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투」가 예언한 AI 시대의 기계적 고독
외투라는 이름의 존재 증명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는 흔히 현대 러시아 소설의 출발점으로 호명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고백했다는 일화는 이 작품이 지닌 문학사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페테르부르크의 하급 관리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은, 가난한 관리의 비극을 나열하는 사회 고발의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고골은 극도로 사실적인 묘사로 서사를 열고, 기괴한 유령이 출몰하는 환상적 결말로 이야기를 닫는다. 이 급격한 이행 속에서 현실의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이 동시에 조명된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작품을 통해 러시아 문학의 주요 전형인 ‘작은 인간’이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전형은 이후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로 이어지는 러시아 휴머니즘의 깊은 토양이 된다.
작품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고위 인사’는 제정 러시아 관료 사회의 응축된 형상이다. 그는 아카키의 절박한 호소를 권위적인 호통으로 짓밟으며,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기 위해 약자를 희생시킨다. 이는 고골이 「코」에서 선보였던 계급 사회 풍자의 연장선에 놓인다. 그러나 주목할 지점은, 고골이 이 고위 인사 또한 관료 체제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묘사한다는 사실이다.
기대 이상의 효과에 만족한 고위층 인사는 자신의 말 한마디로 사람의 정신까지 빼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 완전히 도취되어 곁눈질로 친구의 반응을 살폈다. 자신의 친구조차 어쩔 줄 모르고 공포감마저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그는 또 한 번 만족했다.
– 「외투」, 고골 중에서
그는 사적으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위’라는 가면을 쓰는 순간, 그는 인간성을 상실한 폭력으로 변모한다. 이 묘사는 개인의 인격보다 시스템의 위계가 우선되는 관료주의의 구조적 악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비사리온 벨린스키가 고골을 두고 “러시아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거울”이라 평한 이유도 이 지점에 닿아 있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외투」는 인간의 정체성이 사물에 의해 규정되는, 일종의 물신주의적 비극을 보여준다. 아카키에게 새 외투는 단순한 방한용 의복이 아니다. 그것은 그를 비로소 인간으로 승인해 주는 ‘사회적 피부’이며, 나아가 삶을 견디게 하는 ‘영적 반려자’에 가깝다. 외투를 마련하기 위해 차를 끊고 밤마다 촛불을 아끼는 그의 금욕은, 일상의 차원을 넘어 거의 종교적 수행처럼 보인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아카키가 외투를 입는 순간을 두고 “그의 실존적 정점에 도달한 순간”이라 평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강탈 이후의 몰락은 냉혹하다. 외투를 잃은 그는 단순히 재산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던 마지막 표식을 상실한다. 아카키의 죽음은 신체적 쇠약의 결과라기보다, 관등과 제복이라는 외부의 물질에 의탁해 있던 자아가 무너진 실존적 파멸에 가깝다.
이처럼 「외투」를 사회적 약자의 수난기로만 읽지 않고, 사물과 언어가 벌이는 실존적 투쟁의 이야기로 읽을 때 고골 문학 특유의 기괴함이 또렷해진다. 사물에 의해 규정되는 인간, 인간을 대신해 말을 거는 제도와 물질. 그 오래된 질문은, 오늘날 AI와 알고리즘의 시대에 다시금 낯설고도 익숙한 울림으로 되돌아온다.
표면의 확실성, 외투의 환상
장석주 시인의 『철학자의 사물들』 서문에 제시된 사물에 대한 정의는 명징하다. 사물은 인간 존재의 바깥에 놓인 타자이면서도, 동시에 그 존재를 완성하도록 돕는 실존의 보조 기구라는 통찰이다. 이 시선을 고골의 「외투」에 포개면, 페테르부르크의 하급 관리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걸친 외투는 단순한 의복을 넘어 ‘물질화된 영혼의 확장’으로 재독해된다. 장석주의 철학적 사유와 고골의 부조리 미학을 겹쳐 읽는 일은, 물신(物神)의 매혹과 실존의 위기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사유하게 한다.
장석주는 서문에서 “사물은 보이지 않는 깊이가 아니라 그 표면으로 말한다”고 단언하며, 깊이를 숭배해 온 형이상학 대신 ‘표면의 확실성’을 옹호한다. 「외투」의 아카키는 이 표면의 철학이 가장 비극적으로 투사된 인물이다. 페테르부르크 관료 사회에서 아카키라는 인간의 ‘깊이’는 무의미하거나 아예 부재한다. 그를 사회적으로 성립시키는 것은 오직 그가 걸친 ‘표면’, 곧 외투다.
