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 그 후, 삐걱거리는 질문 - 성해나, 「스무드」
아테네의 푸른 바다 위로, 한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로 들어온다. 황금빛 태양이 찢긴 돛 위에 쏟아지고, 선체 곳곳에는 미노타우로스의 뿔이 남긴 깊은 상처가 남아 있다. 미궁에서 탈출한 테세우스(Theseus)와 아이들을 태웠던 바로 그 전설의 배다. 아테네 시민들은 열광했다. 이 배를 승리의 표징으로, 도시의 보물로 남기기로 뜻을 모았다.
“이 배를 영원히 보존하라. 후손들이 테세우스의 용기를 잊지 않도록.”
배는 항구에 정박되었고, 매년 축제가 열렸다. 사람들은 배를 닦고 살피며 기억을 보존하려 했다. 그러나 세월은 영웅의 이름조차 가차 없이 마모시킨다. 짠 바람은 나무를 썩게 했고, 파도는 선저를 갉아먹었다. 어느 날, 배를 점검하던 목수가 외쳤다.
“이 횡목이 완전히 썩었네. 당장 갈지 않으면 배가 무너지겠어.”
목수들은 레바논 숲에서 가져온 단단한 참나무로 썩은 판자를 교체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십 년 뒤에는 돛대가 바뀌었고, 이십 년 뒤에는 노젓는 의자가 새것이 되었다. 오십 년이 흐르자 선수의 조각마저 새 나무로 깎아 끼웠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중얼거렸다.
“괜찮아.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야. 우리가 정성껏 고쳐 왔잖아.”
수백 년이 흘렀다. 어느 날, 배를 바라보던 한 아이가 늙은 학자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저 배에 테세우스가 실제로 만졌던 나무는 남아 있나요?”
학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따져 보니, 처음의 나무 조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배는 견고했지만, 그 안의 모든 것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항구의 허름한 창고에 살던 한 괴짜 수집가가 있었다. 그는 목수들이 “썩었다”며 버린 옛 판자들을 몰래 모아 왔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남은 조각들을 이어 붙였다. 마침내 창고 안에는 낡고 볼품없지만, 오직 원래의 판자들로만 이루어진 한 척의 배가 완성되었다.
이제 아테네에는 두 척의 배가 있었다. 모든 부품이 새것으로 바뀌었으나 이름과 관리의 연속성을 지닌 ‘광장의 배’. 그리고 테세우스가 발을 딛고 손을 얹었던 나무들로 다시 조립된 ‘창고의 배’. 시민들은 갈라졌다.
“정체성은 정신과 연속성에 있다. 우리가 수백 년간 테세우스의 배라 불러 온 저 배가 진짜다.”
“아니다. 정체성은 물질에 있다. 테세우스의 땀과 시간이 스민 저 나무들이 진짜다.”
테세우스의 배는 묻는다.
“모든 것이 변한 뒤에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인가요?”
우리는 민족과 국가, 사회를 말할 때 흔히 ‘정체성’을 입에 올린다. 정체성(Identity)이란 시간과 상황이 바뀌어도 유지된다고 믿는 어떤 핵, 혹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잠정적인 응답이다. 그것은 가치관과 태도, 삶의 방향을 가늠하게 한다. 이 질문은 고대의 ‘테세우스의 배’ 역설에서 시작해 현대 사회심리학까지 이어져 왔다. 오늘의 세계에서 정체성은 과연 우리 내면에 고정된 실체로 남아 있는가. 아니면 디지털 환경과 감정의 과잉이 만들어낸, ‘탈진실(Post-truth)’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인가.
매끄러운 얼굴, 지워진 맥락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에 수록된 단편 「스무드」의 깊이는 ‘정체성’이라는 오래된 질문에서 드러난다. 이 작품은 테세우스의 배가 던졌던 물리적 대체의 역설을 넘어, 훨씬 정교한 방식으로 ‘맥락이 거세된 현대적 정체성’을 파고든다. 소설은 한국계 3세 듀이가 비즈니스 출장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하며 겪는 작은 소동에서 출발한다. 난생처음 밟은 서울의 광장에서 그는 우연히 극우 집회를 마주하고, 뜻밖의 환대를 받는다. 짧고 단순한 사건이지만, 그 안에는 오늘의 세계가 가진 복잡한 균열이 응축되어 있다.
