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톱이 제거된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만지고 있는가

팬덤, 길들여진 사랑의 폭력 -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by 박 스테파노

최근 아티스트와 유명 공인을 둘러싼 팬덤의 행태는 무조건적 지지를 넘어 물의의 경계로 잦아들고 있다. 집단적 실력주의의 강요, 디지털 성범죄, 기업 경영권 분쟁에까지 개입하며 사회적 파장을 키운다. 이 흐름은 팬덤이 더 이상 단순한 ‘정서적 공동체’에 머물지 않고, 공적 영역을 흔드는 강력한 압력 집단으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 이면에 도사린 배타성과 폭력성도 또렷이 드러난다. 최근의 사건들은 팬덤의 영향력이 사적 삶과 공적 판단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면을 반복해 보여준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트럭 시위’와 ‘근조 화환’이라는 과격한 의사표시다. 아이돌 멤버의 복귀를 반대하며 소속사 앞에 근조 화환을 보내거나, 확인되지 않은 열애설에 분노해 트럭 시위로 탈퇴를 요구하는 행위가 이어졌다. 이는 팬덤이 아티스트의 사생활과 활동 방향에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결과는 명확하다. 인권과 정신 건강을 위협한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팬덤 내부의 일부 극단은 디지털 폭력으로까지 나아갔다. 여성 아티스트의 얼굴을 합성한 불법 성적 영상물(딥페이크) 유포, 사생활을 침해하는 스토킹과 영상 확산은 ‘사랑’이 집착과 범죄로 변질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소속사의 강경 대응은 사후 약방문에 가깝다. 경영권 분쟁에 팬덤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례 역시 눈에 띈다. 2024년 시작된 하이브와 어도어 민희진 대표의 갈등에서 뉴진스 팬덤은 성명과 시위를 통해 분쟁의 한 축이 되었다. 문화 향유자가 자본의 의사결정에까지 영향력을 투사하는 새로운 주체로 등장한 순간이다.


팬덤의 문화 현상. AI Sora


“모욕과 혐오가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든든한 바운더리. 그게 길티 클럽의 마력이었다.”

-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중에서


탈진실(Post-truth)의 시대, 감정과 신념이 사실을 앞서는 풍경 속에서 팬덤의 정치세력화는 전형적인 징표처럼 보인다.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에 실린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씨네필과 필리스틴이라는 특수한 팬덤의 형상을 통해 이 시대의 그림자를 예리하게 비춘다. 작품 속 ‘길티 클럽’이 탐닉하는 ‘호랑이’는 이빨과 발톱이 제거된 채 박제된 존재다. 아동학대라는 중범죄를 저지른 영화감독 김곤의 예술을 소비하기 위해, 팬덤은 윤리적 결함을 미학이라는 명분으로 거세한다. 중요한 것은 범죄라는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향유를 통해 획득되는 지적 우월감과 취향의 결속이다. 안전해진 우상 앞에서 불편한 진실은 조용히 밀려난다.


팬덤의 정치화도 닮은 구조를 가진다. 지지는 합리적 검증을 거치기보다 집단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불리한 사실을 삭제하고 유리한 서사만을 채택한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가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진실의 자리를 대신한 미학적·정치적 욕망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치앙마이 타이거 킹덤에서 호랑이의 거죽을 만지며 느끼는 저릿한 감각은, 진실과 마주할 고통을 잠시 유예하는 기만적 위안에 가깝다. 성해나는 이 방공호 같은 안전지대에서 개인의 윤리 감각이 어떻게 마비되는지를 비춘다. 팬덤이라는 이름의 집단적 확증 편향은 끝내 타자의 고통을 지워버리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문학은 묻는다. 우리가 구축한 이 ‘안전한 이상향’은 과연 무엇 위에 서 있는가. 그것이 허약한 자기기만 위에 놓여 있음을, 이 작품은 조용하지만 뼈아프게 환기한다.



