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멈추지 않는 수고의 손길

김소월의 <개여울>을 만나 시를 생각하며

by 박 스테파노

문학 평론가이자 국문학자 신형철은 마셜 매클루언의 말을 빌려 ‘시는 메세지이자 마사지’라고 말한다. 문학동네시인선 50호 발간에 붙인 글 「아직도 시가 없으면 안되는가」에서 그는 시를 가장 특별한 언어적 실천이라 부르며, 그 실천은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시의 위대함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언어는 문학의 도구이기 이전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는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

-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중에서


그는 시인을 특별한 존재로 신비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시선을 경계한다. 훌륭한 시인은 타고나는 사람이 아니라, 끝내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주변에서 묵묵히 시를 써 내려가는 이들을 떠올리면 알 수 있다. 일부러 추위와 고독 속에 자신을 두는 이도 있고,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마친 뒤 조용히 시어를 건져 올리는 이도 있다. 그들의 시간을 지탱하는 것은 영감이 아니라 반복이다.


노력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일. 넘어지고, 또 일어나는 일. 그 단순한 되풀이가 전부다. 그래서 시 쓰기는 철저히 세속적인 작업이다. 세속은 성스러움의 반대가 아니라, 유한한 지금의 시간이 겨우 몸을 눕힐 수 있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흘린 땀 없이는 한 줄의 시도 태어나지 않는다.


영화 <시>의 한 장면. 뉴 제공


이 고투는 언제나 구체적인 사물과 만날 때 비로소 시가 된다.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소박하고도 거친 풍경 속에서 시는 몸을 얻는다. 시인은 그 익숙한 장면들 속에서 가장 흔하지만 좀처럼 붙잡히지 않는 것을 길어 올리려 애쓴다. 마르지 않는 샘에서 매일 같은 바가지로 물을 떠 올리는 일처럼, 느리고 성실한 노동을 반복한다.


그래서 시인이 바라보는 대상은 추상이 아니라 삶의 물질적 결이다. 손에 잡히고, 스며들고, 흘러가는 것들이다. 그 가운데 ‘물’은 가장 낮고도 깊은 비유가 된다. 끊임없이 흐르며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물의 속성은, 실패를 거듭하는 노력의 시간과 닮아 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향해 먼지를 씻어 내리고, 동시에 우리 안의 가장 깊은 얼굴을 비춘다.


그 유연한 매질 속에서 언어는 다시 살아난다. 시는 그렇게, 흘러가며 닦고 비추는 물의 일을 닮아 우리 곁에 남는다.



물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인류의 시적 상상력 속에서 물은 언제나 시작과 끝을 함께 품어 왔다. 만물이 태어나는 자리이면서, 모든 것을 삼키는 심연이기도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흐르는 성질 덕분에, 인간의 떠도는 감정을 가장 자연스럽게 비추는 매질이 되어 왔다. 한국 서정시에서도 물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며, 이별의 상처를 씻어 내리는 조용한 손길로 자리한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며 경계를 지우고, 때로는 고여 멈춤의 시간을 만든다. 흐름과 고임이라는 상반된 성질은 시인의 감각과 만나 하나의 이야기로 살아난다. 물은 흐르며 시간을 드러내고, 고요히 잠기며 존재의 깊이를 보여 준다. 그래서 문학 속의 물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을 만지고 삶을 비추는 언어의 형상에 가깝다.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물의 정서는 김소월의 <개여울>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이 시에서 물은 쉼 없이 흘러가며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상징한다. 강물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 곁의 화자는 떠난 이를 기다리며 멈춰 서 있다. 흐르는 물과 멈춘 인간의 대비는 기다림의 고통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여울의 물소리는 끝내 말이 되지 못한 울음을 대신 흘려보낸다.