성해나는 인물들을 다루며 독자의 관대한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대신, 정확한 이해와 냉정한 판단을 요구한다. 그 요청을 받아들이는 독자는 불편함을 통과해 시대와 사회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스무드」는 바로 그 지점에서 힘을 얻는다. 단편소설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읽는 이의 품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 작품에서 ‘진짜’와 ‘정체성’이라는 주제가 유난히 선명하게 반짝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프의 매니저는 나를 비롯해 총 셋이었다. 그중 내가 한국에 가게 된 이유는 동양인이기 때문이었다. 제프가 ‘인종 할당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덕에 유색인종 몇명이 채용되었지만 회사 전체에서 동양인은 여전히 나 하나뿐이었다."
- <스무드, 성해나> 중에서
소설은 시작부터 정체성의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를 떠나서 보더라도, ‘인종’이라는 구분은 과학적으로 취약하다. 인간은 단일 종(Homo sapiens)이며, 유전적으로 99.9% 동일하다. 현대 유전학은 인간의 차이가 인종의 경계에서 끊기지 않고, 지리적 이동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화해 왔음을 보여준다. 피부색과 눈 모양 같은 외형은 전체 유전자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아프리카 내부의 유전적 다양성이 오히려 전 세계 인구 전체보다 크다는 사실은, 인종이라는 틀이 인간을 설명하기에 얼마나 조악한지 말해 준다.
그럼에도 인종 개념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실재이기 때문이다. 인종은 오랫동안 지배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작동해 왔다. 객관적 진실이라기보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탈진실적 서사’에 가깝다. 「스무드」의 듀이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동양인-한국인’으로 분류되며 환대와 배제를 동시에 경험하듯, 인종은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강력한 맥락으로 작동한다.
이 지점에서 흔히 등장하는 ‘색맹적 관점’은 위험해진다. “나는 인종을 보지 않는다”는 선언은, 소설 속 듀이가 추구했던 ‘매끄러운 무지’와 닮아 있다. 차별의 역사와 축적된 마찰을 지운 채 생물학적 동일성만을 말하는 순간, 현실의 고통은 또 한 번 탈맥락화된다. 그것은 평등이 아니라 침묵의 강요일 수 있다.
결국 인종은 과학적으로는 허구에 가깝지만, 사회적 역사 속에서는 무게를 지닌 실재다. 우리는 인간이 단일 종이라는 과학적 진실을 붙잡으면서도, ‘인종’이라는 이름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불평등의 맥락을 동시에 읽어야 한다.
이 오해는 일상에서 쉽게 반복된다.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만 사용해 온 한국계에게 “영어를 참 잘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를 다시 외부로 밀어낸다. 계보적 연관만으로 억지 ‘한국인’으로 묶고 온갖 ‘K-’의 수식어를 덧붙이는 일도 다르지 않다. 뉴스에서 ‘한국계’가 강조될 때, 정작 그들의 정체는 한국인이 아니다. 문화적 전수의 역사로 정체성을 말할 수는 있지만, 동계 올림픽에서 클로이 킴이 어떤 기술을 뛰든 금메달은 미국의 것이다. 그렇다면 <K팝 데몬 헌터스>의 정체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코너는 셰프가 나를 위해 특별히 한정식을 준비했다고 했다. 고국의 음식이 그리웠을 것 같아 각별히 신경 썼다는 그의 말이 당혹스러웠지만 별말 없이 넘어가기로 했다... 내 부모는 한국계 2세대 이민자였지만 한식을 전혀 먹지 않았고, 나를 한인 식당에 데려간 적도 없었다."
- <스무드, 성해나> 중에서
가장 깊은 오해는 전혀 모르는 이들보다, 아주 조금 안다고 믿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잠시의 체류 경험을 보편으로 확장하며, 듀이 역시 한국계이니 같은 향수와 감성을 지녔을 것이라 단정하는 태도.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조용한 폭력에 가깝다. 「스무드」는 그 폭력이 얼마나 매끄럽고, 그래서 더 위험한지를 차분히 보여준다. 정체성은 부드럽게 덧씌워질수록, 더 깊이 상처를 남긴다.
