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언어의 그물로 걷어 올린 과거
만용은 충성심으로 통하고, 신중함은 비겁한 자의 핑계가 되었다. 절제는 남자답지 못함의 다른 표현이고, 문제를 포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 하나 실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충동적인 열의는 남자다움의 징표이고, 배후에서 꾸미는 음모는 정당방위였다. 과격파는 언제나 신뢰받고 그들을 비판하면 더 의심을 받았다. 성공적으로 꾸민 음모는 영리하다는 증거였고, 음모를 미리 적발하는 것은 더 영리하다는 증거였다. 음모에 미리 대비하면 당을 전복하려 하며 반대파를 두려워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 모든 악의 근원은 탐욕과 야심에서 비롯한 권력욕이었고, 일단 투쟁이 시작되면 광신 행위를 부추겼다. 정파 지도자들은 입으로 공공의 이익에 봉사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공공의 이익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반대파를 제압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면서 극단적인 잔혹 행위를 일삼았다. 정의와 국익을 무시하고 반대파보다 더 잔인하게 보복했다. 내란으로 인해 그리스 세계 전체가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고상한 성품을 나타내는 순박함은 조롱거리가 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은 이념적으로 적대하는 두 진영으로 나뉘었고, 상호 불신이 유행했다.” (본문 50p,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3권 82~83장 발췌 중)
BC 5세기에 투키디데스가 써내려 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한 구절이다. 2,500년 전 그리스 내전 후의 공동체의 붕괴를 묘사한 말인데, 마치 현대 정치의 모습이라 해도 어색함이 없다. 그 먼 옛날 그리스 도시국가 사이에서 벌어진 내란을 상세하게 기록하면서, 투키디데스는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의 역사가로서의 꼼꼼하고 성실한 기록의 노력과 함께 발생한 사건과 사안에 대한 끊임없는 분석과 평가는 지금의 이 시대에서도 울림이 있다.
우리는 아직 국가라는 사회의 기틀이 잡히지도 않았던 까마득히 먼 옛날의 누군가가 남긴 이야기에 마음을 주곤 한다. 우리의 마음의 그 옛날이야기에 머물러 생각하게 되는 것은 역사라는(역사란 인간 사회의 변천과 흥망 과정에 대한 주요한 사건과 그 기록이라고 정의한다면) 어마 어마한 사건의 무게 때문일까? 아니면 그 사건을 들려주는 이야기의 힘 때문일까? 이 문답에 관심을 갖는 다면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호기심이 있다는 표증이 된다.
요즘 소위 말하는 '인싸'(Insider)가 되려면, 인문학 좀 안다고 티를 낼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고 싶다면 동서양 고전을 읽으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말은 말뿐이다. 실상 인싸가 되고 싶거나 내적인 수양을 위해 진심 반 관심 반으로 고전을 들추고 펼쳐 봤다가 크게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자신의 독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반성하거나 문장이 엉터리라고 화낼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인문학 교양 고전이라는 것들이 한 세대 이전의 번역이거나 제3의 언어로 불가피하게 중역된 경우도 많고, 많은 고전들이 그 시대상과 지역적 특성, 문화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좀처럼 페이지가 진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교양의 함양이나 외부 활동을 위한 지식의 보충을 위해 고전을 읽겠다고 하면, 개인적으로 '역사서'를 추천하곤 한다. 그 추천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 두려움 때문이다. 인간은 '지금, 여기, 나는'에 대하여 끊임없이 궁금해하며, 탐구하고, 이해하려 한다. 인문학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인싸'가 되겠다는 가벼운 구실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지금, 여기, 나는' 무엇일까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에 대한 대답의 갈급이다. 이를 위해 여러 인문학적 탐구와 독서는 모두 유효하다.
인간의 본성과 의식을 탐구하는 철학과 심리학이 그러하고, 인간 활동의 미적 탐구를 논하는 미학, 무언가 이야기를 창조하고 서사하고 싶어 하는 욕구의 문학, 더 나아가 물질의 근본과 논리의 증명을 위해 과학을 공부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세상에 만들어진 제도와 관습, 규범과 법칙, 문화와 기술은 우리의 입맛대로 골라 규정할 수 없고, 개인이 아무리 애쓴다 해도 크게 개인화하여 바꾸기 힘들다. 가끔은 내게 족쇄가 되고 방해가 되는 훼방꾼이 되었다가 어느 때는 방향이 되고 지침이 되는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왜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그 답을 알기 위해서 역사를 읽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인문학서를 펼쳐 들고 목차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아 책꽂이에 고이 모셔둔 책들은 두 번 다시 들쳐 보기 어렵다. 분명 한글로 써진 말 인대도 계속 같은 줄을 연이어 두서너번 읽고도 금세 멍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역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에 의한 사람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흥망성쇠와 기승전결이 느껴지는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
저 먼 나라 이야기인 듯하면서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인물과 언젠가 짚어 본 것 같은 지역의 이야기가 있고, 늘 동경하던 인간의 의지와 모험이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그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나를 비추어 내일의 우리를 예측해 보기도 한다. 그것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과거의 사건을 통해 오늘의 나를 보고, 내일의 우리를 바라본다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르포는 저널리즘(사실 보도), 역사 서술(과거 사건에 대한 이야기), 문예 창작(예술적 감정표현)을 넘나드는 문학 장르다.'
