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년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반쪽짜리 거울이 비추는 한국 문학의 초상

by 박 스테파노

편의점 파라솔 아래, 한 남자가 스마트폰 화면에 몸을 기울인다. 화면 속 인물은 핏대를 세우며 외친다. 음모론과 주식 차트, 정치적 분노가 뒤섞인 거친 말들이 쉼 없이 쏟아진다. 그것은 누군가의 과장이 아니라, 하루를 버텨낸 몸에서 밀려 나오는 생존의 소리처럼 들린다. 남자는 그 말을 믿고 만 원짜리 슈퍼챗을 보낸다. 손바닥만 한 화면이 잠시 전장이 된다. 그는 그 안에서 잠깐 자신의 자리를 확인한다. 짧고 강한 각성이 피로를 밀어낸다.


같은 시각, 번화가 뒤편의 북카페. 한 여성이 1만 8천 원짜리 오토픽션을 펼친다. 통유리 안쪽에는 낮은 정적이 흐른다. 정돈된 손등 위로 문장들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책 속의 하루는 크지 않지만 단단하다. 그녀는 그 문장들을 따라가며 스스로의 감각을 가늠한다. 소란 대신 미세한 연결이 일어난다. 말없는 공감이 천천히 쌓인다.


두 장면은 서로 다른 취향의 대비라기보다, 이야기가 머무는 자리의 이동(Migration)에 가깝다. 누군가는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더 즉각적인 언어를 찾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느린 문장을 통해 삶을 견디는 방식을 택한다. 어느 쪽도 우열이라 말하기 어렵다. 각자가 감당해야 할 하루의 무게가 다를 뿐이다.


서점의 매대, 북콘서트의 주류는 여성들. Unplash 제공


오늘의 소설은 시장의 중심에서 조금 비켜나 있다. 생계의 계산이 먼저인 사람에게 긴 서사는 쉽게 선택되지 않는다. 확신을 빠르게 주는 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반대로 문학은 시간과 여유를 필요로 하는 매체가 되었다. 그 조건을 확보한 이들에게는 여전히 깊은 위안과 사유의 공간으로 남는다. 문제는 그 간극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점의 공기는 이미 달라졌다. 책을 고르는 손길, 낭독회의 표정, 매대 앞에 머무는 시간의 결이 이전과 다르다. 한때 지적 권위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독서가 이제는 각자의 삶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배치된다. 누군가는 화면 속 정보의 흐름에서 세계를 읽고, 누군가는 종이의 호흡 속에서 자신을 정리한다. 읽기의 형식이 달라졌을 뿐,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남겨진 순수문학의 자리는 고요하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과 "안전소득"이라는 조건이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공간은 배타적인 성채라기보다, 간신히 유지되는 느린 장소에 가깝다. 현실의 무게와 완전히 분리되지도, 완전히 포섭되지도 못한 채 중간 어딘가에 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문학의 쇠퇴가 아니라, 역할의 변화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대 담론의 깃발을 들던 시기를 지나, 더 작은 목소리와 개인의 시간 속으로 스며드는 과정. 광장을 떠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 셈이다. 그 흩어짐이 단절로 보일 때도 있지만, 다른 방식의 생존 전략일 수도 있다.


지금의 문학은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숨을 고른다. 그 자리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버티게 하는 문장 하나가 놓이는 자리다. 깃발은 사라졌지만, 이야기가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다. 다만, 들리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조용히 이동한 자리, 상실의 망명


2010년대 이후 한국 문학 출판에서 여성 작가들의 약진은 단순한 체감의 문제가 아니다. 「더스쿠프 」 조사에 따르면, 2023년 신춘문예로 데뷔한 작가의 성별은 여성이 66.5% 남성이 33.5%로 두 배 가까운 차이를 보였다. 등단 단계에서부터 이미 흐름이 달라진 셈이다. 2025년 교보문고 한국문학 베스트셀러 40편 가운데 남성 작가는 정대건, 김기태 등 4명에 그쳤다. 등단 인구가 줄면 평가받는 작품도 줄어든다는 단순한 산술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평단의 반응까지 함께 보면 이야기는 조금 더 복합적이다.