동료들이 비웃으며 ‘카포트’라 부르던 낡은 외투는 그의 초라한 실존을 그대로 노출하는 지질한 표면이었다. 그러나 새로 장만한 외투는, 장석주의 표현을 빌리면 “제 안의 모호성을 무찌르고 확실성에 가닿는” 표면으로 변모한다. 아카키가 새 외투를 입고 거리로 나섰을 때 감각되는 생생함은, 사물의 물성이 주체의 존엄을 잠시나마 들어 올리는 ‘표면의 승리’를 증언한다.
사물들은 항상 사물들로써 자명하다. 그것은 이미지의 환영이 아니라 물성으로 구현된 그 확실성 속에서 저를 드러낸다. “모든 사물에서 모호성이 확실성을 대체한다.”(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사물은 자명한 표면으로 제 안의 모호성을 무찌르고 확실성에 가닿는다.
– 『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중에서
장석주는 또한 “사물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매개물”이며, “소유하는 순간 욕망에서 멀어진다”고 말한다. 외투를 마련하기 전 아카키의 고행은 욕망 그 자체가 만들어 낸 환상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그는 외투라는 사물에 자신의 모든 희망을 흡착시키고, 그 위에 ‘덧없음’이라는 아우라를 덧씌웠다. 그러나 외투를 손에 쥐고 파티에 참석한 그 짧은 밤은, 장석주가 말한 “욕망의 불꽃 위에서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찰나에 불과했다.
강탈 이후 아카키가 마주한 것은 더 이상 불꽃이 아니라 “차갑게 식은 재”다. 그는 사물을 통해 영원히 획득할 수 없는 사회적 승인이라는 환상을 소유하려 했고, 사물이 사라지자 그 즉시 남은 것은 사물의 물성이 잠시 비추었던 내면의 공(空)뿐이었다.
장석주에 따르면 사물은 “신체의 여러 기능들을 확장하는 도구”이며, 인간은 이 사물들을 타고 “자기 진화의 길을 헤쳐 왔다.” 「외투」에서 외투는 혹독한 추위로부터 아카키의 빈약한 신체를 보호하고, 그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도록 돕는 생존의 최적화 도구다. 그러나 고골은 이 도구가 주체와 분리되는 순간 드러나는 진화의 역설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아카키는 외투를 통해 자신의 기능을 확장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사물 없이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존재로 퇴행한다. 장석주가 말했듯 “사물은 우리 내면의 본성을 비추는 거울”이다. 외투를 잃은 아카키의 초라한 말로는, 사물이라는 보조 기구 없이는 자립하지 못하는 근대인의 파편화된 실존을 그대로 반사한다.
장석주는 사물에 대한 매혹을 두고, 그것이 실은 “언젠가는 사라질 덧없음에 홀린 우리 마음의 매혹”이라고 짚는다. 죽은 뒤 유령이 되어 타인의 외투를 벗기고 다니는 아카키의 모습은, 그 덧없는 아우라를 영원히 붙잡아 두려 했던 한 인간의 절망적 몸짓이다. 고골은 「외투」를 통해 사물의 표면이 제공하는 확실성에 도취된 인간이, 그 사물의 분실과 파괴를 마주할 때 어떤 존재론적 추락을 겪는지를 그렸다. 결국 아카키의 비극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투사된 인간의 환상과 덧없음을 끝내 감당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외투라는 증언, 사물의 그늘
사물은 인간의 내면이 바깥으로 투사된 흔적이며, 우리가 사물을 소유한다기보다 사물이 우리의 삶을 증언한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이 관점에서 고골의 「외투」 속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사물에 의해 자신의 존재론적 여백을 메워 가는 인물로 읽힌다. 그에게 낡은 외투가 조롱의 대상이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이 그의 빈곤과 남루함, 곧 내면의 결핍을 과장 없이 증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외투를 마련하기 위해 감행한 극단적인 절제는, 사물에게 자신의 생명력을 이양하는 일종의 제의에 가깝다.
사물이 한 인간의 시간과 노동이 응축된 결정체라면, 아카키의 외투는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굶주림과 어둠, 그리고 인내라는 시간이 겹겹이 굳어 형성된 하나의 ‘결정’이다. 아카키는 외투를 입음으로써 비로소 타인의 시선 속에 포착되는 ‘존재’가 된다. 이는 사물이 주체의 실존을 감각 가능한 형태로 드러낸다는 장석주의 통찰과 맞닿아 있다. 이렇게 사물은 인간의 일상 속에 공존하며, 말없이 존재의 공백을 채운다.