'가장 사랑하는 시집 3권’의 저자로 최다 언급된 시인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수영, 백석, 최승자, 이성복, 기형도, 윤동주. 한겨레 자료사진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실개천’은 또 다른 결의 물이다. 그것은 유년의 기억과 고향의 그리움을 이어 주는 가느다란 생명선이다.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이 구절에서 물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길이 되고, 소리로 흐르는 물길은 독자를 아득한 시간 너머로 데려간다. 시 속의 물은 이렇게 단절된 시간을 다시 잇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더 또렷이 깨닫게 하기도 한다.


물은 정화와 성찰의 상징으로도 나타난다. 윤동주의 <자화상>에서 화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내면의 떨림을 마주한다. 직접 강물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시 전체에 감도는 축축한 기운과 ‘이슬’의 이미지는 고통을 씻어 내고 새로운 자아를 준비하는 물의 생명력을 암시한다. 특히 ‘우물’은 물의 정적인 깊이가 응축된 공간이다. 맑은 물은 화자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비추며, 잊지 말아야 할 순수를 조용히 환기한다.


흔들리지 않는 수면을 들여다보며 시인은 자신을 미워하고, 또 가엾게 여긴다. 그 반복은 물이 지닌 정직한 반사의 힘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존적 성찰의 과정이다. 결국 시에서 물은 영혼을 담는 그릇과 같다. 강이든, 우물이든, 혹은 한 방울의 눈물이든, 물은 우리의 가장 깊은 정서를 실어 나르는 가장 투명한 언어로 남는다.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가도 아주가지는
안노라심은
구지닛지말라는 부탁인지요



기다림이 머무는 물가


우리말에는 소리만으로도 마음을 젖게 하는 단어가 있다. ‘개여울’이 그렇다. 이 말은 강물이 바다에 이르기 전의 어귀를 뜻하는 ‘개’와, 바닥이 얕아 물살이 세차게 이는 ‘여울’이 만나 이루어진 이름이다. 지형으로 보면 민물과 짠물이 뒤섞이거나, 넓던 물길이 갑자기 좁아지며 숨을 몰아쉬는 자리다. 그러나 우리에게 개여울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흘러가던 것들이 잠시 뒤척이며 머무는 소리, 떠나는 이를 보내고 남겨진 이가 발을 담그는 경계의 공간에 가깝다.


여울은 깊지 않다. 무릎 남짓한 얕은 물이다. 하지만 물살은 놀랄 만큼 빠르다. 건널 수 있을 듯하면서도 쉽게 발을 내딛지 못하게 만든다. 이 모순된 감각 속에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한국적 정서가 스며 있다. ‘개’라는 말이 덧입히는 변두리와 야생의 느낌 또한 이곳을 다듬어진 풍경이 아닌, 가공되지 않은 슬픔의 자리로 이끈다.


이 단어가 한국인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데에는 김소월의 시 <개여울>이 있다. 시인은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라고 묻는다. 홀로 여울가에 앉아 있는 이를 향한 이 물음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조용한 탄식처럼 들린다. 흐르는 물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상징한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강물 곁에서, 화자는 떠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겠다”던 약속 하나를 붙잡고, 흘러가는 물살과 멈춘 마음 사이의 긴장을 견딘다. 여울의 소리는 흐느낌이 되기도 하고, 끝내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의 낮은 웅성거림이 되기도 한다.


소월의 시에서 개여울은 상실을 가만히 바라보게 하는 하나의 성소가 된다. 정미조의 목소리로, 또 아이유의 목소리로 다시 불릴 때에도 그 자리는 변하지 않는다. 세대가 달라져도 우리는 여전히 그 물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노래를 듣는다. 물살이 빠를수록 더 깊이 땅을 딛고 서 있으려는 마음, 그것은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붙들어야 할 무엇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의 고독한 의지와 닮아 있다.