교보문고가 매년 발표하는 ‘2025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에서 언급된 국내 작품 19편 중 남성 작가는 이기호, 박선우, 민병훈, 정용준 네 명뿐이었다. 전통적으로 남성 작가의 비중이 높았던 장르 문학에서도 변화가 이어진다. SF와 호러, 판타지 분야에서 여성 작가의 존재감이 꾸준히 커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남성 작가의 활동 지표가 양적·질적으로 모두 낮아 보이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다만 이것을 단순한 쇠퇴나 경쟁의 결과로만 해석하기에는, 그 배경에 놓인 사회적 조건이 적지 않다.


출판 평론가 장은수의 진단을 빌리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교육과 노동 환경의 변화다. 여성의 고등교육 확대와 사회 진출이 보편화되면서 창작 인력의 구성 자체가 달라졌다. 지적 노동의 잠재력을 갖춘 인구가 늘었지만, 현실의 유리천정은 여전히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자본 부담이 적고 진입 장벽이 낮은 출판 산업으로 인력이 유입된 이유다. 동시에 편집·마케팅 직군의 여성 비율이 약 80~90%에 이르는 구조가 자리 잡으며, 여성 서사를 더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되먹임, 피드백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독자의 구성도 그에 따라 변했다. 늘어난 여성 취향의 서사는 2040 여성 독자의 '신념 소비'와 맞물리며 시장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일상과 관계, 소수자 담론을 다루는 이른바 '무해한 서사'가 널리 읽히기 시작한 것도 이 흐름 속에 있다. 반면 기존의 거칠고 중량감 있는 서사가 충분한 공감대를 얻지 못한 경우도 생겼다. 일부 창작자는 웹소설이나 영상 플랫폼, 혹은 정치·경제 담론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이는 특정 성별의 선택이라기보다, 각자가 더 유효한 발화 공간을 찾아 이동한 결과에 가깝다. 논픽션 영역에서 남성 생산자가 늘어나는 현상 역시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이러한 이동은 독서 문화 안에 새로운 계층적 감각을 만들었고, 순문학이 일정한 여유를 전제로 향유되는 양상도 함께 나타났다.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1위 김애란 작가의 『안녕이라 그랬어』, 2위 구병모 작가의 『절창』. 교보문고 제공


이 지점에서 두 가지 가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성별의 대립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장르의 사회적 위치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묻는 시선에 가깝다.


첫번째는 "문학의 권위 상실과 '상징 자본'으로의 고립화"는 가설이다. 문학은 한때 사회를 계몽하는 언어로 기능했다. 시대를 해석하고 공동체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기대받았다. 그러나 영상 매체와 SNS가 일상의 서사를 빠르게 대체하면서, 문학은 더 이상 세상을 직접 움직이는 장치라기보다 개인의 내면을 정리하는 매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문학의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말로 설명되기도 한다.


과거에는 문단이 사회적 상승의 통로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그 기회비용이 훨씬 커졌다. 반대로 시간과 자원을 확보한 독자에게 문학은 감수성과 사유를 드러내는 정제된 문화적 실천이 된다. 전체 독서율은 낮아졌지만, 순수문학은 일종의 '하이엔드 취미'로 남는 역설적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 다음은, "'내방가사'의 귀환과 서사 주도권의 역사적 복원"이라는 가설이다. 소설이라는 형식이 본래 일상과 감정, 사적 경험을 담아내던 장르였다는 점을 떠올리는 시각이다. 근대 이전 동서양에서 서사시와 철학이 공적 담론의 영역이었다면, 생활의 이야기와 관계의 서사는 종종 주변부에서 길러졌다. 영국의 『제인 오스틴』 시대나 조선의 「내방가사」, 『완월회맹연』 같은 국문 소설 독서 풍경이 그 사례다.


20세기는 전쟁과 이념의 긴장 속에서 예외적으로 문학이 거대 담론을 짊어졌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무게가 옅어진 21세기에 들어, 소설은 다시 사적인 시간과 미시적 경험의 자리로 스며들고 있다. 누군가는 다른 매체에서 더 직접적인 발화를 시도하고, 누군가는 느린 문장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이어 본다. 이 현상은 상실이라기보다, 서사가 놓이는 자리의 재배치로 읽을 수 있다.


