도 그러한 시대적 영웅들을 기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제는 충분히 성숙된 시민들 개인 각자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용이한 정보접근 기술의 도움으로 인해, 각자 그들의 위치에서 사회의 중심축을 각각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대는 총체적 이성으로 시민의식을 결집할  있는 정치문화의 풍토를 조성하고, 그러한 분위기 안에서 모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정치행위에 참여하고 각자의 행위 실천을 요구할 뿐인 상황 환경이다. 그래서  시점에서 우리는 각자의 정치적 실천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2016년 이맘 때


"정당 외 정치 활동"

정당  정치인들은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으로 수렴되어야 정상이라고 말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정당의 정당성이 시민으로부터 오롯이 부여받았을  해당한다. 지난 60 동안의 헤리티지라고 자부하며 으스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리는 마치 정치 귀족계급인 전문'정치인'들의 세계에 범인인 시민들이 기웃거리지 말라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현재의 정당 구성이 합당하게 바람직하지 않다면, 정당 밖에서 시민들의 힘을 모아야 한다.   시민 각자의 의견이 수렴되는 진정한 시민정치세력으로 성장하면 . 그러면 20세기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정당에 수렴하는 정치도 구색을 출 수 밖에 없. 이것이 소위 말하는 오픈 프라이머리의 대의기도 하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썩어 빠진 도덕적 잣대로 보면 보수의 자멸이 더욱 추하게 느껴지지만, 현실적 감각으로 생각한다면 진보의 분열이  뼈저리게 아프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권력과 합의된 힘을 창출하지도 못하고 쓰러지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진보의 어젠다이자 진보의 미덕은 '다양성' 인정과 '공존' 있다. 각자의 계파를 부정하지 말자.  계파의 다양한 주장을 인정하고 서로의 소통을  통해 모두가 이익이 되는 합의를 구하는 것이 정치행위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보진영 안에서 정치적 진보주의 계파와 경제적 진보주의 계파의 양각에 시민세력이 더해졌다고 해서 굳이 섞어찌개처럼 흔들어 뒤섞어 버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정의와 진정성이라는  둘레의 울타리 안에서 서로의 영역을 발전시키고 설득하는 것이 통섭의 기술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것은 이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현안에 대한 가치의 프레임으로 변모하여 자리 잡아야 한다. 그것은 구태에 찌든 선긋기 좋아하는 기존 정치세력에게 기대하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일상의 시민들의 정치참여가 답인가?"

일단 현재 집권당인 보수세력으로부터의 세상 구하기에 대해서는 부연하지 않겠다. 불을 보고 뜨겁다고 하지 차갑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럼 현재 진보적 정치인이라고 하는 기존 정치인들의 면면을 보자. 믿음이 가는가? 그들이 합의된 숭고한 힘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그 기성 정치인들은 어느새 서민정당, 진보정당이라고 스탠스를 하고 있지만,, 얼마 전 선거 때까지만 해도 "중도"를 표방하며 줄타기하던 분들이다. 그분들의 정치적 역사의 유산은 오로지 '정치적 정권의 창탈'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진보 세력은 어찌한가? 요즘 무엇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속상할 뿐이다. 이전 운동권의 유산을 받은 정당 세력들은 그들의 해묵은 정치이념을 두고 합치니 헤어지니 하며 숙려기간 중이시고, 이전 국민의 힘으로 집권하던 세력은 노스탤지어의 노란 손수건만 흔들고 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요동치는 정치환경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민정당'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모아 져야 한다.


바라는 것은 기존의 세력을 물리쳐 달라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힘을 합하여 하나의 목소리로 세상을 바꾸어 달라는 시민 각각의 축에서 던지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같이 해 볼 수는 있다


'둘 다 나빠' 식의 양비론은 '가짜 평형'을 만든다. 그것은 분명 수구의 프레임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흑색선전이나 씹스런 언론들의 기사에 이리로 저리로 흔들리지 마시고, 바라는 바를 소망하는 바를 서로서로에게 전달하면 된다.

지인과 친구에게 정치적 관심의 중요성에 대하여 한마디 정도 대화를 시도해 본다.


귀찮기는 한 일이다.

그런데 중요한 일이다.

"알파벳 V자처럼 생긴 협곡에 두 마리의 토끼가 각각 마주 보는 다른 비탈에 있었다. 그런데 한 곳은 계속 양달로 해가 비치는 곳이고 한쪽은 영원한 음지의 동토였다. 그러다 겨울이 와서 토끼 한 마리가 죽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하나! 어느 비탈길의 토끼가 동사했겠는가???

물론 응달의 토끼이다. 그런데 이유는 조금 다르다. 그 토끼는 반대편의 양지만 바라보다가 자신도 양지에 있는 줄 알고 아무런 대비도 운동도 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은 음침한 응달에 있으면서 말이다."


냉정하게 잘 생각해 보시라, 주변을 보고 내가 중산층의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키고, 제복 같은 슈트에 넥타이 후려 메고 다니며, 실질 경제에 대하여 돈을 쫓아 다닌다고 그대들이 결코 가진 자가 될 수 없다. 그대들의 통장 잔고를 보시고, 지금의 위치까지 걸어온 궤적을 돌이켜 보고, 앞으로의 내 자식들의 걸어갈 길을 생각한다면 그대들이 서 있어야 할 곳은 지금 그대들이 쳐다보는 곳이 아니라 당신 발끝인 것을 명심하자.


8년 전 이맘때의 일이 도돌이표처럼 돌아왔다. 보수정권에 투표한 자들의 책임이자, 진보정권 안에서 여전히 제자리 걸음 하는 정치 관심자들의 안일함 때문이다. 모두의 책임이다. 지난 친위 쿠데타의 밤에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투입작전의 실패에 있다. 현장 요원들이 소극적 대응을 했다는 동화적 망상들도 있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지휘 혼선과 준비 부족의 실패였다. 그들의 선의로 멈추었다는 것은 범인의 변명일 뿐이다. 이미 그들 모두는 '미수'가 아닌 '기수범'들이다. 각 개인의 행동에 딜레마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대로 된 '정치 가치관'을 정립하였다면, 일부 고위층의 일탈에 대해 고민 없이 거부했어야 한다. 이들의 핑계는 "명령이라서 수명 하는 것이 군인, 경찰"이었다. 동정은 나중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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