마찰을 지운 매끈함의 외면
소설 「스무드」에서 정체성은 실존의 핵이라기보다, 불편한 진실과 마찰을 지운 ‘매끈한 상태’에 가깝다. 그것은 설치예술가 제프가 한국의 주상복합 단지에 전시하는 철제 조형물 <스무드>와 닮아 있다. 이 작품에서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무엇을 보지 않기로 선택했는가”에 따라 형성되는 표면이다. 듀이의 정체성에는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다. 그러나 그 매끄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타인의 고통과 역사적 비극이라는 마찰을 의식적으로 외면한다.
"「스무드」는 지름이 2미터에 달하는 구의 형태를 띤 작품이었다. 스테인리스스틸을 미끈하게 세공한 검은색의 구. 리는 막 포장을 벗긴 「스무드」를 바라보며 탄성을 터뜨리고는 한국 사람들이 유독 제프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제프를 따라 아홉개국을 돌며 나는 늘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누구나 제프의 작품을 좋아했다. 제프의 작품에는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었다. 바버라 크루거나 뱅크시의 작품처럼 무엇을 비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전지식 없이도 감상할 수 있고 뭘 안다고 감상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그런 매끈한 세계를 추앙했다."
-<스무드, 성해나> 중에서
이 소설은 묻는다. 우리는 복잡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기보다, 듀이와 제프처럼 기분 좋은 ‘매끈한 세계’의 아이콘을 수집하며 그것을 정체성이라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한국계 미국인인 듀이는 한국의 역사와 정치적 맥락에 거의 무지하다. 그에게 광화문의 극우 집회는 ‘독재의 미화’나 ‘역사 왜곡’이라는 거친 층위를 벗겨낸 채, 자신을 환대하는 “생기와 여유가 넘치는” 풍경으로만 인식된다. 집회에서 받은 이승만 배지를 제프에게 선물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사회적 갈등이 응축된 기호를 하나의 ‘디자인’이나 ‘기념품’으로 치환하는 행위, 즉 정치적 의미를 문화적 콘텐츠로 탈각시키는 태도가 바로 듀이가 지향하는 세계다.
"미스터 김은 입이 풀린 듯 자기 이야기를 더듬더듬 늘어놓았다. 이제는 그의 이야기를 대략 유추할 수 있었다. 그는 프라이드치킨을 팔아 자식을 키웠다고 했다. 아들이 둘 있다며 지갑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화질이 좋지 않은 사진 속에 한 부자가 있었다. 똑같은 멜빵바지를 입은 두 소년과 짙은 피부가 매력적인 건장한 남성. 사진 속 소년들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볼을 엎어놓은 듯한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의 소년들에게서—잠깐이지만—내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다."
-<스무드, 성해나> 중에서
유대감은 정체성을 더욱 단단하게 보이게 하지만, 동시에 함정을 만든다. 듀이는 집회 참가자들이 말하는 “이승만 광장”이나 왜곡된 “열사” 개념의 진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다정한 설명”과 “소속감”이 주는 감정의 온기에 집중한다. 정치성이 제거된 정체성은 이 지점에서 위험해진다. 소설은 “사람은 다 좋은 사람”이라는 나른한 온정주의를 경계한다. 듀이가 느끼는 “분명 그들과 섞이고 있었다”는 충만함은, 사실 정치적 사실관계를 지운 채 성립한 ‘탈진실적 합일’에 가깝다.
그래서 질문이 남는다. 정체성은 선택적 무지의 결과인가. 이 작품은 단호하게 답한다. 정체성은 실존하는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보지 않기로 선택했는가”로 빚어진 매끄러운 표면이라고. 듀이의 정체성에는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는 타자의 고통과 역사의 비극을 외면한다. 이 소설은 결국 오늘의 우리를 향해 되묻는다. 우리는 듀이처럼, 불편한 세계를 지우고 손에 잡히는 매끈함만을 모아 자신의 얼굴이라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매끄러운 무지의 얼굴, 그 가벼움
철학에서 정체성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한 개인이 ‘같은 존재’로 남아 있음을 증명하는 연속성에서 출발한다. 존 로크(John Locke)는 의식의 연속성, 곧 기억이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잇는 기억의 사슬이 곧 나라는 존재의 근거라는 생각이다. 동시에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혈연과 민족, 직업과 사회적 위치 속에서 개인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 인식은 삶을 지탱하는 실존적 토대가 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은 종종 사실보다 감정이 앞서는 탈진실의 도구로 변질된다.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는 이성적 토론보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라는 주관적 확신에 호소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정체성』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즉 티모스(Thymos)가 집단적 분노와 결합할 때 정체성은 타자를 배척하는 감정의 무기가 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디지털 알고리즘이 더해지면, 개인은 믿고 싶은 정보만을 반복적으로 접하며 파편화된 정체성 안에 머문다. 이때 정체성은 진실을 가리는 필터가 되고, 사실보다 집단의 서사에 동조하는 탈진실의 징표로 기능한다.