두 가설은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한다. 문학의 사회적 무게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한쪽에서는 왕관을 내려놓은 결과라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갑옷을 벗은 귀환이라고 말한다. 어느 해석이든 지금의 변화는 대립의 결과라기보다 시대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이동에 가깝다. 지금 문단에서 목격되는 어떤 공백은 소멸이라기보다, 다른 자리에서 진행 중인 이야기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문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예전과 다른 속도와 다른 목소리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뿐이다.


3,4위 정이현『노 피플 존』, 이기호『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김혜진의 『오직 그녀의 것』 성해나의 『혼모노』.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편해영『어른의 미래』



사라진 영토, 옮겨 간 서사


한때 가난은 작가의 훈장이었다. 잉크 냄새 밴 원고지 위에서 굶주림을 견디며 시대의 정수(精髓)를 길어 올리는 일은 일종의 성스러운 고행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26년의 한국 사회에서 가난은 더 이상 낭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실패의 표식에 가깝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이 우선 과제가 되면서, 수익을 보장하지 않는 순수문학은 누군가에게 선택이 아니라 부담이 된다. 특히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을 크게 느끼는 이들에게 문학은 지켜야 할 이상이라기보다 잠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영역으로 밀려난다.


이제 작가의 형상도 달라졌다. 헝그리 정신의 상징이라기보다, 문화적 자본을 갖춘 창작자가 문단의 전면에 선다. 파리의 카페, 북유럽의 호수 같은 이미지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문장은 세련되지만, 생활비와 노동의 피로에 눌린 독자의 하루와는 간극이 생기기도 한다. 문학이 공동의 고통을 나누는 광장이기보다, 개인의 감각과 취향을 정교하게 드러내는 장르로 이동한 결과다. ‘압구정 김 시인’이라는 농담은 과장이 아니라, 변화된 문학 환경을 비추는 자조적 거울에 가깝다.


이 변화의 밑바탕에는 경제적 조건이 놓여 있다. 근대 문학장이 약속했던 지식인의 권위는 약해졌다. 작가는 더 이상 사회적 지도층이라기보다 수많은 콘텐츠 생산자 중 하나로 분류된다. 상징적 보상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불안정한 수입 구조다. 신자유주의의 질서는 글쓰기를 자아실현이 아닌 투입 대비 산출의 문제로 재편했다. 시 한 편, 소설 한 편에 쏟는 고혈(膏血)에 비해 현실의 보상이 너무 적다고 느끼는 순간, 많은 창작자는 다른 길을 모색한다. 이것은 가치의 포기가 아니라 생존 방식의 조정이다.


그들이 옮겨 간 대표적인 공간이 웹소설 시장이다. 이곳은 불확실한 등단의 시간이 아니라, 매일의 노동이 즉각 결과로 환산되는 현장이다. 일정 분량을 쓰면 곧바로 독자의 반응과 수익이 돌아온다. 웹소설은 서사적 성취와 경제적 실리를 동시에 제공하는 구조를 갖는다. 전통 문학이 질문을 던지는 동안, 이 시장은 명확한 해답과 속도를 제시한다. 현실의 좌절을 잠시 잊게 하는 ‘먼치킨’ 서사는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느끼는 무력감의 보상 심리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이곳은 도피처라기보다 또 하나의 노동 시장이자 서사의 변형된 작업장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이동 경로는 디지털 공론장이다. 유튜브와 SNS는 직설적인 언어와 즉각적인 반응을 특징으로 한다. 정치와 경제 담론은 매일 갱신되는 거대한 이야기 구조를 형성한다. 누군가에게 정치는 사유의 대상인 동시에 참여형 서사가 된다. 재테크 담론 역시 마찬가지다. 차트의 상승과 하락, 전략과 실패의 반복은 강한 현실 감각을 제공한다. 긴 독서의 시간을 요구하는 소설 대신, 빠른 정보와 보상이 결합된 이 서사들이 현대인의 감각에 더 밀착한다.


