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미래가 아니라, 너무 가까운 오늘

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를 통해 본 한국의 SF

by 박 스테파노

본격적으로 한국 SF를 읽기 시작했다. 이른바 ‘SF 출판의 붐’을 이끌었다는 천선란과 김초엽의 이름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상징처럼 거론되는 작품들부터 펼쳐 들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에 여백이 남았다. 오래전 필립 K. 딕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었고, 아이작 아시모프의 질서 정연한 우주를 지나왔으며, 그보다 앞서 올더스 헉슬리와 메리 셀리가 남긴 오래된 질문들과 함께한 시간이 이미 내 안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성년 이후에는 영화와 드라마로 다시 태어난 이야기들을 따라가며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의 풍경을 사유해 왔다. 그 세계들은 인간과 문명의 끝을 상상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장르적 실험장이었다. 그 기억과 기대가 너무 선명했던 탓일까. 한국 SF를 읽으며 마주한 감각은 ‘미래’라기보다 ‘현재’에 가까웠다.


한국 SF는 장르적 상상력의 확장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이 사회가 안고 있는 균열과 질문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는 한국 장르 콘텐츠가 형성해 온 독특한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외부에서 성공한 레퍼런스를 받아들이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한국 사회의 현실 속으로 밀어 넣어 다시 변형한다. 그렇게 장르는 번역되는 것이 아니라, 재정의된다. 그리고 그 재정의는 실험적 시도로 머물지 않는다. 어느새 하나의 흐름이 되고,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다.


한국의 SF 출판붐. 중앙포토 제공


이 과정에서 사적 감성으로 기울었다는 평가나 여성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그러나 그런 설명만으로는 이 변화의 전모를 담아내기 어렵다. 실제로 이 장르가 향하는 곳은 훨씬 더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이다. 거대한 문명의 파국보다, 오늘을 살아내는 개인의 조건을 더 집요하게 묻는다. 한국 SF는 거창한 미래학이 아니라, 현실의 세목을 통과하며 형성된 장르에 가깝다.


이런 생각을 스레드에 적었더니, 여러 사람이 한 작가를 거듭 권했다. 바로 김보영. 한국 SF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중심을 이루는 이름이라는 말과 함께였다. 그녀의 작품들을 더듬어 찾아가다 한 단편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닮았는가」.


그 제목을 바라보는 순간, 이 장르가 묻고 있는 질문이 어쩌면 미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닮음의 조건, 안다는 것의 의미


김보영의 단편 「얼마나 닮았는가」는 토성의 위성 궤도를 도는 우주선 내부라는 폐쇄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훈(HUN-1029)’이라 불리는 위기관리 AI가 인간의 모습으로 배양된 의체에 다운로드되어 위기상황을 조사하여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다. 작품의 핵심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해하고 닮아가려 할수록,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근원이 뜻밖에도 편견과 차별이라는 사실에 다가가게 된다는 역설에 놓여 있다.


위기관리 AI는 인간의 사고를 완벽히 모사하도록 설계되었지만, 기지 안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 증오와 위계적 폭력을 이해하지 못해 거듭 멈춰 선다. 삭제되거나 망실된 정보가 존재함을 감지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추론하며 업무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 추론은 학습된 지식이 아니라, 눈앞에서 겪는 경험을 더듬어 세우는 가설에 불과하다. 이해는 언제나 늦고, 판단은 늘 어긋난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AI가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성차별’과 ‘젠더’ 관련 정보가 인위적으로 삭제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인공지능을 설계한 정부 관리가 “한국 사회에 성차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 아래 관련 데이터를 제거해 버린 탓이다.


이 공백 때문에 AI는 인간들이 누구를 왜 멸시하는지, 왜 어떤 존재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지 끝내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이 서로를 ‘우리’라고 인식하는 기준은 고결한 이성이 아니라, 특정 대상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감각을 함께 나누는 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AI는 결국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과 닮기 위해 학습해야 할 마지막 단계가 바로 이 추악한 편견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순간 ‘인간다움’이라는 이름의 정의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드러낸다.


SF 작가 김보영과 「얼마나 닮았는가」. 한계레/ 작가 제공. 교보문고 제공
"문제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내가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모르는 것을 안다’는 말부터 앞뒤가 맞지 않는다."

- <얼마나 닮았는가, 김보영> 중에서


이 작품의 매력은 이 ‘정보의 부재’를 독자에게도 동일하게 체험하게 한다는 데 있다. 독자는 위기관리 AI의 시선을 따라, 불완전한 단서만으로 상황을 짐작한다. 처음에는 선실 안의 알력과 폭력을 폐쇄 공간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건쯤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에 자본의 이해득실이 얽혀 있다고 생각하면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많은 독자, 특히 나 자신이 놓친 것이 드러난다. ‘젠더’라는 문제의식, SF라는 공간에서도 성차별과 성폭력이 구조를 이룰 수 있다는 전제 말이다. 위기관리 인공지능 ‘훈’이 그 가능성을 지워 둔 채 작동하듯, 독자 역시 그 공백 속에서 읽기를 계속해 온 셈이다.


