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 소설집 『혼모노』가 말하는 진심의 물성, 탈진실이라는 신기루
※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지면지 2월호에 기고한 문화평론 칼럼으로 게재되었습니다. 원문은 지면지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주간을 보내고 주말에 브런치에 담습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882
* 유튜브 요약본도 아래 ↓
https://youtu.be/SIVy1S0EWgk?si=SE4eRPU-preEct6i
가짜의 얼굴, 진짜의 감각
대상의 진위를 가려내는 감각은 인류가 오래도록 길러 온 가장 원초적인 생존 본능 가운데 하나다. 이 감각은 개인의 생존을 넘어 공동체의 윤리를 떠받친다. 가짜를 진짜로 받아들이는 순간, 공존의 질서는 흔들리고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은 서서히 붕괴한다. 인위가 닿지 않은 뿌리의 속성만이 진짜라는 고전적 정의는, 그러나 오늘의 세계에서 미묘한 균열을 드러낸다. 진짜는 더 이상 진짜처럼 보이지 않고, 가짜는 진짜 못지않은 진정성을 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거나 혼동하는 이야기는 인류의 문화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핵심적인 테마다. 이는 단순한 진위 판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과 윤리적 선택, 타자에 대한 인식까지 포괄한다. 이러한 서사들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혼란 속에서 본질을 가려내는 지혜와 증명의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위장과 기만을 통해 진짜를 흉내 내는 공포의 이야기다.
지혜와 판별의 서사는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진짜’를 알아보는 눈에 초점을 둔다. 구약성경의 ‘솔로몬의 재판’에서 솔로몬 왕은 한 아이를 두고 다투는 두 여인 사이에서 진실을 가려야 했다. 아이를 반으로 나누라는 극단적 판결은 잔혹한 명령이 아니라, 아이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진짜 어머니’의 마음을 드러내는 시험이었다.
동화 「신데렐라」에서 ‘유리 구두’는 진위를 판별하는 물리적 증거로 작동한다. 수많은 가짜가 주인공의 자리를 넘보지만, 오직 신데렐라의 발만이 그 구두에 맞음으로써 신분과 실체의 일치가 증명된다. 한국 전래동화 「금도끼 은도끼」 또한 마찬가지다. 산신령은 금도끼와 은도끼라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내밀며 인간의 본성을 시험하고, 자신의 실체를 정직하게 고백한 자에게 보상을 내린다. 이러한 서사들은 정의의 회복과 질서의 재건을 목표로 삼는다.
반면, 가짜가 진짜의 외양을 빌려 침입하는 이야기는 공포와 혼돈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림형제의 「빨간 모자」에서 늑대는 할머니의 옷과 모자를 쓰고 침대에 누워 ‘가짜 할머니’가 된다. 아이는 외양의 유사성에 기대 의심을 미루다 “할머니, 귀가 왜 그렇게 커요?”라고 묻는 순간에도 파국을 피하지 못한다.
한국의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속 호랑이 역시 어머니의 옷을 입고 목소리를 흉내 내며 아이들을 속인다. 이 서사에서 가짜는 진짜의 자리를 차지해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가 언제든 위장될 수 있다는 근원적 불안을 환기시키며, 겉모습에 속해 본질을 보지 못했을 때 맞닥뜨릴 치명적 결과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경고한다.
진짜를 연기하는 시대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는 진짜와 가짜 사이에 벌어진 균열의 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탈진실의 기록이다. 이 소설들이 다루는 것은 진실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무관심과 사실이 조각난 채 유통되는 풍경이다. 작품은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허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무엇이 진짜이기를 바라는가라는 대중의 욕망이 어떻게 실체를 압도하는지를 냉정하게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진위의 문제는 이야기 안에 머물지 않고, 책장을 덮은 뒤 독자의 현실로 번져 나온다.
