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라는 서늘한 작두 위에서

가짜의 형식으로 진짜를 묻다 - 「혼모노」, 성해나

by 박 스테파노

작가가 문학의 목적을 진실, 곧 진짜에 대한 탐구로 설정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명제에는 태생적인 긴장이 깃들어 있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허구의 형식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허구가 향하는 방향과 의미의 벡터는 진실을 가리킨다. 가짜의 형식으로 진짜를 말하려는 이 모순의 미학, 그 딜레마는 오래된 질문으로 작가를 붙든다. 성해나의 소설은 일찍부터 이 근원적 물음을 품어 왔다.


첫 소설집에 실린 「김일성이 죽던 해」는 그 출발점에 놓인다. 이 작품은 자전적 서사로, 화자인 ‘나’의 문학적 기원을 1994년 어머니의 일기장에서 길어 올린다. 공장에서 일하며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던 한 여성의 삶은 일기라는 형식으로 조심스레 발화된다. 이 장면은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신경숙의 『외딴 방』으로 상징되는, ‘여성의 목소리’가 문학 전면에 등장하던 시대의 질문을 환기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음 세대의 작가에게 되돌아온다. 너는 지금, 진짜를 쓰고 있는가.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신경숙의 『외딴 방』. 알라딘 제공


진짜를 쓴다는 말은 헛되지 않은 글을 쓴다는 뜻에 가깝다. 성해나의 소설은 인물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세계의 단면을 응시하며, 그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사건을 회피하지 않는다. 선대 문학이 던졌던 ‘진실에 대한 심오한 탐구’라는 질문을, 오늘을 사는 개인들의 삶 속으로 끌어와 현장화한다. 이는 내면으로 침잠하거나 질문을 유보하는 동시대의 한 경향과는 다른 태도다. 자신의 경험과 성찰을 토대로 ‘진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선택으로 읽힌다.


이 질문은 소설집 『혼모노』의 표제작 「혼모노」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세기말이 지나 사반세기가 흘렀지만, 무속과 주술의 세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으며,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에 많은 이들이 삶의 무게를 기대고 있다. 모든 종교가 한때는 이단에서 출발했지만, 무속은 제도 밖의 경계를 넘나든다. ‘몰아의 경지’라 불리는 엑스터시와 황홀경. 「혼모노」는 장수할멈을 모시는 박수무당 문수의 앞집에, 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당 신애기가 들어서며 시작된다. 현실과 비현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그렇게 일상의 마당 한복판에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신기가 떠난 자리에서


박수무당 문수에게서 신빨은 이미 오래전에 빠져나갔다. 빠져도 너무 빠져, 한때 영험과 신묘로 불리던 순간들은 이제 전설처럼 희미하다. 까탈스러운 몸주 장수할멈의 비위를 맞추느라 애써왔지만, 어느 날 신기(神氣)는 예고 없이 사라졌다. 앞집에 이사 온 솜털 보송한 신애기를 보며 잠시 마음이 흔들리지만, 장수할멈이 그를 버릴 이유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가짜는요, 마실 때 몸이 거부합니다. 역겨운 향도 나고요. 빛 좋은 개살구죠”

- <혼모노, 성해나> 중에서


팥떡을 들고 찾아온 신애기의 아버지는 문수에게 무심한 듯 날 선 말을 건넨다. 보이차에 대한 식견을 뽐내는 말이었을지라도, 문수에게는 신기가 다했다는 통고처럼 들린다. 무당으로서의 생이 끝났다는 선고. 그 사이 집 앞에는 여전히 점사를 보러 온 사람들과 굿을 청하는 이들이 줄을 잇고, 신애기의 말투 속에서는 장수할멈의 음성이 스며든다. 번아웃이라는 말이 문득 떠오르고, 신기가 떠난 자신이 진짜 무당인지, 무당을 흉내 내는 존재인지 알 수 없어 마음은 갈라진다. 이 혼란은 성해나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진짜 나는 누구인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요구에 매달려온 과거의 나인가, 아니면 이제 그 신호에서 물러선 현재의 나인가. 단골 정치인이 신애기에게 옮겨갈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자존심인지, 속된 계산인지도 분간되지 않는다. 접신의 시간들은 진실이었을까, 아니면 진실이라 믿고 쌓아 올린 우연의 연쇄였을까. 질문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이 물음은 작가에게도 겹쳐진다. 배경과 팬덤, 유명인의 샤라웃과 미디어의 조력이 사라진 뒤에도 진짜 작가로 남을 수 있는가. 어머니의 문학 일기 속 공지영과 신경숙의 흔적이 과연 자신의 본질에 스며 있는지, 혹은 흉내에 불과한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진짜와 진짜인 척하는 자신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1937년 작 <왕자와 거지>. 워너 브라더스 제공


