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으면 그만인가. 무거워야 제맛인가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2024년 〈파묘〉와 〈범죄도시4〉 이후 2년 만의 일이지만, 평단도 언론도 산업 내부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새로운 현상을 마주한 듯한 당혹감이 번졌다. 개봉 전부터 류승완의 신작 〈휴민트〉가 앞설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고, 천만이라는 숫자는 어디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천만 영화는 나왔다. 그것도 〈왕과 사는 남자〉로.
"이건 몇 가지 측면에서 향후 매우 중요한 기준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평단과 언론이 더 이상 대중의 취향과 감성, 욕망과 욕구를 간파해 내지 못한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건 평단의 수준이 낮아졌다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의 수준이나 안목이 높다거나 낮다거나 하는 얘기 또한 아니다. 양쪽 모두 서로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하거나 듣고 있다는 것이다. 평단과 대중이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는 것도 거의 처음 같은 일이다."
- 아르떼 〈궁금증이 만든 천만영화...'왕과 사는 남자'의 비밀〉, 오동진 평론가
오동진 평론가는 평단과 대중의 디커플링을 평론에 대한 외면에서 읽는다. 상업영화 관객들은 이제 리뷰를 읽지 않는다. 그 자리를 SNS 댓글 한 줄과 20자 평이 채웠다. 입소문은 즉각적이고, 감정적으로 정직하며, 제법 정확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거기서 만들어지는 편향과 왜곡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익명성이 보장된 공간에 비평을 올리면 반응은 빠르다. "재미나면 그만인데 왜 가르치려 드느냐"는 항의다. 그 반감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정직하다. 재미있으면 그만이라는 말에는 거짓이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만'이 어디까지인가.
비평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비평은 묻는 것이다. 우리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감각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 그 재미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질문은 훈계가 아니다. 다만 불편하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취향은 사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철저히 공적인 산물이다. 시대가 좋아하라고 훈련시킨 것을 좋아하고, 자본이 익숙하게 만든 것을 편안하게 여기며, 공동체가 승인한 것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비평은 그 구조를 들여다본다. 개인의 감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이 형성된 맥락을 탐문한다.
비평의 쓸모는 판정에 있지 않다. 진짜 쓸모는 감각을 넓히는 데 있다. 재미있던 것을 더 깊이 재미있게 만들고, 무심히 지나친 것에서 결을 발견하게 하며, 오래 사랑했던 것을 다른 눈으로 다시 보게 한다. 그것이 때로는 상실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그것은 확장이다.
"재미나면 그만"이라는 말이 닫힌 문처럼 들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만이라는 말은 끝을 선언한다. 비평은 거기서 계속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실패에 쫓기고 시간에 추격당하는 지금의 대중에게, 그 계속의 심연은 부담스럽고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쓸모없는 문장의 묶음이라 여겨진다. 정말, 비평은 쓸모없는가.
잔치가 끝난 뒤
비평의 시대는 저물었다. 한때 비평가는 대중의 안목을 견인하는 계몽적 선구자이자, 예술의 성소를 지키는 문지기였다. 그러나 오늘날 광장에 울려 퍼지는 것은 비평가의 정교한 문장이 아니라, '나만 뒤처질 수 없다'는 군중의 거대한 발소리다. 비평가가 작품의 미학적 결함을 조목조목 짚어내는 동안, 대중은 이미 스마트폰을 켜고 유명인이 샷아웃한 베스트셀러를 내려받고 다음 천만 영화의 예매 버튼을 누른다. 비평은 이제 유효한 안내자가 아니라, 잔치가 끝난 뒤 혼자 남은 이의 공허한 독백에 가깝다.
비평가와 대중의 시선은 평행선을 넘어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비평가들이 '본격'과 '예술'이라는 낡은 잣대로 작품의 구조와 철학적 함의를 고집할 때, 대중은 장르적 쾌감과 즉각적인 감정의 해소에 열광한다. 블록버스터 상업영화를 두고 서사의 빈약함이나 자가복제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아무런 파문을 일으키지 못한다. 대중에게 그 영화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동시대인들과 함께 겪어야 할 하나의 사건이자 놀이이기 때문이다. 비평가의 안경 너머에 서린 선민의식은 그저 고리타분한 훈수로 비칠 뿐이다.
