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꿈, 바다를 건너서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실패 이후 인간의 존엄에 대하여

by 박 스테파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를 읽을 때마다 생각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지만, 감정의 저변에는 늘 한결같은 처연함이 남는다. 광활한 바다 한가운데서 거대한 청새치와 맞서는 노인 산티아고의 모습을 떠올리면, 구슬프고 쓸쓸한 기운이 자연스레 스며든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접해 온 서사이며,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시각적 레퍼런스 또한 단단히 구축된 텍스트다. 그 덕분에 헤밍웨이 특유의 상세하고 집요한 묘사 속에서도 독서는 비교적 수월했고, 그 세밀한 기술 아래에 잠긴 노인의 외로운 분투를 가슴으로 읽어 낼 수 있었다.


어릴 적 ‘주말의 명화’에서 보았던 1958년 존 스터지스 감독의 <노인과 바다>, 그리고 1990년 안소니 퀸이 연기한 산티아고는 분명 서로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처절하고 슬픈 고난의 서사는 같은 결로 남아 있다. 그 감정을 넘어서는 사유의 방향은 읽고 볼 때마다 달라진다. 아마도 이것이 『노인과 바다』가 헤밍웨이의 실질적인 마지막 작품이자 노벨문학상의 근거로서, 고전의 반열에 오른 또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고전은 삶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이를 읽는 독자들이 저마다 다른 얼굴을 지니듯, 고전이 길어 올리는 모습 또한 각기 다르다. 읽는 이의 나이와 시간의 두께, 시대적 조건에 따라 의미는 달리 다가온다. 여기에 개인의 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맥락까지 더해지면, 텍스트는 저마다 다른 사유의 틈을 내어 준다. 보편적인 주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동시에 특수하고 고유한 사유의 장을 열어 주는 힘. 이 보편과 특이, 일반과 고유를 오가는 역동이야말로 고전의 백미라 할 수 있다면, 『노인과 바다』는 그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다.


젊은 시절의 독서에서 나는 산티아고의 자리에 서 본 적이 없었다. 이 이야기는 신화적 영웅이 불굴의 의지를 증명하는 서사로 읽혔고, 산티아고가 마주하는 일상의 결, 그의 미세한 감정과 육체적 고통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노인’이라는 호명에 아직 뒤돌아보지 않으면서도, 왜 산티아고의 시선으로 이 작품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는지 연말과 연시를 지나며 오래 생각하게 된다.


노인과 괴물 청새치와의 사투. AI Sora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는 ‘노인’이라는 세월의 호명에 저항하는 모습을 예술로 승화한다. 이 작품을 집필하던 그의 나이는 쉰두 살, 지금의 내 나이보다 두 살이나 적다. 오늘의 기준으로는 노인이라 부르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젊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시기다. 당시의 의학적 환경, 전쟁 경험과 타지 생활, 각종 질병을 함께 떠올리다 보니, 세상에 치이고 병에 잠식되어 나이보다 먼저 쇠한 육체와 마음이 ‘노인’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런 의미망 속에서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는 이전과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등장하는 소년 마놀린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한때는 노인과 조각배, 청새치와 상어들, 그 광활한 바다만이 전부였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산티아고가 소년을 그리워하고, 그의 곁에 있음을 확인하며 안도하는 장면들이 선명하게 읽힌다. 저녁마다 들르는 선술집 ‘테라스’, 외상 커피를 깡통에 내어 주는 인심, 안부를 묻는 동네 사람들까지, 이전에는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새삼스럽게 살아난다.


고전의 재독이 주는 소득은 이런 개안에 있을 것이다. 이번 독서에서 특히 깊이 다가온 지점은 산티아고가 잠 속에서 꾸는 꿈, 그중에서도 ‘사자의 꿈’이다. 이 꿈은 소설의 중심 서사에서 살짝 이탈한 결을 지니기에, 그 의미와 기능을 곱씹는 일은 고전을 다시 읽는 독자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서는 통로처럼 느껴진다.



사자가 남은 자리, 청춘의 기억과 불굴의 인간


“길 위쪽의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노인과 바다』중에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사자의 꿈은 흔히 ‘희망’이나 ‘청년기의 회상’으로 간단히 해석된다. 그러나 일부 비평은 이 꿈을 노인의 의식과 무의식이 맞닿는 지점, 종교적 상상력의 잔영, 나아가 “노인의 마지막 은신처”로까지 확장해 읽는다. 다수의 평론은 사자를 의지와 인내, 패배하지 않는 정신의 상징으로 본다. 또 다른 해석에서는 아프리카 해변의 사자들이 젊은 시절의 활력과 모험심을 응축한 이미지로, 노인을 다시 바다로 이끄는 원동력이라 말한다.