소설의 절정에서 문수는 정치인 황보 의원의 굿판으로 향한다. 주변의 만류와 시선을 거두고, 혼자서 작두를 편다. 이 굿은 누군가를 위한 의식이 아니라, 무당으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지 가늠하는 자리다.


“삼십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 <혼모노, 성해나> 중에서


예전 같지 않은 몸으로 작두에 오르자 살은 갈리고 피가 번진다. 북소리는 거세지고, 땀과 피가 뒤섞여 몸을 타고 흐른다. 모두가 지쳐가지만 문수의 작두춤은 멈추지 않는다. 장단은 빨라지고, 몸은 다시 가벼워진다. 신기가 돌아온 듯한 착각 속에서 그는 끝내 황홀경에 닿는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그렇게 피와 땀의 흔적 속에서 잠시 사라진다.



멸절의 가장자리에서 추는 춤


19세기 후반, 북미 원주민들은 백인 정착민의 영토 확장과 버팔로의 전멸, 강제 이주 정책 속에서 존립의 끝으로 밀려났다. 이 절망의 한복판에서 1889년 무렵, 파이우트족 예언자 워보카(Wovoka, 잭 윌슨)는 ‘고스트 댄스(Ghost Dance)’를 시작한다. 그는 정결한 삶과 춤이 이어진다면 죽은 조상들이 돌아오고, 백인들은 사라지며, 잃어버린 땅과 버팔로 떼가 회복될 것이라는 천년왕국적 계시를 전했다.


고스트 댄스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진 정체성을 다시 붙들기 위한 집단적 기도이자, 말 대신 몸으로 수행하는 저항이었다. 이 운동은 나바호와 아파치, 특히 사우스다코타의 라코타(수족)에게 빠르게 퍼졌다. 라코타인들은 ‘유령 셔츠(Ghost Shirts)’가 총알을 막아 준다는 믿음을 덧붙이며 예언을 자신들의 현실로 변주했다. 춤은 상실된 세계를 부르는 마지막 언어였지만, 미국 정부의 눈에는 곧 무장 봉기의 전조로 읽혔다.


정부는 수족 지도자 ‘앉은 황소’를 체포하려다 그를 사살했고, 긴장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1890년 12월 29일, 운디드 니 계곡에서 무장 해제 중이던 ‘큰 발’ 추장의 무리와 미 제7기병대가 충돌한다. 무차별 발포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약 300여 명이 학살되었고, 이는 북미 인디언 전쟁의 종언으로 기록된다. 고스트 댄스 역시 역사 전면에서 사라진다.


Ghost Dance of the Oceti Sakowin, print from a wood engraving, 1891. Britannica.com


그러나 이 운동은 문화적 말살의 위기 속에서 원주민들이 도달한 영적 저항의 정점으로 남았다. 제임스 무니(James Mooney)는 이를 광신이 아니라 급격한 사회 변동에 맞선 심리적·문화적 자기방어로 해석했다. 무력 투쟁은 끝났지만, 그 정신은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 운동(AIM)으로 이어졌다.


성해나의 「혼모노」 속 박수무당 문수의 마지막 작두타기와 고스트 댄스는 ‘멸절 직전의 몸짓’이라는 지점에서 맞닿는다. 문수는 떠나가는 신기를 부정하며 피 흐르는 작두 위에 오른다. 이는 문명적 종말 앞에서 고스트 댄스를 추던 원주민들의 몸과 겹쳐진다. 문수에게 신기의 상실은 직업적 죽음이었고, 원주민들에게 전통의 상실은 민족의 죽음이었다. 두 춤은 벼랑 끝에서 기적을 부르거나, 그 부재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던진 종말론적 저항으로 남는다.