정체성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역사적 토대 위에 세워진 구성된 실재에 가깝다. 고정된 박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주되는 과정이다. 다만 이 과정이 성찰을 잃고 감정적 자극과 외부의 선동에만 의존할 때, 정체성은 쉽게 탈진실의 표식으로 전락한다. 결국 정체성이 실존이 될지, 파편이 될지는 개인이 스스로를 얼마나 비판적으로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다.
"기사가 리무진의 코치 도어를 열어주었고 제프가 먼저 탑승했다. 리무진에 타기 전,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와 다른, 나와 닮은 수많은 사람들이 공항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보며 나는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렸다. 알 수 없지만, 아주 좋은 하루였어요."
- <스무드, 성해나> 중에서
집회에서 받은 배지를 제프에게 건네며 “아주 좋은 하루였다”고 말하는 듀이의 결말은 진정성의 실종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사회의 상처와 갈등이 응축된 상징은 그의 손을 거치며 맥락을 잃은 기념품으로 바뀐다. 듀이에게 진정성이란 내면의 일관성이 아니라, 그 순간의 충만한 감정에 가깝다. 정체성은 실존의 본질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외면함으로써 유지되는 ‘매끄러운 무지’의 결과가 된다. 소설은 묻는다. 마찰을 제거한 정체성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진실로부터 고립된 유리구슬로 만드는가. 듀이의 만족스러운 얼굴은 정체성이 탈진실의 늪에 빠졌을 때 드러나는 가장 고독한 징표처럼 보인다.
소설의 백미는 듀이가 광화문 광장에서 극우 집회와 마주하는 장면이다. 그는 그들의 정치적 신념이나 역사 왜곡이라는 사실에는 눈을 감고, 자신에게 건네지는 다정한 환대라는 감정에만 반응한다. 이 순간 정체성은 전형적인 탈진실의 형태로 작동한다. 독재를 미화하고 광장의 이름을 바꾸는 행위가 듀이에게 아무런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는, 그 맥락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들과 섞이고 있다”는 주관적 유대감이다. 소설은 정체성이 사실과 맥락에서 분리될 때, 얼마나 손쉽게 집단적 선동과 감정적 합일에 동원되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한국 예술의 성취에 관해 이야기했다. 리는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연 작가에 대해, 코너는 이 아파트를 지은 건축가가 얼마 전 프리츠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에 대해 말하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들의 애국심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소 과하다고 생각했다."
- <스무드, 성해나> 중에서
듀이의 정체성은 결국 감정이 증폭된 탈진실의 징표에 가깝다. 그는 역사라는 사실보다 환대라는 감정을 선택함으로써 매끄러운 존재로 남는다. 이런 맥락 이탈은 오늘날 곳곳에서 반복된다. ‘K-’라는 접두어가 만들어내는 감정적 지지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적이라는 고유함을 세계적이라는 보편성으로 성급히 치환할 때, 우리는 둘 다 놓칠 위험에 직면한다. 그 비판은 종종 시기나 폄하로 오해받는다.
성해나의 「스무드」에서 듀이가 보여주는 탈맥락화된 정체성은 소설 속 인물의 특수한 성향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기술이 정보를 가공하고 정체성을 소비하는 현대 사회의 문법, 곧 ‘매끄러움(Smoothness)’과 깊이 닿아 있다. 듀이가 광화문의 고통을 배지 하나로 치환했듯, 우리는 SNS와 AI를 통해 세계의 거친 맥락을 지우고, 손에 닿기 좋은 표면만을 매끈하게 다듬어 소비하고 있다. 그 편안함의 이면에서, 정체성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다.