탈진실(Post-truth)이라는 조어는 그 자체로 한계를 품는다. 접두사 ‘탈(脫)’은 마치 과거에 순수한 진실의 시대가 존재했던 듯한 환상을 남긴다. 만약 탈진실을 단순히 ‘진실 이후’라는 시간적 상태로만 이해한다면, 이를 보완하는 개념으로 제니퍼 카바나와 마이클 리치가 제시한 ‘진실 쇠퇴(Truth Decay)’를 떠올릴 수 있다. 이 개념은 진실이 사라졌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대신 객관적 사실과 분석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약화되고, 사실과 의견의 경계가 흐려지는 과정을 현상적으로 포착한다.
이 관점은 가짜가 진짜를 대체했다는 단순한 도식 대신, 진짜를 가려내던 사회적 여과 장치가 고장 났음을 드러낸다. 이는 수록작 「스무드」에서 다뤄지는 ‘한국계’라는 정체성 역시 탈진실의 메커니즘 속에서 분해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듀이는 한국계 미국인 3세로 유명 작가의 매니저로 한국을 난생 처음 방문한다. 관계자들은 ‘한국계’와 ‘K’라는 수식어로 자신들과의 교집합을 억지 찾기 바쁘다. 정작 한국 음식 한번 먹지 않은 듀이는 한번도 미국인이 아닌 적 없지만 말이다.
“리와 코너는 나와의 접점을 찾으려 이런저런 화두를 던졌다. 내가 위스콘신에서 나고 자랐다고 하자 리는 자신도 중서부에 살았다며, 달마다 H마트에 들러 ‘김치’와 ‘라면’을 잡히는 대로 구입했던 유학 시절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 성해나, 「스무드」중에서 -
이 장면에서 소설은 K-열풍이라는 실체 없는 기표가 어떻게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왜곡하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얕은 경험이 과잉 일반화로 비약되는 순간, 정체성은 이해의 언어가 아니라 소비 가능한 이미지로 환원된다. 이는 태극기 집회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맹목적 추종과도 닮아 있다. 객관적 지표보다 ‘내 편의 사실’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곧 인식적 부족주의(Epistemic Tribalism)의 징후다. 혼모노가 물성의 진위에 머무는 말이라면, 성해나가 그려내는 탈진실의 풍경은 인간의 욕망과 관계가 뒤틀린 일상의 영역까지 확장된다.
인식적 부족주의는 탈진실을 사실의 부재가 아니라 소속의 문제로 설명한다.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은 누구의 편인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되고, 진실은 객관적 기준이 아니라 집단의 결속을 확인하는 토템이 된다.
“모욕과 혐오가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든든한 바운더리. 그게 길티 클럽의 마력이었다.”
-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중에서 -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에 등장하는 김곤의 팬덤은 이러한 맹목적 편들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팬들이 탐닉하는 ‘호랑이’는 이빨과 발톱이 제거된 채 박제된 존재다. 이는 아동학대라는 범죄를 저지른 영화감독의 윤리적 결함을,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거세해버린 ‘안전한 우상’의 알레고리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범죄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를 향유함으로써 획득되는 취향 공동체의 우월감이다.
이 구조는 팬덤의 정치세력화와도 겹친다. 불리한 진실은 삭제되고,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서사만이 채택된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가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진실의 자리를 대체한 미학적·정치적 욕망은 어디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가. 이 현상은 장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개념을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 그는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모사물(Simulacra)이 현실을 대체하는 단계를 분석했다. 이때 ‘진짜(혼모노)’와 ‘가짜(니세모노)’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원본 없는 이미지가 인식을 지배할 때, 탈진실은 거짓의 범람이 아니라 실재의 실종이라는 존재론적 위기로 드러난다.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습을 한다. 과장되게 눈을 뒤집고 몸을 부르르 떨다 자괴감을 느끼고 그만두길 몇차례. 도대체 그동안은 어떻게 했던 걸까. 신의 출입이 어찌 그리 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걸까. 모형 작두와 칼은 주문해 놓은 지 오래다. 이제 연습만이 살길이다.”
- 성해나, 「혼모노」중에서 -
「혼모노」의 주인공 문수는 무속의 세계에서 ‘진짜’로 남기 위해 분투한다. 여기서 ‘혼모노’라는 말은 사물의 진위를 넘어, 타인의 인정이라는 기호적 위계를 향한 강박을 드러낸다. 영험하던 몸주가 떠난 뒤 신기가 약해진 문수는, 신과의 실재적 접신보다 ‘신통한 무당’이라는 기호를 유지하는 데 매달린다. 이는 신성(Sacred)이 더 이상 실재에 기대지 않고, 연출된 기호에 기반한다는 보드리야르의 통찰과 맞닿아 있다.