피로 남은 신성, 진짜의 자리


고스트 댄스의 가담자들은 탈진할 때까지 몸을 흔들며 무아지경(Ecstasy)에 이르러 조상을 만나고자 했다. 문수의 작두타기 역시 고통이라는 극단의 감각을 통과해, 사라져 가는 신성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려는 몸의 선택이다. 작두 위에 흐르는 피는 ‘가짜(니세모노)’로 밀려난 문수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실존의 흔적이다. 총알을 막아 줄 것이라 믿었던 고스트 댄스의 ‘유령 셔츠’가 학살 앞에서 무너졌듯, 문수의 발바닥을 적시는 피 또한 영적 권능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지극히 인간적인 진실을 드러낸다. 두 행위는 초자연을 기대했으나 끝내 육체의 한계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비극적 숭고미를 공유한다.


"‘고스트 댄싱’ 같은 종말론적 운동은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외침이다."

- < 세계 종교의 역사, 리처드할러웨이 지음, 이용주 옮김 > 중에서


몰아지경(Ecstasy)에 이르는 격렬한 춤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도취는 ‘진짜’의 감각에 닿기 위한 하나의 경로다. 성해나의 「혼모노」가 던지는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종교인류학적 시선과 ‘탈진실(Post-truth)’의 문제의식으로 확장된다. 접신은 흔히 외부 신성이 몸을 빌리는 사건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고스트 댄스와 무속의 춤은 반복된 신체 행위를 통해 의식을 변형시키는 자기 최면의 성격을 함께 지닌다.


리듬과 반복은 무용자를 일상적 자아에서 분리해 ‘엑스타시(Ekstasis, 자기 밖에 서기)’로 이끈다. 이때 핵심은 외부의 신이 아니라, 육체의 한계를 통과하며 분출되는 내부의 도취다. 「혼모노」에서 신기가 떨어진 문수가 작두 위에 오르는 장면은 신을 부르는 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도취를 강제로 생성하려는 처절한 자기 실험에 가깝다.


Dance of Ecstasy. Bvlgary Bali resort


‘탈진실’의 시대에 진짜의 기준은 객관적 사실에서 주관적 진정성으로 이동한다. 소설 속 ‘진짜 무당’은 더 이상 검증 가능한 신기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어디까지 믿고 던질 수 있는가의 문제다. 문수는 신기를 잃은 가짜일지 모른다. 그러나 고통에 완전히 몰입해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지점에 도달한다. 이 몰아지경의 순간, “나는 무당이다”라는 주관적 진실은 신기의 부재를 압도하며, 그 역설 속에서 ‘혼모노’라는 이름은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


총알이 관통한 유령 셔츠와 피로 젖은 작두 위에서 끝까지 행위를 지속하는 자는 더 이상 기만자가 아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자신을 전부 걸고 몰아(沒我)에 이르는 그 투신의 밀도, 바로 그 자리에서 성해나는 ‘진짜’의 얼굴을 남겨 둔다.



도취의 윤리, 혹은 파괴되는 진짜


그러나 성해나의 「혼모노」가 긍정의 궤적만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문수가 체감하는 ‘신기(神氣)의 상실’은 사회적·심리적 차원의 열패감으로도 읽힌다. 역사 속 나치 독일의 집단적 광기나 오늘날의 무비판적 팬덤은 놀라울 만큼 유사한 심리 구조를 공유한다. 개별적인 ‘나’의 초라함을 지우기 위해 거대한 ‘우리’라는 환각에 자신을 던지는, 일종의 몰아(沒我)적 보상 메커니즘이다. 이 지점에서 집단적 도취가 어떻게 파괴적인 ‘혼모노’를 지향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개인이 견디기 힘든 고립과 무력감을 마주할수록, 오히려 자유를 포기하고 강력한 권위나 집단에 귀속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분석했다. 나치 치하의 청년들, 현대의 극우 세력이 보여주는 무비판적 몰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현실의 나는 무능하고 가난하며 소외되어 있지만, ‘민족’이나 ‘국가’, 혹은 ‘절대적 존재(셀럽, 인플루언서)’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순간, 개인의 열패감은 집단의 위대함으로 덮인다.