안전하게 길들여진 진실의 촉감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에서 ‘호랑이’는 팬덤이 소비하는 대상이자, 동시에 외면하고자 하는 진실의 위험을 함께 품은 상징이다. 작품 속 ‘발톱과 이빨이 제거된 호랑이를 만지는 체험’이 현대 소비 사회의 즉물적인 자기기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호랑이는 아동학대라는 중죄를 저지른 영화감독 ‘김곤’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팬덤은 그의 범죄, 곧 이빨과 발톱을 의도적으로 거세하거나 망각한 채 ‘예술가’라는 거죽만을 만지며 쾌락을 탐닉한다.


이 태도는 탈진실의 시대에 대중이 진실 자체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가공된 진실’을 선택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이는 쾌락과 윤리의 경계가 무너지는 자기기만적 소비 행위다. 호랑이를 만질 때 느끼는 감각, 곧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은 팬덤이 진실과 대면하기보다 허구적 연대 안에 머물고자 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결말부에서 감독의 공개 사과로 팬덤이 구축한 ‘무해한 호랑이’의 환상이 붕괴되는 순간, 작품은 탈진실의 성벽이 무너질 때 개인이 맞닥뜨리는 존재론적 허무를 드러낸다.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내가 사랑하는 대상의 결함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독자로 하여금 팬덤이라는 이름 아래 유예되어 온 도덕과 ‘길티 플레저’의 실체를 직시하게 만든다.


"호랑이가 불편한 듯 근육을 움찔댈 때마다 척추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쩐지 죄를 저지르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흥분되었다. 그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중에서


작품 속 ‘호랑이’를 단순한 범죄자의 은유를 넘어, 팬덤이 자신의 지적 허영을 충족하기 위해 정제하고 박제한 ‘심미적 우상’으로 읽는 점은 탁월하다. 실제로 평론가들은 이 소설이 씨네필로 대변되는 팬덤의 ‘선별적 추구’와 그들이 구축한 ‘안전한 탈진실’의 세계를 집요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지적해 왔다.


호랑이 만지기. AI Sora


이 작품 속 팬덤의 속성을 ‘능동적 공모’의 관점에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길티 클럽의 멤버들이 만지고 싶어 하는 호랑이는 실재하는 맹수가 아니라, 자신들의 씨네필적 정체성을 공고히 해줄 ‘무해하게 길들여진 위험’이다.


이 호랑이는 팬덤이 공유하는 ‘박제된 이미지의 전형’이다. 클럽의 멤버들은 감독 김곤의 예술 세계를 탐구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들이 탐닉하는 것은 김곤이라는 금기를 소비함으로써 얻는 ‘남다른 취향을 가진 나’라는 감각이다.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이 제거되었다는 설정은, 대상의 윤리적 결함과 실제적 위협을 미학의 논리로 거세해버린 상태를 상징한다.


이 맥락에서 김곤은 그 자체로 탈진실의 알레고리가 된다. 그는 실재하는 인간이라기보다 팬덤의 욕망에 의해 재편집된 ‘예술적 기호’에 가깝다. 이는 진실의 자리에 미학적 취향을 대신 채워 넣는 "팬덤의 나르시시즘”이라 명명할 수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김곤의 정신이 아니라 김곤을 향유하는 자신들의 ‘인사이트’다.


결국 ‘호랑이 만지기’는 위험한 진실과 대면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진실을 안전하게 가공해 자신의 지적 자산으로 편입하려는 기만적 제의에 가깝다. 성해나가 그려낸 ‘길티 클럽’은 현대 사회의 탈진실 현상을 응축한 소우주다. 객관적 사실보다 신념과 취향을 앞세우는 팬덤에게 호랑이는 언제든 입맛에 맞게 재구성 가능한 상징물일 뿐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묻는다. 우리가 믿고 기대는 ‘안전한 이상향’은 과연 무엇 위에 서 있는가. 그 토대가 얼마나 위태로운 자기기만인지, 문학은 조용한 음성으로 경고를 건넨다.