이 작품은 사적인 위로나 감정의 회복에 머무는 최근 경향과는 다른 궤도를 그린다. 개인의 상처를 어루만지기보다, 사회에 스며든 구조적 혐오와 정치적 무의식을 ‘AI의 시선’이라는 사변적 장치를 통해 또렷이 드러낸다. 그래서 이 소설은 SF가 단순한 장르적 장식이 아니라, 세계를 낯설게 다시 사유하게 하는 사변소설이어야 함을 증명한다. 누군가는 그 도착점이 페미니즘이라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특정 관념의 호불호가 아니라, 인간이 무엇으로 인간을 배제해 왔는가에 관한 더 근원적인 물음에 가깝다.



‘만약’이라는 두 갈래 길


흔히 SF를 ‘사변문학’이라 부른다. 다소 오래된 표현처럼 들릴 수 있으나, 여전히 유효한 장르적 정의다. 여기서 말하는 ‘사변(思辨)’은 영어 ‘Speculative Fiction’에서 비롯된 말이다. ‘Speculative’는 사색적이고 추측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이 개념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일본식 한자 조어가 자리 잡았고,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과학소설을 넘어 판타지와 호러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범주로 확장되었다.


이 장르는 현실을 바꾸어 보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의 성격을 지닌다. 하나의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이 만들어 낼 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 사변적이라는 말은 경험이 아니라 이성과 논리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려는 철학적 태도를 뜻한다. 다시 말해 아직 경험하지 않았거나, 어쩌면 영원히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사유하는 일이다. 이 지점만 보면 단순한 상상이나 공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에, 실제로도 두 개념은 자주 혼동된다.


인간은 언제나 눈앞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늘 ‘만약(What if)’이라는 질문을 던지며 다른 가능성의 지도를 그려 왔다. 그 지도 위에 놓인 두 갈래가 바로 사변(Speculative)과 공상(Fancy/Fantasy)이다. 두 용어는 종종 뒤섞여 쓰이지만,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사유의 문법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사변과 공상의 공통점은 현실의 물리적·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둘 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관찰 가능한 세계 너머를 그려 본다. 이런 반사실적 사유는 SF 이론가 다코 수빈이 말한 ‘인지적 낯설게 하기’와 맞닿아 있다. 익숙한 현실을 낯설게 비틀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두 갈래는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


그러나 ‘만약’이라는 출발선 이후의 방향은 전혀 다르다. 사변은 말 그대로 생각을 가려내는 작업이다. 전제가 아무리 가설적이라 해도, 그 전개는 엄격한 인과와 내부적 논리를 따라야 한다. 현실의 연장선에서 ‘일어날 법한’ 혹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세계를 탐구하는 태도다. 결론이 실패나 파국에 이르더라도, 그 과정은 검증 가능한 가설처럼 작동해야 한다.


반면 공상(空想)은 이성의 통제보다 상상력의 자유에 더 가까이 있다.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가 말했듯, 공상은 기억과 연상을 재배치하는 능력이며 물리 법칙이나 논리적 필연성에 반드시 매일 필요가 없다. 공상이 ‘불가능한 것의 경이로움’을 향한다면, 사변은 ‘낯선 것의 필연성’을 향한다. 최근 유행하는 회빙환 서사가 엄밀히는 공상에 가까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변 장르의 벤다이어그램. Amazon.com 제공


문제는 오늘날 이 공상이 종종 사변의 외피, 곧 ‘SF’라는 이름을 입고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대중적 소비층에 다가가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사변의 긴장과 엄밀함이 약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 SF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적(私的) 소설화’ 경향 역시, 사변의 논리적 추동력이 감상적 공상으로 기울어지는 현상과 맞닿아 있다.


본래 사변은 개인의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 구조, 기술의 변화, 타자와의 윤리적 충돌 같은 더 큰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을 지닌다. 만약 장르가 ‘나와 너’의 관계 회복이라는 안온한 이야기로만 수렴한다면, 그것은 SF가 지녀 온 전복적 상상력을 스스로 축소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공상이 주는 위로는 분명 소중하다. 그러나 사변이 남기는 서늘한 인지적 충격, 세계의 균열을 논리로 드러내는 힘이야말로 이 장르가 문학사 속에서 어렵게 확보한 자리다. 사변은 단순히 다른 꿈을 꾸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의 바닥을 의심하고, 그 균열을 끝까지 사유해 보는 일에 가깝다.