문수가 몸주의 신기를 가득 받았을 때, 굿판에서 재현하는 몸짓과 발화는 신의 대리물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모사물이 만들어내는 하이퍼리얼리티에 열광한다. 그렇게 실재하는 신은 사라지고, 무당이라는 기호를 완벽히 연기하는 신의 대리만이 남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혼모노’라 칭한다. 혼모노라는 진위의 가름은 실체가 아닌 기표로 기능한다. 진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진짜처럼 보이는 것만이 살아남는 시대의 초상처럼.
글자가 된 진짜, ‘-짜’의 기호학
소설집의 표제이자 대표작인 「혼모노」는 일본어를 전면에 내세운다. 젊은 세대에게는 인터넷 유행어로 익숙할지 모르지만, 이전 세대에게는 여전히 낯선 풍경이다. 그래서 일본어 ‘혼모노(本物)’와 그 반대말 ‘니세모노(偽物)’의 어원을 짚는 일은 의미심장하다. 혼모노의 ‘본(本)’은 나무의 뿌리, 곧 사물의 근원과 바탕을 가리킨다. 반면 니세모노의 ‘위(偽)’는 사람(人)이 인위적으로 행하는 것(爲)이 곧 거짓이라는 통찰을 품는다. 작품 속에서 신기가 충만한 영험한 무당은 혼모노로, 신빨이 빠진 쉰무당이나 서툰 점사를 늘어놓는 선무당은 니세모노로 불린다. 접신한 몸주인 장수할멈이 일본식 문화와 일본어에 익숙하다는 설정 또한 이 명명에 설득력을 더한다.
한국어의 ‘진짜(眞-)’와 ‘가짜(假-)’는 단순한 진위 판단을 넘어 화자의 신념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강력한 기표로 기능한다. 어원적으로 접미사 ‘-짜’는 ‘사람’이나 ‘물건’을 뜻하는 의존 명사 ‘자(者)’에서 나왔다는 설명이 일반적이지만, 이를 ‘글자 자(字)’의 변용으로 이해할 때 언어의 철학적 전환이 드러난다. 존재의 ‘있음’을 증명하던 단계에서, 그 존재를 설명하는 기호의 진실성을 묻는 단계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한자 ‘진(眞)’은 본래 도교에서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자연의 도를 뜻했고, ‘가(假)’는 빌려온 것, 일시적인 상태를 의미했다. 『장자』 「제물론」에서 말하는 ‘진재(眞宰)’ 역시 인간 인식을 넘어선 근원적 실체를 가리킨다. 반대로 불교 철학의 ‘가유(假有)’는 인연에 의해 잠시 드러난 현상일 뿐, 고유한 실성이 없음을 뜻한다.
여기에 붙은 한국어 접미사 ‘-짜’는 흥미로운 변이를 일으킨다. 만약 이것이 ‘자(者)’에 머물렀다면 진짜와 가짜는 여전히 물질의 범주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字)’의 층위로 옮겨오면서, 우리는 사물 자체의 참됨을 넘어 그것을 설명하는 문장과 의미의 진실성을 따지게 된다.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하태환 옮김, 2001)에서 원본 없는 복제물,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하는 세계를 분석했다. 한국어의 ‘진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원본의 물질성보다 기호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말로 작동한다. 눈앞의 대상이 금(Gold)이라는 사실(者)보다, 그것을 ‘금’이라 부르는 명명(字)이 진실한가를 묻는 것이다.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거죠?”
- 성해나, 「구의 집」중에서 -
진짜와 가짜의 감별은 사물이나 능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랑과 희망, 정의와 평등 같은 가치들마저 가짜의 얼굴로 진짜를 대체한다. 「구의 집」에서 스승 여재화가 구보승에게 넘긴 3층 취조실의 설계에 담긴 ‘희망’은 우리에게 익숙한 희망이 아니다. 세로로 길고 좁은 창으로 스며드는 빛은 희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은 공포가 쓴 양의 탈이다. 빛은 공간을 드러내고 시간의 경과를 각인시키며, 끝내 포기를 강요한다.