권위는 해체되었고 정보는 과잉된 시대다. 비평가가 '해석의 미학'이나 '구조적 결함' 같은 박제된 언어를 나열하는 동안, 대중은 15초짜리 숏폼 영상과 포털의 별점 한 줄로 작품을 판단한다. 미학적 통찰보다 별점 테러와 팬덤의 화력이 작품의 운명을 결정짓는 더 강력한 변수가 되었다. 비평가는 성채에 갇혀 자기들만의 리그를 벌이는 고립된 섬이 되어버렸다.
결국 비평의 쓸모를 묻는 일은, 역설적으로 그 무용함을 먼저 선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대중에게 미학적 세례를 줄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대중은 가르침을 원하지 않으며, 자신의 취향이 비평가의 펜 끝에 재단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천만 관객의 뒤에 흐르는 거대한 심리를 읽어내지 못하는 비평은 활자화된 독백에 불과하다. 지금의 비평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박물관 유리장 안에 갇혀 과거의 영광만을 곱씹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평의 목적은 사물을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사물 안에 투영하는 것이다."
- 오스카 와일드, 「예술가로서의 비평가」 중
그럼에도 비평의 쓸모를 이야기하고 싶다. 비평이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적 행위임을 역설한 사유들은 제법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비평가를 예술가보다 더 예술가다운 존재로 격상시켰다. 비평은 대상 작품을 재료 삼아 비평가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비평의 무용함이 광장의 상식이 된 시대일수록, 비평의 쓸모를 묻는 질문은 더욱 시급해진다. 비평은 이제 권력으로서의 심판이 아니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려주는 해상도 조절 장치로서 그 실용적 효용을 발휘한다. 문화와 예술의 지형이 소비자 중심으로 쏠리는 오늘, 비평의 구체적인 쓸모를 짚어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알고리즘이 추천하지 않는 것들
알고리즘은 우리의 취향을 복제하고 강화한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추천 시스템은 우리가 좋아할 법한 것만 끊임없이 내놓으며 취향의 감옥에 가둔다. 비평의 첫 번째 효용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비평은 알고리즘이 추천하지 않는, 그러나 반드시 마주해야 할 불편한 걸작을 소개한다.
〈파묘〉(장재현, 2024)가 천만 관객을 돌파했을 때, 대중은 오컬트 장르의 쾌감에 집중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그 밑바닥에 흐르는 풍수지리와 민족사적 트라우마의 겹을 들춰냈다. 단순히 즐기고 소비한 이미지 뒤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오락을 역사적·인문학적 사유의 장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이것이 비평의 실질적인 확장성이다.
대중은 대개 느낌만을 가지고 극장을 나온다. "재미있다", "지루하다", "불쾌하다"는 파편화된 감각은 언어를 얻지 못하면 금세 휘발된다. 비평은 이 막연한 감각에 이름을 붙여주는 명명(Naming)의 작업을 수행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2007)가 맨부커상 수상 이후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수많은 독자는 영혜의 기이한 행동 앞에서 당혹감을 느꼈다. 비평은 '가부장적 폭력에 저항하는 식물성 존재의 투쟁'이라는 해석의 틀을 내놓았고, 독자들은 그 문장을 빌려 비로소 자신의 당혹감을 이해로 치환할 수 있었다. 내가 느낀 감정을 설명할 언어를 건네는 것, 그것이 비평이 대중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선물이다.
자본의 논리는 자극적이고 휘발적인 콘텐츠를 선호한다. 비평이 사라진 자리는 조회수와 매출만이 지배한다. 비평은 그 거대한 상업적 조류 속에서, 흥행엔 실패했을지언정 반드시 보존되어야 할 미래의 고전을 감별해 낸다.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2003)는 개봉 당시 처참한 흥행 성적을 기록했으나, 비평가들의 집요한 지지와 재평가를 거쳐 한국 영화사의 독보적인 걸작으로 남았다. 최근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2025)로 재탄생하기까지 했다. 비평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그저 망한 영화의 목록에 묻혔을 것이다. 비평은 당장의 매출이 증명하지 못하는 잠재적 가치를 보증함으로써 문화적 다양성을 수호하는 방파제가 된다.
비평의 가장 현실적인 효용은 결국 감상자 자신에게 돌아온다. 비평가의 의견에 동의하든, "이 비평가는 뭘 모른다"며 분노하든, 그 과정에서 감상자는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을 정교하게 다듬게 된다. 비평은 정답이 아니라 거울이다. "나는 왜 이 비평에 반대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대중은 수동적 소비자에서 능동적 주체로 거듭난다.
그럼에도 비평은 좀처럼 대중에게 닿지 못한다. 그 이유는 비평을 쓰는 쪽과 받아들이는 쪽, 양쪽 모두에 있다.