<가난한 시인> 카를 슈피츠베크(1837).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소장

이처럼 서사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동안, 순수문학의 자리는 상대적으로 고요해졌다. 이 공간을 지키는 이들 가운데는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정서적 연대와 자기 표현의 가치를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경쟁의 압박은 동일하지만,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문학은 이들에게 라이프스타일의 장식이 아니라 존재를 설명하는 언어로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고통을 함께 노래하던 서정이 개인의 감정과 취향 안으로 지나치게 수축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거대 담론의 퇴조 이후 문학이 ‘나의 기분’에만 머무르는 경향, 공적 리얼리즘이 사라진 자리에 사유의 사적화가 들어섰다는 진단이다. 이른바 "무해한 서사"가 널리 소비되면서, 불편하고 거친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이 줄어든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독자를 위로하는 이야기만 남고 세계를 파헤치는 언어가 약해진 것은 아닌지 묻게 되는 대목이다.


문학이 이렇게 ‘무해한 서사’ 속에 머무는 동안, 현실의 치열한 장면들은 오히려 다른 매체에서 더 생생하게 재현된다. 주식 시장의 그래프, 정치적 논쟁의 소음, 온라인 담론의 격렬함 속에서 오늘의 리얼리즘이 작동한다는 역설이다. 문학장은 한층 정제되고 우아해졌지만, 동시에 시대의 거친 숨결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이 현상을 단순한 세대교체나 성별 변화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문학이라는 장르가 사회 속에서 맡아 온 역할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문학은 더 이상 모두의 광장이 아니라, 선택된 시간과 자원을 필요로 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문학의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과 ‘안전소득 연 500파운드’는 오늘날 더욱 현실적인 조건처럼 들린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어떤 집단의 승리나 패배가 아니다. 서사가 머무는 자리의 이동, 그리고 문학이 사회와 맺는 방식의 재조정이다. 문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이전과 다른 자리에서, 다른 속도로, 우리 시대의 의미를 더듬고 있다.


강애란 작가 <지성의 탑>/ 2025년 교보문고 한국소설 연간 베스트셀러 순위. 한국일보 제공



미시(微視)의 방과 사라진 광장


오늘날 한국 문학의 지형이 크게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한쪽의 약진이나 다른 쪽의 후퇴로 단순화할 수 없는 변화다. 한국일보의 보도처럼, 44년 만에 처음으로 수상자 전원이 여성으로 채워진 이상문학상의 풍경은 우연이라기보다 시대의 흐름을 드러내는 징후에 가깝다. 서점가의 중심에 선 2030 여성 독자들이 ‘읽는 존재’에서 ‘쓰는 존재’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며 시장의 결을 바꾸는 사이, 다른 독자층은 문학과 조금 다른 거리에서 삶의 해법을 찾고 있다. 이는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둘러싼 생활 방식의 변화에 가깝다.


이 변화의 동력은 새로운 목소리가 포착해 낸 동시대의 감각이다. 돌봄과 젠더, 퀴어처럼 오래 주변에 머물던 경험들이 서사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그 과정은 누군가의 자리를 밀어낸 결과라기보다, 이전에는 충분히 말해지지 않았던 삶의 층위가 드러난 일에 가깝다. 문학계에서 강조하듯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성별이 아니라, 작품이 독자의 삶에 어떤 파동을 남기는가 하는 문제다. 문학의 본질은 언제나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을 얼마나 깊이 감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조애너 토머스코어(Joanna Thomas-Corr)가 2021년 「옵저버(The Observer)」에 쓴 글에서 말한 ‘소설의 여성화(Feminization of the Novel)’ 역시 이러한 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단순한 숫자의 변화가 아니라, 서사의 시선이 거대한 역사와 이념에서 개인의 내면과 관계의 결로 옮겨 갔다는 신호다. 전쟁과 혁명의 서사를 쌓아 올리던 장대한 구조물 대신, 오늘의 소설은 작고 구체적인 삶의 장면을 오래 바라본다. 균열은 미세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밀도는 결코 가볍지 않다.


토머스코어가 지적하듯, 이 흐름은 문학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은 애초에 사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다만 20세기의 격랑 속에서 사회적 발언의 중심에 서 있었을 뿐이다. 이제 문학은 다시 개인의 방과 거실, 내면의 독백으로 스며든다. 어떤 이에게 그것은 축소로 보이고, 다른 이에게는 삶의 실제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으로 읽힌다.