소설에서 산티아고가 반복해 꾸는 ‘아프리카 해변의 사자 꿈’은 단순한 회상을 넘어 그의 내면과 작품의 주제 의식을 관통하는 핵심 상징으로 기능한다. 도입부와 결말부에 배치된 이 꿈은, 젊은 시절 범선원으로 아프리카 연안을 항해하며 보았던 장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자는 그에게 가장 순수한 생명력과 평화의 형상으로 남아 있으며, 현실의 고단함과 대조되는 내적 풍경을 이룬다.


첫째, 사자는 산티아고가 잃어버린 청춘과 육체적 활력에 대한 향수를 상징한다. 현재의 그는 ‘살라오(salao)’라 불릴 만큼 불운과 노쇠에 시달리지만, 꿈속의 사자들은 고양이처럼 해변에서 평화롭게 논다. 이 장면은 쇠락한 육체의 한계를 넘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정신적 안식처이자, 그가 끝내 놓지 않은 소년성의 표식처럼 읽힌다.


둘째, 사자는 패배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과 위엄을 드러낸다. 백수의 왕으로 불리는 사자의 이미지는 거대한 청새치와의 사투, 상어 떼의 습격 속에서도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켜 내는 노인의 태도와 겹쳐진다. 꿈에서 사자를 만나는 일은 다시 바다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정신적 재충전의 순간이다.


셋째, 사자의 꿈은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을 암시한다. 산티아고는 바다의 생물들을 ‘형제’라 부르며, 포식과 피식의 관계를 넘어선 유대를 느낀다. 해변에서 평온히 노니는 사자의 모습은 약육강식의 질서를 넘어선 자연의 조화로운 상태를 떠올리게 하며, 이는 삶의 황혼기에 선 노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평화의 형상에 가깝다. 결국 이 꿈은 죽음과 패배의 위협 앞에서도 스스로의 가치를 끝까지 지키려는 인간 정신의 고귀한 승리를 상징한다.


사자의 꿈. AI Sora


일부 비평은 산티아고를 시지프스에 비유하며, 사자 꿈을 “무한히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그를 다시 산으로 끌어올리는 내적 환상”으로 규정한다. 84일의 실패 끝에 거대한 청새치를 얻고도 상어 떼에 빼앗기는 서사는 부조리에 가깝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사자 꿈이 다시 등장함으로써, 그는 또 한 번 바다로 나갈 의지를 회복한다는 해석이다.


한 평론은 “노인의 꿈은 젊어서 꾸는 ‘예언적 꿈’이 아니라, 노년의 회귀적 꿈”이라 말하며, 이를 삶의 종착점에서 ‘기원으로의 회귀’로 읽는다. 소설 속에서 산티아고는 더 이상 폭풍이나 여성, 큰 물고기, 아내의 꿈을 꾸지 않는다. 오직 현재와 해변의 사자만이 남는다. 다른 욕망들이 소거된 자리에 끝내 남은 마지막 이미지가 사자라는 점에서, 이 꿈은 산티아고 존재의 가장 깊은 핵심을 조용히 비춘다.


한편 일부 평론은 사자 꿈을 희망이 아니라 “패배를 인식한 자의 자기 위안”으로 해석한다. 현실에서는 이미 상실이 확정되었기에, 노인은 꿈속에서만 사자와 함께 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읽기에서는 이 꿈을 “노인의 죽음에 임박한 마지막 이미지”로 보고, 아프리카 해변을 사후 세계나 유년기의 천국으로 해석한다. 이 경우 사자 꿈은 죽음의 문턱에서 떠올리는 유일한 낙원이다.



곁에 있다는 희망, 고독의 극복과 환대


“그 애가 지금 내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노인과 바다』중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가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며 되뇌는 이 독백은, 단순한 도움의 요청을 넘어서는 깊은 울림을 지닌다. 이 말은 무엇보다 노인의 실존적 고독과 육체적 한계를 또렷이 드러내는 장치다. 84일간의 불운 끝에 맞닥뜨린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산티아고는 자신의 노쇠함을 인정하게 된다. 그 순간 젊음과 활력을 상징하는 소년 마놀린의 부재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닌 나약함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한다.