밀실의 독백과 광장의 소음 사이
비평이 대중에게 닿지 못하는 데는 두 방향의 실패가 있다. 하나는 너무 높은 곳에 머무는 실패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실패다.
평론가들의 언어는 종종 스스로를 가둔다. 씨네필의 레퍼런스, 학계의 술어, 평론집단 특유의 문체는 그 자체로 일종의 방어선이다. 지적 엄밀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적지 않은 경우 그것은 엄밀함이 아니라 구별짓기다.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쓰인 비평은, 내용이 탁월하더라도 광장이 아닌 밀실에서 울리는 독백에 가깝다. 비평의 권위는 난해함이 아니라 설득력에서 와야 한다. 깊은 것을 쉽게 쓰는 일이 훨씬 어렵다.
반대편의 실패는 더 소란스럽다. 유튜브의 영화 리뷰는 대개 두 시간짜리 작품을 십오 분으로 압축한다. 압축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 과정에서 작품의 결이 사라지는 것이 문제다. 플롯은 남지만 밀도는 날아간다.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전달되지만, 그것이 왜 중요한지는 묻지 않는다. 도서 리뷰도 다르지 않다. 훈련 없이 쓰인 서평은 줄거리 요약과 개인 감상의 혼합물에 그치기 쉽다. 비평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나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두 실패는 표면적으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구조는 같다. 하나는 독자를 배제하고, 다른 하나는 작품을 소비한다. 비평이 설 자리는 그 사이 어딘가다. 작품을 존중하되 독자에게 열려 있는 언어, 쉽게 흘러가지 않되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는 시선. 그것은 타협이 아니라 균형이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대목에서 장렬히 실패하기 위해서다. 자기계발서가 '노하우'를 알려줄 때 인문학 서적은 '노와이'를 알려주지 못한다. 인문학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에는 원래 답이 없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서평(Book Review)과 문학 비평(Literary Criticism)은 지향점부터 다르다. 서평의 일차적 목표는 정보 전달과 추천이다. 잠재적 독자에게 이 책이 읽을 만한지, 무엇을 담고 있는지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서평은 시장의 논리와 맞닿은 소비의 안내서다. 반면 비평은 작품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석의 지평을 확장한다. 비평가는 텍스트를 재료 삼아 당대의 시대정신과 미학적 흐름,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질문을 길어 올린다. 비평은 작품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때로는 작품이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을 먼저 예고하기도 한다. 서평이 "이 책을 읽어라"라고 말한다면, 비평은 "이 텍스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신춘문예나 각종 문학상이 문학평론을 독립된 분야로 두는 이유는 분명하다. 비평은 문학이라는 생태계를 지탱하는 지적 중추다. 작가가 창작으로 세계를 구축한다면, 평론가는 그 세계의 가치를 판별하고 언어화한다. 나아가 평론가는 개별 작품을 연결해 시대적 흐름을 만들고 담론을 형성한다. 그렇게 정교해진 사유의 언어는 다시 창작자에게 피드백되어 문학 전체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동력이 된다.
서평이 별점과 직관적 감상의 영역을 차지한다면, 비평은 고통스러운 사유와 논리적 추론이 필요한 이성의 자리에 있다. 서평이 친절한 지도라면, 비평은 깊은 숲속에 숨겨진 길을 찾아내는 탐사 기록이다. 정보가 과잉된 시대일수록, 파편화된 것들을 꿰어 의미로 만드는 비평의 통찰은 더욱 절실해진다.
오프너(Opener), 혹은 첫 번째 파도
오늘날 서평은 서점가의 기묘한 베스트셀러다. 정작 비평가는 고사 직전의 위기를 논하지만, 서평이라 명명된 텍스트들은 매끄럽게 포장되어 독자의 장바구니에 담긴다. 책의 골조를 해부하고 미학적 성취를 따지는 정공법 대신, 책을 소품 삼아 저자의 일상과 감상을 늘어놓는 사적 에세이들이 서평의 탈을 쓰고 시장을 점유한다. 대중은 왜 이토록 서평에 열광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지적 허영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자신의 자존감을 문학적 취향으로 위장하려는 현대적 심리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책은 읽기의 대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소유자의 지적 위상을 증명하는 사회적 화폐다. 서평이 잘 팔리는 이유는 독자에게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지적 효용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난해한 벽돌 책을 정독할 시간은 없지만, 그 책을 소재로 한 유려한 에세이를 읽는 행위는 나는 이런 사유를 향유하는 사람이라는 자존감의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사적 에세이로서의 서평은 작품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고통을 생략한 채 수면 위에서 반사되는 지성의 빛만을 수집하게 한다. 비평이 수행해야 할 고된 노동을 취향의 전시라는 달콤한 마약으로 대체한 결과다.