문수가 작두 위에서 피를 흘리며 ‘나의 신기는 죽지 않았다’고 외치는 몸짓은, 거대한 대열 속에서 “우리는 위대하다”고 외치던 나치 청년들의 고양과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 둘 모두 결핍된 자아를 가리기 위한 과잉된 연출이라는 점에서 공명한다. 고스트 댄스와 작두타기가 리듬과 고통으로 몰아지경을 유도하듯, 나치는 횃불 행진과 반복 구호, 기하학적 대열이라는 ‘미학적 정치’를 통해 대중을 집단 최면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남는 것은 이성의 판단이 아니라, 압도적인 고취감뿐이다.


나치 청소년들의 열광적 집회와 히틀러. BBC 제공


여기서 ‘탈진실’의 논리가 작동한다. “우리 민족이 우월한가”라는 사실보다, “지금 이 집단 속에서 내가 얼마나 강력함을 느끼는가”라는 감각이 더 ‘진짜(혼모노)’처럼 체험된다. 팬덤의 무비판적 옹호 역시 다르지 않다. 대상의 윤리적 결함이라는 사실보다, 그를 감싸며 얻는 유대감과 승리감이 더 본질적인 진실로 기능한다. 성해나의 소설과 현대 극우적 양태가 만나는 지점은 ‘윤리가 제거된 진정성’이다. 문수의 작두타기가 개인의 실존적 정직함을 향한다면, 나치의 광기와 독선적 팬덤은 도취의 힘을 타자를 공격하는 무기로 전환한다.


몰아지경에서 획득한 내부의 도취가 혐오와 배제로 향할 때, 그 진정성은 파괴적인 권력이 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자아를 집단 속에 실종시킨 채, 고취감에 중독되어 사유를 멈춘 상태에서 발생한다. 문수의 피가 개인적 비극의 완성이라면, 나치의 광기는 타인의 피를 요구하는 집단적 살의로 변질된 ‘혼모노’의 가장 타락한 형상이다.



비단꽃길의 일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큰무당이자 국가무형문화재였던 고(故) 김금화 만신의 생전 인터뷰와 자서전 『비단꽃 넘세』(혹은 『비단꽃길』)에 담긴 고백은 ‘내부적 도취를 통해 진짜(혼모노)에 이르는 길’과 ‘결핍 속에서 감행되는 투신’이라는 주제와 깊이 공명한다. 김금화 만신은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작두 위에 서서 '여기서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이 일념으로 한순간이 지난 얼마 뒤에야 박수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접신의 경지, 망아경(忘我境) 속에서 이제까지 살아왔는지 모른다."


여기서 핵심은 ‘이 일념(一念)’이다. 작두 위의 서늘한 칼날을 견디게 하는 힘은 외부에서 내려오는 신의 마취가 아니라,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자아의 극단적인 집중이다. 외부의 신령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부차적이다. 그 순간,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일념의 순도가 그를 ‘진짜(혼모노)’로 만든다. 김금화 만신은 작두타기가 신비로운 보호의 결과가 아니라, 무당 자신의 내부 상태에 달려 있음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무속인은 어떤 욕심이나 목표를 정하면 안 돼요. 아프지 않으면 한편으로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무조건 그저 굴복해야 하지요."


이 말은 성해나의 「혼모노」 속 문수가 겪는 고통과 맞닿는다. 문수가 피를 흘리며 작두를 타는 행위는 신기의 상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무당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끝까지 투신하는 과정이다. 김금화가 말한 ‘굴복’은 신에 대한 복종이자, 자신의 운명에 대한 완전한 몰입이다. 그녀는 말문이 트였다는 이유만으로 무당 노릇을 하거나, 돈을 좇아 신내림을 남발하는 풍조를 비판하며 ‘진짜’의 조건을 수행에서 찾았다.


"신내림 받은 무당들이 많아졌어요. 이들이 가짜 무당은 아니지만, 수행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기도만 꼬박 3년을 해야 신령님이 옵니다."


이는 「혼모노」가 말하는 혼모노의 고통과도 이어진다. 문수가 피를 흘리는 이유는 그가 가짜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짜가 되기 위한 최후의 수행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금화에게 진짜 무당은 신기라는 결과를 소유한 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깎아내는 과정 속에 머무는 존재였다.