그러나 이 독백은 동시에 세대의 연속성과 전수의 의미를 품고 있다. 산티아고에게 마놀린은 단순한 조수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어업 기술과 더불어 ‘패배하지 않는 정신’을 물려줄 유일한 후계자다. 고비마다 소년을 떠올리는 행위는, 자신의 투쟁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무의식적 소망이자,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바다에서의 삶과 그 가치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노년의 염원에 가깝다.


또한 마놀린은 산티아고에게 사랑과 연민의 연결 고리다. “그 애가 있었으면”이라는 간절한 바람은, 바다라는 비정한 생존의 공간 속에서도 인간이 타인과의 유대를 통해 어떻게 정신적으로 버텨내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소년은 곁에 없지만, 그를 생각하는 마음 자체가 노인에게는 청새치와 맞설 수 있는 내면의 힘으로 작용한다. 고독한 투쟁조차 보이지 않는 신뢰와 사랑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이 한 문장은 조용히 말해 준다.


영화 <노인과 바다>(1958)속의 산티아고와 마놀린. 워너브라더스 제공


『노인과 바다』에서 마놀린이 산티아고를 대하는 태도는 사제 관계를 넘어선 숭고한 인류애에 가깝다. 부모의 강요로 ‘운이 좋은’ 다른 배로 옮겨갔음에도, 소년은 매일 저녁 빈손으로 돌아오는 노인을 마중 나가 돛대를 함께 나르고, 먹을 것과 신문을 챙긴다. 이는 결과보다 인간 그 자체의 가치와 과정으로서의 투쟁을 존중하는 태도다.


마놀린은 산티아고를 ‘최고의 어부’라 부르며 그의 자존을 지켜 주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마을 사람들이 노인을 비웃거나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에도, 소년은 그의 기술과 지혜를 믿고 정신적 지주가 되어 준다. 마른 뼈만 남은 마를린을 끌고 돌아온 노인의 상처 입은 손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승패의 논리를 넘어 노인이 겪은 고통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하는 유일한 목격자로서 마놀린의 위치를 드러낸다.


결국 소년은 산티아고에게 바다 너머 ‘사회’가 보내는 최소한의 예우이자 사랑이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노인이 인간의 품격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돌아갔을 때 자신의 투쟁을 증언해 줄 소년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 덕분이었다. 소년은 노인의 쇠락을 지켜보면서도 그의 정신을 이어받을 준비를 하며,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영생에 가까운 위안을 건넨다.


소설의 결말에서 산티아고가 마놀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사자 꿈을 꾸며 잠드는 장면은, 이 작품이 도달한 가장 깊은 평온이자 승리를 상징한다. 마을 사람들이 거대한 물고기의 뼈를 보고 감탄하는 동안, 소년은 노인의 곁을 지키며 그가 다시 깨어나 함께 바다로 나갈 날을 준비한다. 노인의 투쟁이 고독한 소멸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순간이다.


이때 다시 나타나는 아프리카의 사자 꿈은, 노인이 젊은 시절의 순수한 생명력과 마침내 화해했음을 보여준다. 거대 청새치와의 사투, 상어 떼와의 전쟁을 지나, 그의 내면은 격정에서 평온으로 이행한다. 고양이처럼 해변을 거니는 사자들의 모습은 육체의 쇠락조차 꺾지 못한 인간 정신의 품격을 상징한다.


결국 마놀린의 존재는 노인이 꿈꾸는 사자의 현실적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잠든 노인의 곁을 지키는 소년의 모습은 해변의 사자와 겹쳐지며, 인간이 고독한 실존의 바다에서 돌아와 안식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타인과의 깊은 유대임을 조용히 증언한다. 산티아고는 소년이라는 희망을 곁에 둔 채,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꿈을 꾸며 마침내 평화에 닿는다.