마지막 판자의 감각, 그 위에 남은 이름
‘테세우스의 배’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Plutarchos)가 전한 형이상학적 역설이다.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집요하다. 사물의 모든 구성 요소가 바뀌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같은 사물이라 부를 수 있는가. 세월이 흐르며 배의 모든 판자가 하나씩 교체되자,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시작된다.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17세기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여기에 한 겹을 더 얹는다. 버려진 옛 판자들을 누군가 모아 원래 설계대로 다시 배를 만들었다면, 진짜는 어느 쪽인가.
A 배: 부품이 하나씩 교체되어 지금도 아테네 항구에 떠 있는 배
B 배: 버려진 부품을 다시 조립해 만든 배
시공간의 연속성을 지닌 A인가, 물질적 기원이 동일한 B인가. 우리는 선택의 순간마다 논리적 균열 앞에 선다. 이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기준이 제시되어 왔다. 물질적 동일성(Material Identity)은 사물의 정체성을 구성 물질에서 찾는다. 이 관점에서는 A는 가짜이고, B가 진짜다. 형상적 동일성(Formal Identity)은 설계와 구조, 기능의 지속을 중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Formal Cause)에 따르면 배의 구조가 유지되는 한 A가 테세우스의 배다. 시공간적 연속성(Spatiotemporal Continuity)은 사물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끊김 없이 존재해 왔는가를 묻는다. 점진적으로 수리된 A는 연속적이지만, 해체와 재조립을 거친 B는 단절된 존재가 된다.
이 역설이 오늘에도 유효한 이유는 배가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으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포는 끊임없이 교체된다. 몇 년이 지나면 몸을 이루는 대부분의 원자는 달라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같은 ‘나’로 인식한다. 더 나아가 미래에 뇌의 정보를 데이터로 추출해 기계의 몸에 이식한다면(Mind Uploading), 그 존재는 나일까, 아니면 나를 닮은 복제물일까.
SNS에서 정체성은 철저히 편집되어 전시된다. 듀이가 취향에 맞는 ‘매끄러운 세계’를 추앙했듯, 우리는 프로필을 고통과 결핍이 제거된 심미적 기호로 채운다. 과거의 역사와 실존적 고뇌라는 마찰은 지워지고, 정체성은 시각적 매끄러움으로만 남는다. 인스타그램의 피드는 제프의 스테인리스스틸 구체처럼 반짝이지만, 그 빛은 타자의 시선을 반사할 뿐 이면의 진실을 비추지 않는다. 이렇게 정체성은 한 인간의 생애가 축적된 결과물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조립되고 폐기되는 탈진실적 소비재가 된다. 브랜드의 로고와 여행지의 풍경은 덧입혀지지만, 그 사회적 무게와 역사적 맥락은 듀이의 배지처럼 가볍게 사라진다.
인공지능의 작동 방식 역시 듀이가 광화문 집회에서 느낀 탈맥락적 유대감의 기술적 구현에 가깝다.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지만, 그 데이터가 쌓인 역사와 고통을 실제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AI는 파편을 연결해 가장 매끄러운 답을 내놓지만, 그 정교함은 종종 실체적 진실보다 확률에 기대 있다. 인간의 영혼 없이 동작만을 흉내 내는 오토마타(Automata)처럼, AI의 정체성 생성 또한 맥락이 제거된 기호의 반복이다. 듀이가 정치적 의미를 거세한 채 배지의 조형미에만 머물렀듯, AI는 윤리와 역사의 무게를 덜어낸 서사를 생산한다. 정체성은 고통의 흔적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완성된 출력물로 전락할 위험에 놓인다.
결국 「스무드」가 경고하는 ‘매끄러운 세계’는 SNS의 필터와 AI의 알고리즘이 완성해 가는 탈진실의 풍경이다. 듀이가 환대 속에서 느낀 소속감이 역사적 비극에 대한 무지 위에 피어난 신기루였듯, 우리가 디지털 공간에서 누리는 매끄러운 정체성 또한 실존을 외면한 대가일지 모른다. 정체성이 징표를 넘어 실존이 되기 위해서는, 매끈한 표면 아래에서 다시 마찰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테세우스의 배에 남은 마지막 썩은 판자처럼, 가공되지 않은 인간적 진정성의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