김소월은 생전에 남긴 사진도 한두 장뿐이었다. 김소월 사진과 1925년 12월 간행된 '진달래꽃' 시집 초판본 표지. 사진 국제소월협회 제공


옛사람들에게 개여울은 길이면서도 경계였다. 강을 건너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자리였기에 마을과 마을을 잇는 통로가 되었고, 많은 이야기와 전설이 그 주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물살이 거칠어 사고가 잦았던 탓에, 삶과 죽음이 맞닿는 자리로 여겨지기도 했다. 한국의 시와 민요에서 물이 흔히 단절을 뜻한다면, 여울은 그 단절 속에서도 끊임없이 소리를 내며 존재를 드러낸다. 이는 속으로만 삭이지 않고, 터져 나오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슬픔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오늘 우리가 도시의 강변을 걷다가 문득 개여울을 떠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마음속 어딘가에 아직 건너지 못한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개여울은 지나간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마음의 풍경이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개여울을 품고 살아간다. 그곳은 아픈 기억이 흘러가는 자리이면서, 언젠가 돌아올 누군가를 위해 비워 둔 조용한 자리이기도 하다.



흐르는 시간, 머무는 마음


<개여울>은 한국 서정시의 정수로 자주 언급되지만, 이를 단순히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작품으로만 읽는다면 시가 품은 깊이를 충분히 만날 수 없다. 이 시의 핵심은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시간의 방식이 한 자리에서 부딪히는 데 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결은 되돌릴 수 없는 ‘선형적 시간’을 상징한다. 모든 것을 앞으로 밀어내며 과거를 지워가는 시간이다. 그러나 화자는 그 물가에 앉아 망각을 거부한다. 자연이 요구하는 잊힘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기억을 붙든 채 그 자리에 머문다. 흐름과 정지가 한 화면 안에서 맞서는 이 긴장이 시 전체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여울의 물은 쉼 없이 흘러가며 과거를 씻어내려 하지만, 화자는 떠나간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그는 물을 바라보며 오히려 기억을 되살린다. 이 장면에는 아이러니가 깃들어 있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기억만은 뒤를 향해 되돌아간다. 흘러가는 세계와 붙들려는 마음 사이에서 생겨나는 이 어긋남이 바로 시가 만들어내는 비극적 아름다움이다. 망각이 삶을 지속시키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라면, 화자의 태도는 그 질서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며, 기억을 통해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려는 인간적 몸짓이다.


https://youtu.be/tjof-yk8PZw?si=EYXYxNAozw_XwLEQ

정미조의 <개여울>



비평의 눈으로 보면 <개여울>은 유동하는 이미지와 고정된 의식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존재론적 균열을 섬세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형태를 남기지 않는다. 반대로 화자의 마음은 한 지점에 머물러 스스로를 굳힌다. 이 대비 속에서 개여울은 단순한 이별의 배경이 아니라, 떠나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슬픔을 스스로의 내부에 새겨 넣는 ‘능동적인 고립’의 공간으로 변한다. 그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남기를 선택한 존재에 가깝다.


김소월의 시가 지닌 율격, 곧 7·5조 3음보의 리듬은 흔히 전통적 한의 정서를 담는 형식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리듬을 근대적 개인의 고독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반복되는 가락은 공동체적 노래의 형식을 닮았지만, 그 속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는 철저히 혼자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라는 말은 약속처럼 되풀이되지만, 정작 “당신”은 이미 부재한다. 돌아올 가능성이 사라진 자리에서, 말은 더 이상 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독백으로 남는다.


종결 어미의 부드러운 청유형과 호소형 또한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응답 없는 자연을 향한 발화에 가깝다. 이는 타자와의 관계가 끊어진 근대적 주체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언어의 울림이다. 전통 민요의 형식을 빌려왔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는 공동체적 슬픔이 아니라 개인의 절대적 고독이다. 익숙한 가락 속에 낯선 고립을 숨겨 놓은 데서 이 시의 예술적 긴장이 발생한다.