그러나 사물은 인간을 보호하는 동시에, 주체를 압도하고 예속시키는 양가성을 품는다. 아카키에게 외투는 ‘영혼의 거처’인 동시에, 그를 파멸로 이끄는 ‘가혹한 주인’이다. 외투가 완성되기 전까지 아카키는 미미하나마 자기만의 내적 평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벽한 사물을 꿈꾸는 순간, 그 평형은 무너진다. 사물이 그의 내면으로 스며들어 삶의 중심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 자신의 존재는 보다 완전해진 것 같았고, 마치 결혼한 것 같기도 하였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았으며, 혼자가 아니라 일생을 함께하기로 한 마음에 맞는 유쾌한 삶의 동반자를 만난 것 같았다. 그 동반자란 다름이 아니라 두꺼운 솜과 해지지 않는 튼튼한 안감을 댄 외투였던 것이다.
– 「외투」, 고골 중에서
고골이 묘사한 아카키의 행복은 사물에 기대 선 위태로운 자아의 전형을 보여준다. 외투를 입고 파티에 참석하며 고조되는 그의 감정은 자아의 성숙이라기보다, 사물이 발산하는 아우라에 잠시 감염된 상태에 가깝다. 사물이 주체의 실존적 무게를 초과하는 순간, 인간은 사물의 주인이 아니라 부속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고골은 아카키의 몰락을 통해 예언적으로 드러낸다.
사물의 존재감은 흔히 소멸의 순간에 비로소 드러난다. 사라질 때에야 그 사물이 차지하고 있던 존재의 부피가 감각된다. 아카키가 외투를 강탈당한 뒤 겪는 치명적인 상실은 재산의 손실을 넘어선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적 피부가 벗겨져 나간 듯한 고통이다. 외투는 그에게 세계와 나 사이의 완충지대였다. 그 지대가 무너지자 페테르부르크의 혹독한 추위, 곧 현실의 비정함이 그의 빈약한 알몸을 직접 강타한다.
사실 새 외투가 좋은 이유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따뜻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 「외투」, 고골 중에서
외투가 증언하던 아카키의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삶의 활력은 한순간에 증발하고, 그는 급격히 죽음으로 기운다. 이는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사물의 총합보다 위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골이 “물질에 잠식된 인간은 사물과 함께 소멸할 뿐”이라는 냉혹한 답을 내놓는 장면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유령이 된 아카키가 타인의 외투를 빼앗는 행위는 사물에 대한 집착이 응결된 원한의 형상이다. 죽어서도 사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외투’라는 기표를 좇는 그의 모습은 사물 철학의 어두운 종착역을 보여준다. 인간은 사물을 통해 삶의 무늬를 읽으려 했지만, 아카키에게서 그 무늬는 오히려 사물에 의해 지워졌다.
유령이 되어 고위 인사의 외투를 강탈하는 행위는, 사물에 의해 소외되었던 주체가 사물을 점유함으로써 수행하는 기괴한 복수다. 그러나 이 복수마저 또 다른 외투를 소유하려는 반복에 그친다는 점에서, 인간 실존이 사물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결국 「외투」는 사물의 품격이 사라진 자리에서 드러난 사물의 폭력에 대한 보고서처럼 읽힌다. 그 폭력의 희생자이자 무력한 수용자인 아카키를, 우리는 어떤 거리에서 다시 읽어야 할지 묻게 된다.
음성의 그늘, 외투의 문법
이 작품의 본질을 줄거리보다 서술의 기교에서 찾으려는 비평은 적지 않다. 고골이 구어체적 서술 방식인 ‘스카즈’를 적극 활용해 텍스트에 독특한 음성 효과와 제스처를 부여했다는 분석도 그중 하나다. 화자는 종종 이야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말을 더듬고, 과장하며, 사소한 일화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이러한 음성적 흔들림은 텍스트를 평면적인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목소리의 장으로 만든다.
주인공의 이름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그 자체로 음성적 유희를 품는다. 반복되는 발음은 배설물이나 무력한 신체 반응을 연상시키며, 이름만으로도 인물의 사회적 위치와 조롱의 방향을 암시한다. 그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하고 전치사나 부사만을 늘어놓는 모습 역시 우연이 아니다. 언어적 결핍은 곧 사회적 무능의 은유이며, 고골은 이를 서술 차원에서 치밀하게 형상화한다.