이 작품에서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갈월동 98번지가 독재 정보기관의 고문시설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머물지 않는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실제 지번을 가져오면서도, 인물들의 이름과 호명은 허구로 채워진다. 진짜 설계자 김수근의 이름조차 한국 건축사의 맥락을 설명하는 장치로 흘려보내는 일종의 거짓이 된다. 이렇게 진실과 허구는 겹겹이 쌓여, 무엇이 진짜인지 끝내 혼동하게 만든다.
일본어 ‘혼모노(本物)’와 ‘니세모노(偽物)’는 철저히 ‘물(物)’에 뿌리를 둔다. 이는 장인정신과 대상의 완성도를 중시하는 일본 문화의 성향을 반영한다. 반면 한국어의 ‘진짜’는 ‘-짜’라는 된소리를 통해 훨씬 강한 주관적 확신과 추상적 가치를 품는다. 유형의 존재(者)를 넘어, 논리와 감정, 보이지 않는 의도의 진실성(字)까지 포괄하는 언어다.
움베르토 에코는 『가짜 전쟁』(이윤희 옮김, 2016)에서 현대 사회가 가짜를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만들려는 ‘과잉 현실’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어의 진짜와 가짜가 ‘글자 자(字)’의 속성을 지니게 된 것은, 우리가 물리적 검증보다 맥락과 텍스트의 진실을 중시해 왔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가짜’라는 말은 이제 모조품의 이름을 넘어, 메시지의 허위성을 겨누는 철학적 도구가 된다. 그렇게 진짜와 가짜는 사물의 감별사를 넘어, 언어의 세계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 담론인가를 가려내는 문화적 잣대로 자리 잡는다.
진심의 균열, 믿음의 오독
“기억이라는 건 쉽게 미화되고 변질되며 사람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려 여지를 만든다는 것을, 그 가능성을 믿고 다가갔다간 금세 후회한다는 것을 일전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 성해나, 「잉태기」중에서 -
「잉태기」의 화자는 출산을 앞둔 딸을 둔 여성이다. 결핍 없는 결혼 생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작고 날 선 균열들이 숨어 있다. 그는 자신의 딸과 곧 태어날 손주에게 더 나은 환경을 주고 싶다는 명분 아래 시부와 충돌한다. 딸 서진이 할아버지를 “지지”라 부르고, 시부가 서진을 “복”이라 부르는 일은 사소해 보이지만 좀처럼 견디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닮은 존재를 통해 감지되는 동일성의 불안 때문이다. 같은 극끼리 서로를 밀어내듯, 화자는 그 닮음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는다.
이 단편은 진정성과 진심이 과연 진실을 담보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시부와 며느리의 말다툼 같은 대립 속에서 소설은 언어적 유희를 정교하게 겹친다. ‘지지’라는 말은 일본어로 할아버지를 뜻하는 동시에, 지씨 성을 가진 시댁의 상징이 된다. 동시에 아이들이 만져서는 안 되는 ‘더러운 것’, ‘위험한 것’이라는 의미까지 중첩된다. 화자의 마음을 더욱 거슬리게 하는 것은, 그 지지가 응원과 버팀의 의미로 쓰인다는 점이다. 그 말은 결국 자신의 자리를 영구히 잠식하는 시부에 대한 오래된 앙금을 건드린다. 이렇게 진심과 진정성은 언제나 모두에게 ‘진짜’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의 틈에서 왜곡되고, 상처의 기억을 호출하며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혼모노’와 ‘탈진실’은 분명히 다른 층위에 놓인다. ‘혼모노’가 구체적인 사물이나 주체의 진정성(Authenticity)을 다룬다면, ‘탈진실’은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신념이 공론을 좌우하는 현상적 진실성(Truthfulness)을 문제 삼는다. ‘혼모노’의 ‘물(物)’은 눈에 보이는 실체를 전제하지만, 탈진실의 맥락에서 말하는 진실은 해석과 관계의 영역에 더 가깝다. 해석이 과잉될 때, 진실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가 되며 탈진실의 기운을 띤다.