탈진실의 방공호, 팬덤이라는 성채


이처럼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에 수록된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팬덤 문화의 이면에 숨은 자기기만과 탈진실의 속성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이다. 팬덤은 더 이상 특정 대상을 좋아하는 개인들의 느슨한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공통의 취향을 중심으로 문화를 생산하고 정체성을 공유하는 ‘정서적 공동체’이자, 배타적으로 관리되는 ‘문화적 영토’에 가깝다. 현대인들이 팬덤에 쉽게 매혹되는 이유는 파편화된 사회 속에서 경험하는 고립과 정체성의 결핍을, 팬덤이라는 ‘안전한 환상’으로 보상받기 때문이다.


팬덤이라는 말의 뿌리는 광신자를 뜻하는 ‘퍼내틱(Fanatic)’과 상태나 영역을 의미하는 접미사 ‘-덤(-dom)’의 결합이다. 과거의 팬덤이 수동적 추종의 집단이었다면, 오늘의 팬덤은 의미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며 대상의 가치를 재편하는 ‘참여적 문화 생산자’로 변모했다. 헨리 젠킨스는 『컨버전스 컬처: 올드 미디어와 뉴 미디어의 충돌』 (2008)에서 팬덤을 “대중문화의 파편들을 이용해 자신들만의 문화를 구축하는 유목민적 약탈자”로 규정한 바 있다. 이는 팬덤이 대상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집단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가치관을 투사해 또 다른 ‘진실’을 만들어내는 주체임을 시사한다.


"그들은 모두 시네필 내지는 평론가 같았다. 「안타고니스트」의 각 장마다 다른 화면비가 사용된 것을 두고 ‘김곤이 말하고자 하는 건 인간의 가변성이다’ ‘아니다, 기성을 향한 반항과 탈주다’ 논쟁하고, 나중엔 프리랜서 둘까지 합세해 ‘가변 화면비를 사용한 데는 다 철학적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럴 리가, 아이맥스 상영을 겨냥한 의도적 편집이다’ 열띤 토론을 벌였다. 시네마스코프니 레터박스니 블랙바니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중에서


현대인이 팬덤에 깊이 몰입하는 핵심 이유는 ‘파편화된 자아의 복구’에 있다. 가족과 지역 공동체가 해체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개인은 지속적인 소외를 경험한다. 팬덤은 동일한 취향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즉각적인 소속감을 제공한다. 특히 소설 속 길티 클럽의 씨네필들처럼, 특정 대상을 향유한다는 사실은 곧 자신의 지적 수준과 안목을 증명하는 ‘문화 자본’이 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가 “내가 누구인가”를 대신 정의하는 시대에, 팬덤은 가장 손쉬운 정체성의 설계도다.


팬덤이라는 배재의 장치. 픽사베이 제공


이러한 팬덤은 탈진실의 논리와 강하게 결합한다. 복잡하고 추악한 현실의 진실을 직면하기보다, 팬덤은 자신들이 설정한 ‘무해한 우상’의 세계 안에 머물기를 택한다. 이는 발톱이 제거된 호랑이를 쓰다듬으며 대리적 안정을 얻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비판적 사고보다 집단적 확증 편향이 주는 정서적 안정이 더 크기 때문이다. 결국 팬덤은 불확실한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구축한 ‘미학적 방공호’다. 그 방공호의 설계 원리는 소설 속 길티 클럽의 여섯 가지 규칙에 집약되어 있다.


"1. 대화 내용 캡처 및 무단 유포 금지
2. 이주 이상 활동 없을 시 총대 권한으로 추방
3.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선생님’으로 통일할 것
4. 친목질 절대 금지
5. 일부 단어(ex. 파주 세트, A군) 절대 사용 금지
6. 김곤 감독님에 대한 비하 발언 및 욕설 일절 금지"

-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중에서


이 규칙들은 단순한 운영 지침을 넘어, 외부의 진실을 차단하기 위해 설계된 ‘탈진실의 방공호 도면’에 가깝다. 특히 규칙 5번과 6번은 핵심적이다. ‘파주 세트’나 ‘A군’처럼 김곤의 아동학대 범죄를 직접 가리키는 언어를 금기어로 설정하는 것은, 언어의 소거를 통해 실재하는 진실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시도다. 이는 진실을 직면하기보다 미학적 환상을 보존하려는 탈진실의 전형적 전략이다. 이 방공호 안에서 호랑이는 발톱 없는 거죽으로만 존재하고, 팬덤은 그것을 만지며 ‘위험한 예술’을 향유하고 있다는 도취에 빠진다.