고골은 진지한 연민과 우스꽝스러운 일화적 서술을 교차시키며 독자에게 기묘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독자는 아카키에게 쉽게 감정 이입하려다 이내 웃음의 방향으로 밀려나고, 그 사이에서 비극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이러한 기법은 독자의 연민을 의도적으로 방해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비루함을 더욱 서늘하게 부각한다. 이는 일전에 언급한 케릭토님의 대표적 사례로 남는다. 이름만으로도 인물의 위치와 서사의 궤적을 가늠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일반적인 비평이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사회적 약자로 규정해 왔다면, 보다 전위적인 독해는 그와 외투의 관계에서 에로틱한 집착을 포착한다. 고골은 아카키가 외투를 맞추기 위해 절약하는 시간을 “장래의 배우자와 함께 걷는 것과 같은” 상태로 묘사한다. 여기서 외투는 단순한 방한 도구가 아니라, 결여된 자아를 보완하는 ‘물질적 신부’로 격상된다.
비평가 보리스 에이헨바움은 고골 문체의 음성적 유희가 사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과정을 추적하며, 아카키의 외투 착용을 단순한 행위가 아닌 성스러운 합일, 혹은 도착적 탐닉의 한 형태로 읽었다. 아카키는 종이 위에 글자를 베껴 쓰는 행위 자체에서 쾌락을 느끼던 기계적 존재였으나, 외투라는 구체적 물신(Fetish)을 맞이함으로써 비로소 욕망하는 주체로 변모한다. 다만 그 욕망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닌, 사물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비인간적인 ‘사물 에로티시즘’의 극점을 이룬다.
그는 어깨 위에 외투가 있다는 것을 매순간 느꼈고, 몇 번씩 혼자 좋아서 싱긋 웃기도 했다.
– 「외투」, 고골 중에서
아카키는 언어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존재다. 그는 말을 시작할 때마다 “실은, 저, 그러니까”와 같은 전치사와 부사에 머물며 의미의 핵심에 이르지 못한다. 현대 기호학의 시선으로 보면, 그는 내용 없는 텅 빈 기표에 가깝다. 관청에서 수행하는 일 또한 서류를 복사하는 데 국한되는데, 이는 그가 독자적인 사유와 목소리를 지닌 주체가 아니라 타인의 언어를 중계하는 ‘인간 복사기’임을 상징한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아카키의 존재 방식을 “심연 위의 위태로운 줄타기”로 묘사했다. 외투를 잃는 순간은 곧 그를 지탱하던 유일한 기호를 상실하는 사건이다. 외투는 그의 빈약한 실존을 간신히 감싸 주던 문법이었고, 그것이 사라지자 아카키는 언어적 불능을 넘어 물리적 소멸, 곧 죽음에 이른다. 그의 비극은 빈곤이라는 사회적 조건보다, 자아를 증명할 언어적 수단이 전무하다는 존재론적 공백에서 비롯된다.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고골은 「외투」에서 신성을 기괴하게 전도한 ‘물질 신학’을 펼친다. 아카키의 금식과 밤샘은 성자의 수행을 닮았지만, 그 종착지는 하느님이 아니라 ‘고양이 털을 덧댄 옷칼라’다. 이는 영적 구원을 물질적 소유로 대체한 근대적 우상숭배에 대한 냉소적 통찰로 읽힌다.
조주관 교수는 아카키가 외투라는 ‘가짜 피부’를 얻기 위해 내면을 비워 가는 과정이 악마적 계약과 유사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외투를 손에 넣는 순간 그는 잠시 빛의 세계에 편입된 듯 보이지만, 그 빛은 페테르부르크의 인공 가로등이 뿜어내는 차가운 조명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그의 죽음은 신성이 거세된 세계에서 물질을 신으로 섬긴 ‘작은 인간’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파국이다.
소설 후반부의 유령 소동은 단순한 권선징악 장치가 아니라, 서사 자체를 전복하려는 고골의 메타적 반란에 가깝다. 사실주의적 전개를 따르던 이야기가 돌연 환상 문학으로 급회전하는 것은, 독자가 아카키에게 품었던 값싼 동정심을 비웃기 위함이다. 나보코프는 이 유령을 아카키의 영혼이라기보다, 소설이라는 허구 공간에 생긴 그로테스크한 틈새로 해석했다.