일본어 문법에서도 이 차이는 분명하다. 추상적인 진리나 사실 관계를 말할 때 일본어는 ‘혼모노’ 대신 ‘신지츠(真実)’나 ‘지츠(事実)’를 사용한다. 혼모노가 ‘가품이 아닌 정품’, 혹은 ‘가짜 실력자가 아닌 진짜 고수’라는 정체성의 확립에 초점을 둔다면, 탈진실은 ‘무엇이 진짜인가’보다 ‘무엇을 진짜라고 믿고 싶은가’라는 대중적 심리에 천착한다. 그렇기에 혼모노라는 개념을 탈진실의 영역까지 무리하게 확장할 경우, 오히려 실체 중심적 사고에 갇히는 역설에 빠질 위험이 있다.
‘탈진실’이라는 말은 영문 ‘Post-truth’를 옮기는 과정에서 관습적으로 굳어졌지만, 몇 가지 본질적 한계를 안고 있다. 접두사 ‘탈(脫)’은 ‘Post’가 지닌 시간적 의미와 가치적 초월의 의미 중 전자에 치우쳐 있다. 이는 마치 과거에 ‘순수한 진실의 시대’가 존재했던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며, 진실이 온전히 존중받던 황금시대를 전제하는 오류를 낳는다. 또한, 이 용어는 진실의 소멸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무관심, 사실의 파편화, 신뢰의 붕괴라는 복합적 사회 현상을 단순히 ‘진실에서 벗어남’으로 축소한다. 한자어 ‘진실(眞實)’이 불러오는 ‘변하지 않는 근본’의 뉘앙스는, 현대 정치가 직면한 데이터와 통계의 왜곡이라는 기술적 현실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결국 탈진실이라는 말은 원인을 분석하기보다, 결과로서의 상태를 가리키는 데 머무르는 한계를 드러낸다. 「잉태기」는 이 모든 논의를 한 가정의 언어와 감정, 그리고 기억의 균열 속에 밀어 넣는다. 진심은 언제나 선하지 않고, 기억은 쉽게 변질되며, 믿음은 관계의 힘 앞에서 흔들린다. 그 흔들림의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묻게 된다. 진짜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진짜라고 믿고 싶어 하는가.
소설이란, 박제된 진짜의 유통
‘혼모노’는 ‘근본 본(本)’과 ‘물건 물(物)’이 결합된 말이다. ‘本’은 나무의 뿌리를 본뜬 글자로, 사물의 근원과 중심을 뜻한다. 따라서 혼모노는 꾸며내지 않은 원래의 것, 즉 ‘진짜’이자 ‘실물’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사물에만 머물지 않고, 특정 영역에서 확고한 실력을 지닌 전문가나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도 확장되어 왔다.
현대에 들어 혼모노/니세모노는 서브컬처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거치며 또 다른 의미망을 얻었다. 애니메이션 <가짜 이야기>(신보 아키유키, 2012)는 ‘가짜가 진짜가 되려는 의지를 가질 때, 그 가짜는 진짜보다 더 가치로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 개념을 철학적으로 변주한다. 한국에서는 ‘혼모노’가 특정 분야에 과도하게 몰입해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로 변질되기도 했지만, 그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사물의 진실성을 엄격히 가르는 기준이었다.
“아르헨티나 소설가 리카르도 피글리아의 표현을 빌려 “‘보이는 이야기’와 그 속에 숨겨진 ‘비밀 이야기’의 다양한 방식의 조합”을 ‘단편소설’이라고 할 때, 성해나의 소설은 자신에게 부여된 현실의 세부를 힘껏 매만져가는 과정에서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 보이는 인물들로부터 이야기를 채워나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양경언,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중에서 -
진짜와 가짜를 둘러싼 성해나의 이야기는 단층적이지 않다. 특히 단편이라는 형식이 지닌 축약과 응축의 미학 속에서, 그녀의 소설은 늘 ‘진실’이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밀어붙인다. 소설집 『혼모노』는 한국 문학이 오랫동안 고수해 온 심미주의와 서정적 문장에 의도적인 균열을 내며 등장했다. 비평가들이 성해나의 세계를 설명할 때 ‘현대적 병리 현상의 집요한 포착’과 ‘디지털 시대의 파편화된 인간상’을 핵심 키워드로 꼽는 이유다.