슬픔은 물처럼 흘러가지만, 동시에 리듬 속에 붙들려 사라지지 않는다. 율격은 감정을 흘려보내는 통로이면서도, 그것을 견디게 하는 구조가 된다. 반복되는 가락은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 리듬은 슬픔을 달래는 장치가 아니라, 슬픔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인 셈이다.


결국 <개여울>은 전통적 서정의 외형을 지니면서도, 돌아오지 않는 대상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근대적 인간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흐르는 물가에 끝내 남아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기억 속에 머무르려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모순을 조용히 드러낸다. 그 모순이야말로 이 시가 오래도록 우리 마음을 적시는 이유다.


https://youtu.be/kj71jzO5U8k?si=4XrYgoJB2UTaGF6G

아이유의 <개여울>




세속을 견디는 자리, 개여울


시인으로 남는다는 일은 세속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일에 가깝다. 김소월 역시 그러한 시간을 살았다. 개여울에 주저앉은 누군가를 노래하기 위해, 먼저 시인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일본인 목도꾼에게 폭행당한 아버지의 상처, 관동대지진으로 끊어진 유학의 길, 뜻대로 되지 않았던 광산업과 신문 지국의 실패. 그가 견딘 현실은 한 편의 서정보다 훨씬 무겁고 거칠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무게를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에서 언어를 길어 올렸다. 신형철이 말한 ‘노력’이란 이런 시간이 아닐까.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자리, 실패를 거듭하며 말을 다듬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반복의 시간 말이다. 소월의 시가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까닭은, 그 짧은 시어들 속에 그러한 세속의 시간이 켜켜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이라는 한 구절에도 수많은 현실의 사정이 배어 있다. 식민지의 시대, 집안이 정한 혼처, 가난과 거리, 서로를 붙들 수 없었던 조건들. 시인은 그 모든 사연을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가도’라는 두 글자 속에 밀어 넣는다. 떠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지만, “아주 가지는 않노라”는 말을 되새기는 까닭은 원망이 아니다. 그 약속이 현실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마음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소월의 언어는 슬프지만 절규하지 않는다. “당신은 무슨 일로 / 그리합니까”라고 스스로를 바라보는 물음에는, 감정을 견디기 위한 조용한 거리 두기가 담겨 있다. 그는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끝내 그 ‘무엇’을 밝히지 않는다. 말로 꺼내면 결국 세속적 이유들로 흩어질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의 진짜 노력은 말하지 않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대신 “파릇한 풀포기”와 “봄바람에 헤적이는 잔물”을 놓아둔다. 계절은 다시 오지만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않고도 느끼게 한다. 이것이 언어가 감당하는 방식이다. 언어로 세속을 견디고, 견딘 시간을 다시 언어로 건네는 일.


영화 <동주>의 한 장면. 메가박스 플러스엠 제공


개여울에서 소월이 길어 올린 것은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순수를 지키려 애쓰는 사람들의 시간, 떠날 수밖에 없었으나 마음만은 남겨두고 간 이들의 약속,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믿으려는 한 사람의 고독이다. 7·5조의 잔잔한 리듬은 그 고독을 버티게 하는 호흡이 된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날마다 그 자리에 다시 앉을 수 있을 만큼의 속도다.


시는 없어도 삶은 이어진다. 그러나 시가 필요하다고 믿는 마음까지 사라질 수는 없다. 개여울은 바로 그 마음이 머무는 자리다. 현실이 허락하지 않았던 사랑을, 그럼에도 기억하려는 자리. 소월은 그곳에 날마다 나와 앉아, 언어로 견디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그 시를 읽는 일 또한, 견디는 시간의 한 부분이 된다. 백 년 전 개여울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의 시간을, 지금 우리의 유한한 삶 속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수고가 마침내 기꺼움으로 바뀌는 순간, 손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시를 써 내려간다. 시인은 그렇게 멈추지 않는 수고 속에서 태어난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26화우리는 무엇을 진짜라고 믿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