이 지점에서 말해지는 ‘문학의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표현은 문학이 점점 특정한 조건과 감수성 안에서 소비된다는 우려를 담고 있다. 거칠고 불편한 현실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정제된 경험과 세심한 윤리를 보여 주는 작품들이 더 쉽게 공감을 얻는 현상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500파운드의 안전소득이 보장된 방은 이제 상징적인 조건이 되었다. 글을 쓰고 읽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안정이 점점 더 중요한 자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변화가 곧 문학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학이 광장의 언어라기보다 취향의 공동체 속에서 작동하는 양상이 강해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함께 외치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읽고 쓰는 방식이 늘어났다. 문학은 더 넓어졌지만, 동시에 더 흩어졌다.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 . 경향신문 제공


이 과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징후가 ‘무해함’에 대한 선호다. 오늘의 작품들은 구조적 모순을 정면으로 드러내기보다 개인의 상처와 회복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독자 역시 거대한 담론의 피로를 지나온 뒤, 자신을 해치지 않는 문장 속에서 숨을 고른다. "무해한 문장"은 시대의 피난처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무해함이 언제나 무력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조용한 이야기 속에서도 세계를 견디는 방식은 드러난다. 다만 그 목소리가 사회 전체의 언어로 확장되지 못할 때, 문학이 공통의 현실을 묻는 힘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남는다. 연대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각자의 감정 속에 흩어질 때, 문학은 더 섬세해지는 대신 덜 공적인 장르가 된다.


특히 시문학에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시는 공동체의 운명을 노래하기보다 개인의 감각을 정밀하게 기록하는 장르로 기울었다. 누가 더 날카로운 고독을 발견하는지, 얼마나 미세한 감정을 포착하는지가 중요한 미학적 기준이 된다. 이를 두고 ‘서정의 사유화’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시장의 구조가 일정한 독자층을 중심으로 굳어지면서 서사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는 경계의 목소리다.


결국 지금의 변화는 어느 한쪽의 승리도, 패배도 아니다. 문학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이 다시 조정되는 과정이다. 광장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방 안의 독백으로 옮겨 갔을 뿐,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조건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묻게 된다. 이 조용한 방들이 다시 서로의 문을 열고 연결될 수 있을지, 그때 문학은 어떤 언어로 우리를 부를 것인지.



사라진 목소리와 남겨진 자리


시문학이 한때 세상을 흔들던 언령(言靈)이었다는 기억은 이제 희미하다. 오늘의 시는 거대한 현실을 가르는 칼날이라기보다, 각자의 감수성을 조용히 증명하는 작은 장신구에 가까워 보인다. 최근 몇 년 신춘문예와 신인상에서 여성 수상자가 크게 늘어난 흐름 역시 단순한 우연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누군가의 약진이나 다른 누군가의 퇴장으로만 해석하는 일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시대의 관심이 이동한 자리에서 문학의 무게중심 또한 달라졌을 뿐이다.


과거 시가 민중과 역사라는 거대한 질문을 붙들었다면, 지금의 시는 몸과 관계, 일상의 결을 오래 들여다본다. 이는 축소라기보다 시선의 방향 전환에 가깝다. 세계를 향해 외치던 목소리가 삶의 내부로 스며든 셈이다. 다만 그 이동이 공동의 감각을 약화시키고 각자의 방 안으로 문학을 흩어지게 만들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수익 구조가 거의 없는 시의 현실은 또 다른 역설을 낳았다. 생계와 무관한 글쓰기는 점점 상징 자본의 영역으로 기울었고, 시는 치열한 생존의 언어라기보다 여유 있는 취향처럼 오해받기도 한다. 이 상황에서 일부는 문학을 떠나 다른 매체로 이동했고, 일부는 조용히 남아 언어를 지켜 왔다. 누구의 책임이라 단정하기보다, 사회 전체의 독서 환경과 문화적 습관이 함께 변한 결과에 가깝다.


문학장의 성별 지형은 어느 날 뒤집힌 풍경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인식의 균열이 천천히 표면으로 떠오른 결과에 가깝다. 19세기 소설이 여성적 장르로 폄하되던 시절, 여성 작가들은 필명 뒤에 몸을 숨긴 채 글을 내보내야 했고, 한국 근대 문학 역시 ‘여류’라는 명명 속에서 여성을 중심이 아닌 주변의 장식으로 배치했다. 그러나 거대 담론이 퇴조한 1990년대 이후, 삶의 미시적 결을 포착하는 서사가 독자의 감각과 맞물리며 여성 작가들이 비로소 시장의 호흡과 접속하기 시작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mp/A2026022210260000613

2020년 기사 . 동아일보 제공


오늘의 변화는 단순한 역전이라기보다 권위의 해체와 자본의 재배치가 동시에 일어난 자리에서 나타난 새로운 균형의 징후다. 문제는 이 이동이 또 다른 배제의 구조를 낳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며, 문학이 다시금 삶의 다성적 리듬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여전히 열려 있는 질문이다.