-<역사의 역사>, 유시민-
<역사의 역사>는 위에서 말한 인문학적 교양을 위해 한 번쯤 들추어 볼만한 '역사서'는 아니다. 작가 유시민도 서문에 자신의 책을 '역사 르포르타주(reportage, 르포)'로 받아들여 주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역사의 역사>는'역사서'를 만나기 위한 잘 간추려진 안내서와 같다.
작가는 역사란 무엇인가? 정의하는 문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역사란 사회가 시간의 흐름 안에서 변화해 온 과정을 서술한 문자 텍스트를 말한다고 하면, 그 텍스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입장에서의 '역사가'와 '역사학자'로 분별하여 정리해 주고 있다. 명확한 구분은 어렵지만 '역사학'은 학문이고, '역사 서술'은 예술로 구분 지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역사의 창시자인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비교와 그 두 갈래의 역사기록이 가지는 역사학적 의미로 시작하는 본문은, 우리가 들어 봄직했을만한 역사가와 역사학자들의 역사철학과 사상 그리고 주요 저서에 대한 소개로 이어진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서구 중심의 인문학 연구에서 인지도 하지 못했던 타고난 역사가 사마천, 우리 세대에 생소했던 이슬람권의 대단한 역사가 이븐 할둔, 전문 역사학자로서 근대 역사학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타고난 역사가 랑케, 시대의 변혁 의지로 역사가보단 이데올로기의 창시자로 알려진 마르크스를 만나 볼 수 있다.
시험을 위해 암기에 치중하였던 박은식,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의 고단한 여정은 물론, 분단으로 인해 접할 수 없었던 조선 최고의 유물 사관론자 백남운의 생각도 엿볼 수 있다. 진심 반 관심 반으로 만나 보았던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만나면서 반가움을 느낄 수도 있고, 문명사의 토대를 지은 슈팽글러, 토인비, 헌팅턴을 만나면서 문명의 탄생과 진화를 통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인간의 궁극적인 탐구의지를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 '잇'아이템으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총, 균, 쇠]의 다이아몬드와 [사피엔스]의 하발리를 통해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왔으며, 누구이고, 어떻게 많은 힘을 가지게 되었고,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문답을 경험할 수 있다.
언어는 말과 텍스트로 이루어진 기록의 수단이다. 그리고 텍스트보다 언어가 먼저 발생하였다. 말에 담은 과거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의 압박에 의해 왜곡되고 누락되고 각색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는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후에 나타났다 하여, 문자 이전의 시대를 선사시대(先史時代, prehistory)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문자라 하더라도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설사 있는 그대로 충실했다 하더라고 전달하는 화자와 필자의 입장에 따라 그 뉘앙스와 표의는 달리 전달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 무용론자'들은 역사를 쾌쾌 묶은 옛날이야기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를 읽는 이유는 어제를 회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을 살기 위해서도 아니다. 내일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고 조언을 얻기 위함이다.
역사에서 벌어진 사건과 현상들을 읽으면서 일종의 법칙과 패턴을 발견하고, 그 법칙과 패턴을 분석하여 예측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 (이것은 요즘 AI시대에 '머신러닝'이라고 일컫는 예측 학습의 기본 알고리즘이 되기도 한다.) 이 것이야 말로 미래에 무엇이 다가올지 살짝 엿볼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 읽기는 그 자체로서 재미있는 지적 활동이자 내일을 예측하는 모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역사 읽기는 유용하다.
<역사의 역사>는 작가의 말대로 본격적인 역사 읽기를 위한 오리엔테이션 같은 책이다. 책을 읽기 좋은 책인가 아닌가의 판단기준은 '읽는 속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볍지 않은 주제와 소재를 다룸에도 제법 잘 읽히는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쓴이는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글을 읽을 때, 그 사람의 말이, 목소리가 연상되는 글이 좋은 글이라 생각하는데, 책을 읽는 동안 유시민 작가가 귓전에서 우렁차게 열변하는 듯한 환청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역사의 역사>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 무덤 관리자들에게 역사가 무엇인지, 역사의 서사가 어떻게 시간을 지나왔는지를 한눈에 참고하기에 좋은 책이다.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를 간단히 간추려 가면 분명 소득 많은 일이 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심도 있는 지적 탐구로 다이빙하고자 한다면, 책에서 열거하는 역사가들과 주요 도서를 하나씩 파보는 것도 훌륭한 장기계획이 된다.
거기에서 조금 더 한 발 나아가, 바람이 있다면, 이 역사가들의 이야기를 현재의 시각에서 다시 써보고 리부팅하는 작업도 누군가의 의지로 진행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우리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당대의 이야기', '당대의 역사'가 과연 쓰여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헤로도토스와 랑케, 사마천, 혹은 토인비가 되어 '우리의 이야기'를 현재 진행형으로 역사 서술하길 바라본다. 그것이 '세대론'이 될지도, 그 서사가가 어쩌면 나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