유려한 수사나 시적 묘사를 덜어낸 건조하고 기능적인 문체는 일부 독자에게 미학적 결핍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비미학적 미학’은 문학이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는 오래된 강박에 대한 도전이다. 추악하고 건조한 현실을 어떤 언어로 기록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성해나는 의도적으로 장식을 거둔다. 그 결과 나타나는 미학적 결여는 오히려 현대 사회의 도덕적 빈곤과 정체성의 혼란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기준이 된다.
이 소설집이 대중적 주목을 받은 데에는 배우 박정민의 역할이 컸다. 그의 ‘샷아웃(Shout-out)’ 이후 『혼모노』가 붐을 일으킨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현상은 작품 속 ‘길티 클럽’의 작동 방식과 소름 끼칠 만큼 닮아 있다. 작품이 비판하는 메커니즘이 작품의 성공을 떠받치는 동력이 된 이 아이러니는, 탈진실의 구조를 작품 밖에서 완성하는 메타적 장면처럼 보인다.
박정민은 단순한 배우를 넘어, 글을 쓰고 영화를 깊이 향유하는 ‘지적인 인플루언서’로 인식된다. 그가 “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고 말한 순간, 대중은 소설의 문학적 본질보다 ‘박정민이 질투할 만한 재능을 알아보는 나’라는 우월감을 먼저 획득한다. 이는 「길티 클럽」의 멤버들이 김곤 감독의 인간적 실체보다 그의 예술적 권위를 소비하며 자기 안목을 과시하던 태도와 닮아 있다. 그의 추천은 독자들에게 ‘안전한 가이드라인’이 되어, 작품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전에 이미 ‘천재적 작품’이라는 확증 편향의 방공호를 세운다.
더구나 “넷플릭스 대신”이라는 수사는 소설이 놓인 오늘의 위치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소설이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매체가 아니라, 넷플릭스의 자극을 대체하는 세련된 문화 장식으로 소비될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팬덤은 텍스트를 해체하기보다 박정민의 문장을 공유하며 ‘성해나를 읽는 지적 정서’를 전시한다. 그 과정에서 『혼모노』는 박제된 호랑이처럼 거세되어, SNS 피드 위에서 안전하게 소비된다.
"호랑이가 불편한 듯 근육을 움찔댈 때마다 척추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쩐지 죄를 저지르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흥분되었다. 그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중에서
성해나의 소설이 박정민의 샷아웃을 통해 유명해진 현상 자체가, 어쩌면 『혼모노』의 마지막 페이지에 덧붙여진 실시간 부록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작품 안에서 “당신들이 추종하는 것은 진실인가, 박제된 이미지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대중은 “박정민이 추천했으니 이 책은 진짜(혼모노)다”라고 응답하며 다시 팬덤의 성채로 들어간다.
이 작품 밖의 상호텍스트적 풍경은 성해나 소설의 예언적 성격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우리가 만지고 있는 것이 과연 성해나의 날 선 문장인가, 아니면 ‘박정민이 보증한 힙한 문학’이라는 무해한 호랑이의 가죽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그런 점에서 『혼모노』는 텍스트를 넘어 작동한다. 독자와 뉴스, 트렌드와 반응의 총체 속에서 다시 한 번 진짜를 묻게 만든다.
성해나는 ‘추천하는 자’와 ‘추종하는 자’ 사이의 은밀한 공모를 드러낸다. 진심 어린 찬사는 팬덤의 손을 거치며 또 하나의 호랑이 가죽이 된다. 결국 작가가 겨누는 것은 문학 자체가 아니라, 세련된 취향을 인증해 주는 그림자들이다.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식별자를 넘어, 식별자 자체를 우상으로 박제해 진실을 격리하는 탈진실의 완성형. 그 위험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지점에서, 이 소설은 조용히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