규칙 1번과 3번은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동시에 철저한 ‘피아 식별’의 경계를 세운다. 서로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사적 친목을 금지하는 규칙은, 개인의 도덕적 갈등이나 고뇌를 차단한 채 김곤이라는 우상을 공유하는 ‘기능적 단위’로만 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성채화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분별할 수 있는 비판적 감각을 동시에 소거한다. 성벽 밖의 객관적 증거는 곧 ‘우리’를 공격하는 가짜 뉴스로 치환된다. 이 규칙들은 진실을 찾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진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세운 검문소다.


결국 길티 클럽의 규칙들이 향하는 종착지는 ‘윤리가 제거된 심미적 나르시시즘’이다. 규칙 2번이 요구하는 지속적 참여는 이 환상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신앙 고백에 가깝다. 그렇게 구축된 씨네필적 정체성은 타자의 고통, 곧 피해 아동의 현실을 지적 유희의 배경으로 전락시킨다. 성해나는 이 촘촘한 규칙의 그물을 통해, 현대 팬덤이 어떻게 스스로를 탈진실의 감옥에 가두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반복되는 ‘호랑이 만지기’라는 제의가 얼마나 공허하고 폭력적인지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고발한다.



건조한 문장, 박제된 열광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는 현대 한국 문학이 오랫동안 지켜온 심미주의와 서정의 문법에 의도적인 균열을 낸 채 등장했다. 비평들은 그의 작품을 말할 때 공통으로 짚는 키워드는 ‘현대적 병리의 집요한 포착’과 ‘디지털 시대의 파편화된 인간상’이다. 유려한 수사나 시적 묘사를 덜어낸 건조하고 기능적인 문체는, 일부 독자에게 미학의 결핍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평가는 이를 결여가 아닌 선택으로 읽는다. 즉물화된 현실과 탈진실의 질서를 재현하기 위한 의도적 ‘소거’이자, 새로운 미학적 실험이라는 판단이다. 평론가들은 성해나의 문장을 ‘비정할 만큼 차가운 관찰자의 시선’이라 부르며, 이 문장이 인물의 내면으로 침잠하기보다 그들이 구축한 가짜 세계의 외벽을 두드리는 도구로 기능한다고 분석했다.


수록작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이러한 성해나식 비미학의 밀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의 문체는 아름다움을 지향하지 않는다. 대신 ‘정확’하고 ‘폐쇄적’이다. 길티 클럽 멤버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씨네필 특유의 현학적 비평 용어와 정보의 나열로 가득하다. 감정적 공명을 중시해온 전통적 소설 문법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


"나는 예술에 도취된 사람들이 불편했다. 자칭 시네필이었던 전 애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중에서


작가는 수식어를 최소화하고 인물의 대화와 행위를 건조하게 배열한다. 그 결과 드러나는 것은, 이들이 꿈꾸는 예술적 이상향의 메마름과 인위성이다. 평론가 한인영이 말했듯, 성해나의 소설은 “서정의 자리에 정보와 매뉴얼을 채워 넣음으로써 현대인이 진실을 소비하는 방식을 풍자한다.” 문장의 심미적 결핍은 윤리가 비어 있는 팬덤의 정서적 공백을 가시화하는 장치가 된다.