‘위로’라는 환상과 ‘해부’라는 사변


최근 한국 SF 시장에서 널리 읽히는 이른바 ‘공상적 감상주의’ 작품들의 성공 요인은 역설적으로 그 무해함에 있다. 이 소설들은 SF적 장치를 세계를 흔드는 질문이 아니라, 정서를 부드럽게 감싸는 배경으로 사용한다. 독자는 낯선 미래를 통과하지만 결국 도달하는 곳은 위로와 관계 회복이라는 안전한 자리다. 상상력은 도약하기보다 안정을 돕는 장식이 된다.


그러나 김보영의 서사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힘을 얻는다. 그의 이야기는 독자를 안심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서 있다고 믿어 온 세계의 논리적 바닥을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흔든다. 이때 작동하는 장치가 바로 SF 이론가 다코 수빈이 말한 ‘인지적 낯설게 하기’다. 김보영에게 상상력은 감정을 소모하는 통로가 아니라 존재를 해부하는 이성의 도구다. 서사는 개인적 상처의 봉합에 머물지 않고, 사회 구조와 기술, 타자와의 윤리라는 더 큰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녀의 작품이 감상주의적 SF와 갈라서는 까닭은 ‘인간이라는 종의 특권’을 전제하지 않는 데 있다. 많은 이야기들이 외로운 미래에서 발견한 따뜻한 연대에 집중할 때, 「얼마나 닮았는가」는 우리 사회의 소통 방식 자체가 혐오와 편견의 축적 위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서 AI는 감정을 대신 말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외면해 온 구조적 모순을 비추는 차가운 거울이다.


이 서사가 향하는 곳은 ‘이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아니다. ‘이 전제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어디에 도달하는가’라는 사변의 종점이다. 『저 이승의 선지자』에서 이어지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에 대한 질문 역시 신비로운 환상이 아니라 치밀하게 설계된 사고실험에 가깝다.


물론 최근 젊은 작가들이 SF를 통해 소수자성과 연대를 말하는 흐름은 분명 의미 있는 성취다. 다만 그것이 ‘착한 인물과 나쁜 환경’이라는 단순한 대립으로 굳어질 때, 서사는 쉽게 예측 가능한 도식으로 줄어든다. 김보영은 그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선량함조차 하나의 프로그래밍된 값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독자는 위로 대신, 자신의 인식이 얼마나 제한된 틀 속에 있었는지를 깨닫는 서늘한 순간과 마주한다. 그 충격이야말로 공상이 아닌 사변의 영역에 속한다.


영화 <승리호>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얼마나 닮았는가」의 절정에서 남녀 집단이 갈라져 대치하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인공 중력을 만들던 회전 구조가 멈추는 순간, 모두를 붙들던 힘도 사라진다. 중력의 상실은 세계를 지탱하던 관념의 붕괴를 가리킨다. 그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비양심적인 기둥이었는지를 드러내는 은유다. AI는 매뉴얼 속 경고를 호출한다.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과신하지 말 것. 사람들은 자신과 닮았다고 여기는 존재의 인격만을 가까스로 상상할 뿐이다.


"사람들의 생각이 그 방향에 묶이지 않도록 매 순간 끊임없이 조정해야 하는 것. 전염성이 커서 고립된 사회에서 한번 퍼지면 걷잡을 수 없는 생각. 인간이 한 줌의 노력도 없이 즐길 수 있는 우월의식. 그러기에 말할 수 없이 달콤한 것."

- <얼마나 닮았는가, 김보영> 중에서


소설 속 무중력의 반란은 어쩌면 지금의 SF와 한국 문학이 선 자리를 비추는 장면처럼 읽힌다. 이야기는 젠더와 성정체성, 성인지의 문제를 호출하지만, 그 질문을 ‘문학의 정수’라는 말로 바꾸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으려 했는지 되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의 출판 환경에서 글쓰기는 종종 ‘팔리는 이야기’를 만드는 기술로 축소된다. 상상력은 감정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감정을 소비하게 만드는 장치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렇게 유통되는 정서의 반복 속에서 사변의 긴장은 점차 희미해진다. 유행은 전염처럼 번지고, 그 쏠림은 과도한 중력처럼 우리를 짓누르거나, 반대로 방향을 잃은 무중력처럼 떠돌게 만든다.


김보영의 서사가 남기는 감각은 그 두 상태 사이에서 균형을 다시 묻는 질문에 가깝다. 무엇이 우리를 붙들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 힘은 과연 정당했는가. 그 물음이야말로 사변문학이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긴장일 것이다.