무형 문화재 고 김금화 만신의 굿장면. 영화 <비단꽃길>. 마운틴 픽쳐스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만신> (박찬경, 2014)과 자서전 『비단꽃길 넘세』 (2007)는 무속을 미신의 차원을 넘어, 한 여성의 생존 기록이자 예술적 승화로 그려낸다. 김금화에게 무속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적 습격이었고, 신병은 실존을 해체하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내림굿이라는 리투르기아(Liturgia, 전례)를 통해 공동체의 치유 에너지로 전환했다.


‘비단꽃길’이라는 역설적 표현은 작두가 날카로운 칼날이자, 신과 인간이 만나는 황홀한 접경지임을 상징한다. 무속의 의미는 개인의 비극적 신체 경험이 전례라는 형식을 통해 공동체의 서사로 확장되는 순간에 발생한다. 접신이라는 비현실적 사건은 전례를 통해 역사와 문화라는 실체를 얻는다.


무속의 진정성은 영험한 사건이나 전례의 형식 어느 하나에 고착되지 않는다. 영험함만 남으면 광기가 되고, 형식만 남으면 박제된 민속이 된다. 김금화의 서사와 성해나의 「혼모노」가 공유하는 통찰은 분명하다. 무속의 진짜 의미는 고통받는 타인을 위해 신의 목소리를 빌려오는 전례적 행위 자체에 있다.


결국 무속은 공동체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전승된 틀 안에서 현재의 비극을 정화하는 리투르기아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간의 문화적 질서 속으로 옮겨오는 숭고한 노동, 그것이 바로 비단꽃길이다.



흉내를 건너는 피의 질문


「혼모노」의 마지막 굿은 소설의 안과 밖을 동시에 흔든다. 선혈로 얼룩진 문수의 굿판에서, 장수할멈이 신애기의 입을 빌려 던진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라는 단정은 그 자리에서 무너진다. 그 굿은 흉내의 반복이 아니라, 진정성과 진실성이 극점에 이른 몰아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진짜를 가르는 질문은 문수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신애기와 몸주를 지나, 굿판을 한 바퀴 돌아 독자와 작가 자신에게까지 되돌아온다.


‘나는 진짜를 쓰고 있는가.’


발화의 주체가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흉내로는 통과할 수 없는 순간이 삶의 중심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이 소설의 메타 메시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해나의 질문은 가장 또렷해진다.


성해나는 현대 사회에서 ‘진짜’ 무당의 존재론적 의미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인물들이 추구하는 ‘혼모노(진짜)’는 영험한 신통력에 머물지 않는다. 자본과 결탁한 무속, 유튜브의 전시물이 된 굿판이 범람하는 현실 속에서, 작가는 접신의 진위보다 그 행위가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깊이 닿는가를 묻는다. 「혼모노」가 비추는 무속의 진실은 기복적 성취가 아니라, 누군가의 한(恨)을 풀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도구로 내어주는 전례적 성실함에 있다. 이는 김금화 만신의 굿이 기술이 아니라 억울한 죽음과 소외된 삶을 위로하는 공적 의례였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다.


김금화 만신이 남긴 “무속인은 어떤 욕심이나 목표를 정하면 안 된다”는 말은 이 소설의 윤리와 정확히 포개진다. 그녀가 말한 것은 신비한 권능이 아니라 무당의 ‘됨됨이’와 ‘비워냄’이었다. 욕심을 비운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초월적 힘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투신에 가깝다. 김금화의 삶은 “객관적 신기(사실)”보다 “자신의 고통과 운명에 얼마나 정직하게 몸을 던지느냐(진심)”가 혼모노를 가른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강화도 금화당에서 있었던 만수대탁굿. 큰 만신이 이 굿을 평생 세 번 하면 하늘이 문을 열어준다는데 김금화 선생은 지금까지 일곱 번의 만수대탁굿을 했다. 서울시50플러스 포털 제공


작두에서 내려온 뒤의 상처와 피에 대해 김금화는 정성이 부족했거나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라 말하면서도, 그것을 무당이 짊어져야 할 인간적 고통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문수가 흘린 피가 실패의 표식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려 한 ‘진짜’의 흔적임을 뒷받침한다.