구성 역시 전통적 서사적 카타르시스를 거부한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규칙의 나열에서 출발해 호랑이 체험이라는 기괴한 제의로 치닫지만, 그 끝에는 구원도 각성도 없다. 이 파편적이고 평면적인 구성은 팬덤이 세운 ‘탈진실의 성채’가 실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임을 형식으로 증명한다. 작품 속 규칙들이 진짜와 가짜를 가늠할 식별자를 지우듯, 소설의 구조 또한 독자가 인물에게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차단한다. 그래서 성해나의 소설은 흔히 “독자를 불쾌한 골짜기로 밀어 넣는 미학”으로 불린다.


이처럼 문장의 건조함과 구성의 평면성은 ‘성채화된 팬덤’과 ‘정치적 극단성’을 비추는 거울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고뇌를 승화시키기보다, 작가는 박제된 호랑이처럼 박제된 문체로 우리가 외면해온 탈진실의 현장을 기록한다. 이 ‘비미학의 미학’은 문학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박을 넘어, 추악하고 건조한 현실을 어떤 언어로 증언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작품의 미학적 결여는 역설적으로 현대인의 도덕적 빈곤과 정체성의 혼란을 가장 또렷이 말해준다.


혼모노 열풍. 유튜브 책읽는 헬레네 썸네일, 출간 기념회


그럼에도 늙수구레한 문학도의 마음으로 ‘성해나 신드롬’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 『혼모노』의 대중적 붐에는 유명 배우의 역할이 분명히 작용했다. 배우 박정민의 ‘샷아웃(Shout-out)’을 기점으로 소설집이 폭발적인 관심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이 현상은 작품 속 ‘길티 클럽’의 작동 방식과 기묘할 만큼 닮아 있다. 작품이 비판한 메커니즘이 작품의 성공을 견인한, 아이러니한 메타 상호텍스트다.


박정민은 단순한 연예인을 넘어 글을 쓰고 영화를 사유하는 ‘지적 인플루언서’로 인식된다. 그가 “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고 말한 순간, 대중에게 전달된 것은 소설의 문학적 본질이 아니라 ‘박정민이 알아본 재능을 알아보는 나’라는 즉각적인 미학적 우월감이었다. 이는 길티 클럽 멤버들이 김곤 감독의 인간적 실체보다 예술적 권위를 소비하며 자신의 안목을 과시하던 모습과 겹친다. 그의 추천은 독자에게 ‘안전한 가이드라인’이 되어,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 전 이미 ‘천재적 작품’이라는 확증 편향의 방공호를 세우게 한다.


더구나 “넷플릭스 대신”이라는 수사는 소설의 위상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소설이 근원적 질문의 매체가 아니라, 영상 플랫폼을 대체하는 세련된 문화 장식으로 소비될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팬덤은 텍스트를 해체하기보다 박정민의 문장을 공유하며 ‘성해나를 읽는 지적 정서’를 전시한다. 그 과정에서 『혼모노』는 박제된 호랑이처럼 안전하게 거세되어 SNS 피드 위에서 유통된다. ‘진정한 식별자의 소거’가 작품 밖 현실에서도, 박정민이라는 팬덤 권력에 의해 재현되는 장면이다.


어쩌면 성해나의 소설이 박정민의 샷아웃으로 유명해진 이 현상 자체가 『혼모노』의 마지막 페이지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묻는다. “당신들이 추종하는 것은 진실인가, 박제된 이미지인가.” 그리고 대중은 답한다. “박정민이 추천했으니 이 책은 진짜(혼모노)다.” 그렇게 또 한 번 팬덤의 성채 안으로 숨어든다.


이 작품 밖의 상호텍스트는 성해나 소설의 예언성을 오히려 강화한다. 우리가 지금 만지고 있는 것은 그의 날카로운 문장이 아니라, ‘박정민이 보증한 힙한 문학’이라는 무해한 호랑이의 가죽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혼모노』는 탁월하다. 텍스트를 넘어 독자와 뉴스, 트렌드의 반응 전체를 하나의 장으로 확장하며, 그 총체 속에서 진짜(혼모노)를 찾아보라고 요구한다. 그 불편한 요구야말로, 이 소설이 지닌 가장 빛나는 힘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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