궤도와 중력 사이에서 묻는 것들


소설 「얼마나 닮았는가」의 무대는 ‘혜자형’ 원양 우주선과 그것이 가로지르는 우주 공간이다. 우주선은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 주둔한 연구 개척자들에게 보급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 반복되는 항로가 곧 작품의 시간과 공간을 묶는 크로노토프가 된다. 이곳에서 시간은 달력이나 계절로 흐르지 않는다. 보급을 언제 투하해야 하는가, 언제 귀환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계산 속에서만 측정된다. 임무의 궤도와 물자의 이동이 곧 존재의 의미를 재는 척도로 작동한다.


추락인지 불시착인지 분간할 수 없는 탈주선의 창 너머로 펼쳐진 장엄한 행성을 바라보며 AI 훈은 이렇게 사유한다.


"인간은 이런 것을 보고 사는구나. 감각적이다. 공학적인 지식도 수학적 논리도 아닌 정보들. 들여다볼 도리가 없는 타인의 마음을 엿보기 위해 발달한 공감 신경과 거울 뉴런들, 햇빛처럼 쏟아지는 감각. 야만이 그 정신의 반이라면, 그 야만을 다스리는 데에 나머지 반을 쓴다. 인간이란."

- <얼마나 닮았는가, 김보영> 중에서


이 소설의 결말은 어떤 이념의 구호로 닫히지 않는다. 위기관리 AI인 훈이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며 남기는 질문은 ‘페미니즘’이라는 협의의 범주를 넘어선다. 작품이 보여 주는 것은 인지라는 능력이 계산과 추론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 다시 말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문제다. 젠더라는 주제가 강하게 부각되는 순간에도, 서사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를 감정이 아니라 인식의 구조 속에서 차분히 풀어낸다.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묻는 방식으로, 이 작품을 쓴 김보영의 시선은 감정의 표면을 어루만지기보다 사고의 심층을 파고든다.


SF는 그저 외피가 아니다. GeekDad 제공


SF라는 장르는 근대 과학의 탄생과 함께 자라났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틀이 신화에서 법칙으로 옮겨 가던 시기, 문학은 그 변화의 균열을 감지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H. G. 웰스의 ‘사이언티픽 로맨스’는 기술 낙관주의의 찬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술이 인간 존재를 어디까지 흔들 수 있는지 묻는 서사였다. 다코 수빈은 이러한 성격을 ‘인지적 낯설게 하기’라고 불렀다. 현실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낯설게 만들어, 우리가 익숙하다고 믿은 세계를 다시 보게 하는 장치라는 뜻이다.


이 흐름 속에서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1940년대 로버트 하인라인이 제안한 이 말은 과학기술의 외형보다 인간 조건에 대한 가설적 탐구를 강조하려는 시도였다. 다만 이 용어는 때로 과학적 긴장을 덜어내고 문학적 품격을 강조하려는 전략으로 오용되기도 했다. 사변이 현실을 밀어내는 질문이 아니라 관념의 유희로 머무를 때, SF는 변혁의 힘을 잃고 추상적 사유 속에 갇힐 위험이 있다.


해외 문학에서 SF는 이미 장르의 울타리를 넘어 중심으로 들어왔다. 마거릿 애트우드와 가즈오 이시구로는 SF적 설정을 활용하면서도 그것을 인간 사회의 윤리와 정치성을 비추는 장치로 확장한다. 여기서 사변은 차가운 기술이 아니라 문명을 해부하는 칼날로 기능한다.


한국의 경우 SF는 오랫동안 주변 장르로 남아 있었지만, 최근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과 함께 눈에 띄는 전환기를 맞았다. 김초엽, 천선란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장르의 문턱을 낮추고, 타자에 대한 공감과 환대라는 감각을 서사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는 SF가 금속성의 차가운 상상력에서 인간적 온기를 품은 이야기로 변모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변화가 사변이라는 말의 무게를 점차 개인적 치유와 관계의 회복이라는 방향으로만 옮겨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세계의 구조를 묻는 대신 마음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 머무를 때, SF는 광대한 우주를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결국 작은 방 안의 이야기로 수축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사적(私的) 소설화’는 장르가 지닌 전복적 성격을 약화시킬 수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필립 K. 딕. 중앙일보 제공


물론 이러한 경향은 과거 거대 담론 중심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인식의 반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변소설의 핵심 가치는 ‘나’를 넘어선 무엇을 상상하는 데 있다. 인간 바깥의 질서, 아직 도달하지 않은 시간, 낯선 존재와의 마주침을 끝까지 밀고 가는 데 있다.


한국 SF가 일시적 유행을 넘어 하나의 문학적 지층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위로의 서사를 넘어 세계를 다시 설계하려는 질문과 다시 만나야 한다. 장르의 외연이 넓어지는 만큼, 그 사유의 심연 또한 함께 깊어져야 한다. 그것이 우주를 배경으로 삼는 문학이 끝내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게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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