문학이 다시 넓은 숨을 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특정 집단의 귀환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결들이 다시 만나는 일이다. 거리의 소음과 방 안의 고백이 한 언어 안에서 공존할 때, 문학은 비로소 현실과 이어진다. 불편함을 견디는 힘, 타인의 경험을 통과하는 상상력, 바로 그 오래된 기능이 다시 요구된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실종자』(프란츠 카프카, 1927)다. 주인공 카를 로스만은 성장하지 못한 채 세계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전통적 교양소설이 자아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때, 카프카는 오히려 주체가 해체되는 과정을 그렸다. 이 낯선 역성장의 서사는 오늘날 문학이 겪는 감각의 균열과도 닮아 있다. 누군가가 중심을 차지했다기보다, 모두가 중심을 잃어버린 상태에 더 가깝다. 오늘의 문학장에서 감지되는 공백 역시 비슷하다. 쓰지 않는 문제라기보다 읽지 않는 문제, 서로의 서사를 건너가지 않는 습관이 더 깊은 단절을 만든다.


영국의 「가디언(The Guardian)」지의 "Why do so few men read books by women?"라는 기사에 따르면, 남성들은 여성 작가가 남성 작가보다 권위가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것뿐 아니라, 애초에 남성들이 여성 작가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남성들이 여성 작가의 책을 펼쳐보는 것조차 꺼린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베스트셀러 여성 작가 상위 10인(제인 오스틴, 마거릿 애트우드 , 대니엘 스틸, 조조 모예스 등)의 독자 중 남성은 19%에 불과하고 여성은 81%를 차지한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남성 작가 상위 10인(찰스 디킨스, JRR 톨킨, 리 차일드, 스티븐 킹 등)의 경우, 남녀 독자 비율이 훨씬 더 균등하다. 남성이 55%, 여성이 45%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 여성들은 남성 작가의 책을 읽을 의향이 있지만, 여성 작가의 책을 읽을 의향이 있는 남성은 훨씬 적다. 반면 여성 독자들은 남성 작가의 작품을 읽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들에게 문학은 여전히 타자의 세계를 건너가는 통로다.


이 차이는 경쟁이나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 독해의 비대칭에 가깝다. 한쪽은 여전히 타인의 세계를 탐험하지만, 다른 한쪽은 문학을 삶과 분리된 장르로 밀어내고 있다. 그 결과 문학은 점점 더 작은 공명실이 되고, 서로 다른 경험은 만날 기회를 잃는다.


교보문고 본점의 독서 책상 모습. 2016년의 모습이다. 경향신문 제공


문학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성취를 낮추거나 다른 목소리를 호출하는 일이 아니다. 이미 이루어진 성과 위에 더 많은 경험이 포개지도록 길을 넓히는 일이다. 섬세한 서사가 쌓아 올린 성채와 거친 현실의 언어가 한 자리에서 부딪칠 때, 문학은 다시 입체적인 얼굴을 얻는다.


문학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이 잠시 함께 머무는 공유지(Commons)에 가깝다. 그곳에서 우리는 타인의 시간을 읽고,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을 배운다. 사라진 것은 특정 주체가 아니라 서로를 건너가던 독서의 다리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필요한 것은 복귀가 아니라 재접속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이 다시 만나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일. 문학이 그 만남의 장소로 남아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실종이 아니라 공존의 시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

• 조애너 토머스코어, 「The feminisation of the novel」, "The Observer", 2021.05.16. Link

• 샌드라 뉴먼, 「Why do so few men read books by women?」, "The Guardian", 2021.07.09. Link

• 「2023 신춘문예 당선자 분석」, "더스쿠프", 2023.

• 「제44회 이상문학상 수상자 발표」, "한국일보", 2021.

• 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역), 『실종자』, 민음사, 2012.

• 장은수, 페이스북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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