페테르부르크 전역에 갑자기 퍼진 소문에 의하면, 칼린킨 다리에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밤마다 관리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타나 도둑맞은 외투를 찾아다니다가 외투를 입고 있는 사람만 보면 관등이고 계급이고 가리지 않고 자신이 잃어버린 그 외투라고 우겨 죄다 빼앗아 간다는 것이었다.
– 「외투」, 고골 중에서
유령은 고위 인사의 외투를 빼앗아 관료 체제의 위계를 무너뜨리기보다, 현실 세계의 논리와 인과율 자체를 조롱한다. 아카키는 죽어서야 비로소 타인의 말을 복사하던 존재에서, 타인의 외투를 강탈하는 존재로 변모한다. 이는 고골이 창조한 가장 파괴적이고 비논리적인 자유의 형상이다. 결말에서 유령의 정체가 아카키인지 강도인지 모호하게 처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존의 본질이 끝내 명료함이 아니라, 해소되지 않는 모호함에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알고리즘의 외투, 실존의 체온
고골이 그려낸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비극은 19세기 페테르부르크의 습한 공기를 넘어, 21세기 초연결 사회의 정교한 알고리즘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한 형상으로 되살아난다. 아카키의 외투가 단순한 방한복이 아니라 사회적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인터페이스’였듯, 오늘날의 인간에게 수많은 디지털 기호와 플랫폼의 평판 지수는 생존을 위한 새로운 외투로 작동한다. 사물은 본래 주체의 실존을 보조하는 기구이지만,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체제 속에서 이 관계는 조용히, 그러나 결정적으로 전도된다.
현대의 주체는 내면의 가치를 증명하기보다 타인의 시선에 노출될 ‘표면의 확실성’을 구축하는 데 삶의 에너지를 소진한다. 인스타그램의 피드, 링크드인의 경력 서사, 플랫폼 노동의 별점이라는 외투를 걸치지 못한 개인은 아카키가 관청에서 겪었던 무시와 소외를 넘어, 시스템 내부에서 ‘존재하지 않는 자’로 처리되는 잔혹한 증발을 경험한다.
이 실존의 파편화는 기술 권력과 자본이 결합한 AI 시대에 이르러 정점에 달한다. 아카키가 서류를 복사하며 느꼈던 기계적 쾌락은, 데이터 라벨링과 알고리즘 최적화에 동원되는 현대의 ‘디지털 프롤레타리아트’ 노동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그는 스스로를 ‘인간 복사기’로 환원함으로써 시스템의 부품이 되기를 택했지만, 그 시스템은 외투라는 최소한의 방어막을 잃는 순간 단 한 뼘의 온기도 내어주지 않았다. 이는 효율과 최적화를 최고 가치로 삼는 AI 플랫폼 사회의 냉혹한 초상이다.
알고리즘은 인간의 고통을 데이터로 환산할 뿐, 그 고독의 깊이를 측정하지 않는다. 플랫폼 권력은 아카키와 같은 ‘작은 인간’들을 끊임없이 대체 가능한 변수로 취급한다. 극단적 이기주의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고위 인사의 호통은 이제 보이지 않는 코드와 약관으로 변주되어, 약자의 호소를 ‘오류’ 혹은 ‘부적합’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삭제한다.
이 지점에서 고골이 제시한 유령이라는 초현실적 결말은, 사물화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후의 미학적 저항으로 읽힌다. 시스템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유령의 출몰은, 모든 것을 데이터화하고 통제하려는 기술 권력의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실존의 비명이다. 아카키가 죽어서야 타인의 외투를 빼앗으며 관료 사회의 위계에 흠집을 냈듯, 오늘의 소외된 주체들 역시 자본과 기술이 규정한 ‘외투’의 규격을 거부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자명한 표면’의 공포를 넘어서는 길은, 역설적으로 그 표면 아래 숨겨진 인간의 모호함과 불완전함을 회복하는 데 있다. 「외투」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사물이 주인을 삼키고 기술이 인간의 자리를 대체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실존의 온도’가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묻는 텍스트다.
우리는 과연 외투 없이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가. 아니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또 다른 외투를 강탈해야 하는, 새로운 아카키들에 불과한가. 이 질문은 기술적 특이점을 향해 질주하는 인류 앞에 놓인 가장 불편한 거울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 니콜라이 고골, 조주관 역, 「외투」, 민음사, 2002.
• 장석주, 『철학자의 사물들』, 동녘, 2013.
• 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을유문화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