영화 <노인과 바다>(1990). NBC제공


상처를 통과한 성스러움, 고독의 수난


『노인과 바다』는 기독교 신학의 시선으로 읽을 때, 인간의 고통을 신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그리스도 수난의 서사로 다가온다. 쇠약해진 산티아고가 거대한 청새치와 맞서는 과정에서 겪는 육체적 고통은,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예수의 수난을 자연스레 환기한다. 낚싯줄에 손바닥이 쓸려 찢어지는 순간 노인이 내지르는 “아(Ay)”라는 외침에 대해,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에 못이 박히는 느낌을 받은 인간이 내뱉을 법한 소리”라 묘사한다. 이 장면은 명백히 성흔(Stigmata)의 이미지를 호출한다. 또한 거대한 물고기의 뼈를 끌고 돌아와 돛대를 어깨에 멘 채 언덕을 오르다 쓰러지는 노인의 모습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의 형상을 거의 직접적으로 겹쳐 놓는다.


이 고난은 고통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부활의 신비’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다. 산티아고가 사흘 동안 바다 위에서 사투를 벌인 뒤—예수의 부활까지의 시간과 겹치는 이 기간 끝에—살점은 모두 잃었으나 뼈라는 증거를 안고 돌아오는 결말은, 육체적 소멸을 넘어선 영적 승리를 암시한다. 세상의 눈으로 그는 패배한 노인에 불과하지만, 신학적 독해 속에서 그는 자기희생과 인내를 통해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되살린 성자적 형상을 획득한다. 집으로 돌아와 팔을 벌리고 얼굴을 바닥에 묻은 채 잠드는 자세 역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며, 고통 이후에 도달하는 평화와 안식을 상징한다.


이 맥락에서 소년 마놀린은 예수의 고난을 증언하고 그 정신을 세상에 전하는 제자, 혹은 사도의 위치에 선다. 마놀린은 노인의 상처 입은 손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수난에 동참하는 자비를 보여준다. 다른 어부들이 뼈의 크기라는 현상에만 주목할 때, 소년만이 노인의 고독한 투쟁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따뜻한 커피를 가져다주고 다시 함께 바다로 나가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제자들을 통해 이어지듯 산티아고의 불굴의 정신 또한 소년을 통해 부활할 것임을 암시하는 신학적 완성에 가깝다.


노인의 이름 ‘산티아고(Santiago)’ 또한 이러한 종교적 층위를 강화한다. 이는 스페인어로 ‘성 야고보(Saint James)’를 뜻하며,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자 어부 출신의 첫 순교자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 이 이름은 구약의 야곱(Jacob)과도 깊은 상호텍스트적 연결을 지닌다. 야뽁강 나루터에서 신의 사자와 밤새 씨름하며 축복을 요구했던 야곱의 모습은, 사흘 밤낮 마를린과 맞서며 “내가 죽을 때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고 다짐하는 산티아고의 태도와 겹쳐진다.


기독교 신앙적 의미도 읽힌다. AI Sora


헤밍웨이가 평범한 쿠바 어부에게 이 이름을 부여한 것은, 그의 고난이 단순한 생계형 투쟁이 아니라 성자의 수난에 닿아 있음을 암시한다. 산티아고라는 이름에는 이미 ‘어부’와 ‘희생’이라는 이중의 숙명이 새겨져 있다. 야곱이 환도뼈를 다치는 고통 끝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듯, 산티아고 역시 상처를 통해 변모한다. 그의 손바닥의 찢어짐과 온몸을 덮친 경련은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세속적 자아를 통과해 불멸의 정신에 이르는 ‘상처 입은 승리자’의 표식이다.


더 나아가 산티아고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의 길을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는 84일의 불운을 뚫고 먼 바다로 나아가는 행위를 단순한 조업이 아닌, 자신의 실존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고독한 순례로 격상시킨다. 순례자가 고행을 통해 정화에 이르듯, 산티아고는 마를린과 상어 떼라는 시련을 통과하며 육체의 소멸을 대가로 정신의 승리와 평화를 얻는다. 항구로 돌아와 돛대를 메고 언덕을 오르는 그의 발걸음은, 하나의 성스러운 제의처럼 읽힌다.


영어권 비평 가운데에는 사자 꿈을 ‘약화된 기독교 상징’으로 읽는 시도도 있다. 산티아고의 고통과 인내를 십자가의 수난에 겹쳐 놓으면서, 사자를 “고통을 견디게 하는 아편 같은 종교적 이미지”로 보는 해석이다. 밤마다 사자를 꿈꾸는 장면은, 상어에게 뼈만 남은 청새치를 마주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하는 몽환적 구원이며,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노인에게 최소한의 내적 균형을 허락하는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독해가 가리키는 지점은 분명하다. 『노인과 바다』에서 고통은 저주가 아니라 통로이며, 상처는 패배가 아니라 변모의 증거다. 산티아고는 상처를 통과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도 숭고한 존엄의 자리에 이른다.