「혼모노」는 진짜를 말하기 위해 바나나 우유를 호출한다. “바나나맛이 나지만 바나나는 아닌 우유.” 이 익숙한 비유는 진실을 가장한 가짜의 얼굴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탈진실의 시대에 성해나는 쉽게 믿는 대신, 수행하듯 의심할 필요를 말한다.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 <혼모노, 성해나> 중에서


진실은 봉인된 비밀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끊임없이 전도된다. 진짜가 가짜가 되고, 가짜가 진짜로 뒤집히는 그 과정 자체가 진실의 실체다. 진실을 추구한다는 일은 믿음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증명하려는 반복에 가깝다. 성해나는 이 질문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다. 자신의 사유와 작품을 향한 관심 또한 진짜인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큭큭”

― <혼모노, 성해나> 중에서



서늘한 진짜를 향한 직시


최근 한국 문단에서 주목받는 90년대생 여성 작가들의 흐름 속에서 성해나의 위치는 분명하다. 그의 차별점은 ‘소재의 토속적 확장’과 ‘실재, 곧 진정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 있다. 최은영이나 조해진으로 대표되는 서정적 리얼리즘, 관계 중심의 서사가 주류를 이루는 지형에서 성해나는 무속 신앙, 역사적 고문 공간의 건축 윤리, 세대 간의 날 선 대립을 서사의 중심으로 끌어온다. 그 선택은 위로보다 직시를, 온기보다 서늘한 긴장을 발생시킨다.


표제작 「혼모노」는 신기가 사라져 가는 노련한 박수무당과 그를 위협하는 젊은 무당의 대결을 통해, 세대 갈등을 넘어 ‘진짜와 가짜의 경계’라는 실존적 질문을 밀어붙인다. 이는 일상의 미시적 연대나 상상적 장치를 통해 현대인의 고립을 완충하려는 동시대 경향과 뚜렷이 대비된다. 성해나는 독자를 다독이기보다 파헤치며, 지적인 불편과 충격을 남긴다.


그의 서사는 인물의 내면 고백에 머물지 않는다. 치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사회적 맥락과 직업적 전문성을 복원한다. 「구의 집: 갈원동 38번지」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건축가의 고뇌와 광기를 다루거나, 「잉태기」에서 고부 갈등을 출산과 양육이라는 생물학적·사회적 쟁투로 전환하는 방식은 감성적 유대에 기댄 기존 젊은 여성 소설과 거리를 둔다. 이는 문학을 ‘섣부른 이해’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타인과의 대면’으로 설정하려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문체 역시 간결하고 날카롭다. 불필요한 수사를 덜어낸 문장은 대상의 핵심을 곧장 겨냥하며, 인물들이 겪는 존재론적 불안을 독자의 감각에 직접 닿게 한다. 소설집 『혼모노』는 진짜를 열망하면서도 가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초상을 ‘혼모노’라는 중의적 은어로 포착한다. 조롱과 연민이 교차하는 이 지점에서 성해나는 동세대 작가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리얼리스트로 자리한다.


성해나 작가. 알라딘 제공


성해나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소재의 파격’과 ‘해체적 시선’이다. 퀴어, 비혼, 돌봄 노동 같은 진보적 담론이 전면화된 흐름 속에서 그는 무속이나 역사적 트라우마가 깃든 건축물처럼 무겁고 구체적인 실제를 선택한다. 그 결과 소설은 관념적 연대의 장이 아니라, 인간 욕망의 민낯을 드러내는 씻김굿의 현장으로 변모한다.


또한 ‘혼모노’라는 일본어 유래 신조어의 다층적 맥락을 통해, 온라인 조롱 문화와 장인 정신이라는 상반된 가치가 충돌하는 시대를 비판한다. 그의 인물들은 무해하게 공존하지 않는다. 상처를 주고 기만하며 자기 자리를 지키려 몸부림치는, 유해하지만 생생한 존재들이다. 이 점에서 성해나의 소설은 이른바 ‘무해한 소설’과 분명히 다른 결을 지닌다.


성해나는 “작가는 진짜를 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답을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밀어붙이는 수행의 태도를 포착한다. 그 서늘한 진짜를 향한 걸음 위에서, 다음 작품을 조용히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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