패배를 건너는 존엄, 존재 증명의 무위


산티아고의 수난이 현대인에게 건네는 영적 위로는 ‘실패 속의 성취’라는 역설에 놓여 있다. 결과로 가치를 증명하라고 재촉하는 세계에서, 헤밍웨이는 산티아고의 목소리를 빌려 인간의 존엄이 성과가 아니라 저항의 과정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노인이 빈 배로 돌아왔음에도 성자처럼 기억되는 까닭은, 상어 떼—삶의 허무와 파괴적인 시련—앞에서 끝내 낚싯줄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의미해 보이는 고통 속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려는 실존적 투쟁에 대한 이 긍정은, 고난 그 자체가 구원의 길이 될 수 있다는 신학적 위안을 건넨다.


이 수난과 구원의 궤적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과 깊이 호응한다. 장 발장은 과거라는 십자가를 지고 속죄의 삶을 산다. 산티아고가 돛대를 메고 언덕을 오르듯, 그는 타인의 죄와 고통을 떠안는다. 미리엘 주교에게 받은 은촛대를 평생의 등불로 간직하는 장면은, 산티아고가 사자 꿈으로 내면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태도와 겹쳐진다. 사회적으로는 미천하거나 쫓기는 신세이지만, 두 인물은 고난을 통해 자기 정화를 이루고 그 유산을 다음 세대—마놀린과 코제트—에게 전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적 원형을 공유한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 역시 중요한 상호텍스트다. 정상에 닿을 때마다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의 운명은, 84일과 추가 3일의 불운 끝에 잡은 고기를 상어에게 빼앗기고 빈 배로 돌아오는 산티아고의 처지와 닮아 있다. 그러나 카뮈의 말처럼 “바위로 향하는 그 투쟁 자체”가 마음을 채운다. 산티아고는 패배가 예정된 싸움에 기꺼이 몸을 던짐으로써 부조리를 넘어선다. 기독교적 부활은 사후의 보상이 아니라, 고통을 직시하고 다시 일어서는 ‘반항’의 과정 속에서 이미 실현된다는 것을 이 소설은 문학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하지만 고기를 죽여서 정말 안됐지 뭐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노인과 바다』중에서


겉보기에 ‘패배’와 ‘파멸’은 동어 반복처럼 보인다. 그러나 패배는 승부의 결과에서 지는 일, 감정의 범주다. 파멸은 존재 증명이 실패하여 소멸되는 실제다. 파멸이라는 물리적 결과는 패배라는 정신적 감각에 잠식되기 쉽지만, 반대로 모든 것을 잃고도 가치만을 간직하는 ‘정신의 승리’는 가능하다. 이는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배수의 진이다. 일상이 무너져도 정신의 삶만은 지키겠다는 결의다.


1959년 쿠바의 한 바에서 술을 마시는 헤밍웨이(가운데). /Ernest Hemingway collection


마흔을 넘긴 헤밍웨이는 더 이상 이전의 호평을 이어가지 못했다. 질병과 급격한 노화, 결혼과 출판계에 대한 환멸, 전쟁과 이념의 혼란 속에서 그는 소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자, 비평가들은 그의 작가적 종말을 선언했다. 예술을 종교의 경지로 여겼던 그에게 이는 치명적 고통이었다. 파멸로 규정된 평가를 전복하려면, 패배하지 않는 재기가 필요했다.


넓고 광활한 역사와 예술의 바다에서 그는 최고 가치의 경지—청새치—를 붙잡아야 했다. 필사적인 낚시는 문학적 재기의 상징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노인과 바다』는 거의 시한부 선고에 가까운 상황에서 태어난 작품이었고, 그래서 더욱 각별했다. 그러나 쓰는 과정에서 그는 과시로서의 존재 증명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던 듯하다. 낚싯줄과 미끼, 노와 칼, 키의 자루까지 잃고 남은 것은 커다란 생선의 뼈뿐이었다.


자존은 성취와 과시라는 외부의 기준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곳에서 결정된다. 결국 산티아고가 얻은 것은 다음 세대의 희망인 마놀린, 동네 사람들의 소박한 환대, 그리고 사자의 꿈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바다는 엄청나게 넓고 배는 작으니 찾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을 테지.” 노인이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바다가 아닌, 이렇게 말 상대가 될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새삼 느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노인과 바다』중에서



소멸에 대한 고귀한 응시, 깎여 나가는 시간의 존엄


『노인과 바다』는 노인과 바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노인과 소년,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청년의 꿈을 함께 말하는 서사다. 이 작품은 이미 도래해 버린 고령화의 시간을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고령사회’의 현실을 정면으로 비춘다. 늙은이가 현명한지 어리석은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계속 살아간다면 누구나 늙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치매와 같은 인지 저하의 가능성 또한 예외 없이 우리 모두의 몫이다. MZ와 라떼의 구분은 이 앞에서 무력하다. 노년의 문제는 특정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미래에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아픔 가운데 하나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는 소인국과 대인국, 라퓨타를 거쳐 ‘스트러드브럭’이라는 기묘한 나라에 이른다. 이곳의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다만 여든이 넘으면 국가에 의해 ‘없는 존재’가 된다. 젊은 시절의 기억만을 희미하게 붙든 채, 이후의 삶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시간으로 연장된다. 재산은 국법에 따라 상속되고, 국가는 최소한의 연명만을 허락한다. 한때는 기괴한 상상처럼 보였던 이 장면이, 이제는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살림이 팍팍해지자 65세 이상 지하철 무임승차를 둘러싼 ‘노인 연령’ 논쟁이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문제 제기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노인에 대한 폄훼와 차별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어느새 노령 세대는 다른 세대에게 귀찮고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민연금 역시 젊은 세대의 부담이라는 이유로 수령 연령을 늦추고 지급을 줄이자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개인의 계산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회 전체의 시간 속에서는 셈이 완전히 틀린 말이다.


오늘의 사회적 자산과 인프라는 노년 세대의 희생과 헌신 위에 놓여 있다. 복지와 후생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하던 시절, 그들은 후대를 위해 노동하고 저축했으며 성실하게 세금을 내고 사회보험을 지탱했다. 젊은 세대가 노인을 ‘공짜로’ 부양한다는 생각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우리는 저절로 자라난 존재가 아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허허로움만으로도 벅찬데, 애써 길러낸 다음 세대에게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일이 과연 무엇을 남길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


노인은 꿈을 꾼다. AI Sora


장년의 암환자에게 『노인과 바다』가 건네는 미학적 영성은 거창한 승리나 기적이 아니라, ‘깎여 나가는 과정의 아름다움’에 있다. 암이라는 질병은 육체의 살점을 하나씩 뜯어내는 상어 떼와 닮아 있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그 상어들을 저주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붙잡았던 청새치의 ‘완벽한 뼈’를 바라본다. 항구로 끌고 들어온 그 거대한 뼈는, 불필요한 것이 모두 제거된 뒤에 남는 삶의 정수를 상징한다. 육신의 쇠락은 추한 몰락이 아니라,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인간 정신의 골격만 남기는 미니멀리즘적 완성으로 전환된다.


이 작품은 또한 ‘패배의 미학’을 통해 깊은 위로를 건넨다.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지켜내지 못했지만, 바다 위에서 보여준 그의 품위 있는 저항은 결과와 무관하게 하나의 완결된 예술이 된다. 장년의 환자에게 투병은 질병을 정복하는 전쟁이 아니라, 매 순간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고독한 항해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상어들에게 끝까지 몽둥이를 휘두르는 행위는 결말을 바꾸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태도다. 이는 병든 육체를 비참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넘어, 끝까지 자신의 삶을 응시하는 인간의 위엄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노인이 사자 꿈을 꾸며 평온하게 잠드는 결말은 고통의 서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종지부다. 육체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전리품은 사라졌지만, 그의 내면은 젊은 시절의 가장 찬란한 풍경으로 채워져 있다. 영성이란 초월적 구원이 아니라,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만의 ‘사자 꿈’, 곧 아름다운 기억과 내면의 평화를 지켜내는 능력임을 이 장면은 말해 준다.


소년 마놀린이 노인의 상처 입은 손을 닦아주며 곁을 지키는 정경은, 고통받는 단독자에게 필요한 것이 화려한 치유가 아니라 그 투쟁을 묵묵히 지켜봐 주는 시선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운다. 그 시선과 커피 한 잔의 응원으로 오늘도 살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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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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