그러나 서평을 단지 허영의 도구로만 폄훼할 수는 없다. 비평이 작품의 골수를 파고드는 치열한 해부학이라면, 서평은 그 낯선 세계에 몸을 담그기 전 거쳐야 할 적응의 과정이다. 스쿠버 다이빙의 초급 과정을 오픈 워터(Open Water)라 부르듯, 서평은 비평이라는 거대한 미학적 장르로 다이빙하게 해주는 오프너(Opener)다. 심해의 압력을 견딜 장비를 갖추지 못한 이에게 무작정 심연으로 뛰어들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서평은 수면 근처에서 텍스트의 질감을 맛보고 숨을 고르며, 저 아래 도사리고 있을 미학적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입구다.
"문학은 이 오독의 빛에 의지해 인간이라는 심해로 내려간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신형철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평이란 어떻게 해야 정확하게 사랑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묻는 과정이다. 비평이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한 노력이라면, 서평은 사랑에 빠질 준비를 시키는 유혹이다. 진정한 서평은 줄거리를 요약하거나 개인의 감상을 늘어놓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독자가 스스로 잠수복을 입고 텍스트의 심연으로 다이빙하고 싶게 만드는 매혹의 기술이어야 한다. 사적 에세이의 형식을 빌리더라도 그 중심에는 항상 작품이라는 견고한 핵이 존재해야 한다.
서평은 비평의 문턱을 낮추되,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의 무게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좋은 서평은 독자의 지적 허영을 자극해 책을 사게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허영이 진정한 탐구심으로 변이하도록 유도한다. 수면 위의 물결에 매료된 독자가 문득 발밑의 어둡고 깊은 심연을 궁금해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오프너로서 서평이 완수해야 할 최고의 미학적 의무다.
서평이 광장에서 대중과 호흡하며 입수를 권유하는 목소리라면, 평론은 침묵 속에서 심해의 생태계를 기록하는 펜이다. 두 장르는 서로를 대체할 수 없다. 평론 없는 서평은 깊이 없는 유희로 흐르고, 서평 없는 평론은 관객 없는 무대 위 독백으로 고립된다. 결국 비평의 쓸모는 서평이라는 오프너를 통해 열린 문으로 독자가 걸어 들어올 때 완성된다. 서평은 비평의 적이 아니라, 가장 충실한 선발대이자 문학이라는 바다를 지키는 첫 번째 파도다.
잠항(潛航), 심해의 미학으로
서평이라는 오픈 워터에서 독자를 안전하게 잠수시켰다면, 이제 비평가는 독자가 수압을 견디며 심해의 미학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구체적인 가이드가 되어야 한다. 대중을 매혹하면서도 끝내 심연의 진실로 인도하는, 이른바 잠항적 서평이다.
서평이 사적 에세이로 기능하며 잘 팔리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화 비평으로 나아가려면 개인적 감상을 보편적인 시대적 결핍으로 치환해야 한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위로받았다"는 서술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는 왜 지금 이 작품이 던지는 위로에 이토록 취약해졌는가"라는 질문으로 전이해야 한다. 사적인 감각을 사회적·철학적 맥락으로 확장하는 순간, 독자는 시대의 징후를 읽어내는 비평적 체험을 시작하게 된다.
"정신분석학의 용어인 '전이(transference)'는 상대방이 뭔가 중요한 말을 할 거라 믿으면 정말 그의 모든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현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제 비평가들에 대한 대중의 전이는 끝났다. 비평가들은 약육강식과 생존경쟁 시대에 유용한 진리를 갖고 있지 않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비기너들은 대개 감동적인 문장에 밑줄을 긋는 것으로 감상을 마친다. 비평적 서평은 독자의 시선을 문장에서 구조로 옮겨주어야 한다. 특정 문장이 왜 아름다운지 설명하는 대신, 그 문장이 배치된 위치와 서사적 장치들 간의 유기적 관계를 짚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소설의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작가가 초반부터 설계한 언어의 기하학임을 보여주는 식이다. 독자가 이 감동은 정교하게 설계된 미학의 결과라고 깨닫는 순간, 비평이라는 심해의 압력을 즐길 준비가 끝난다.
심해로 내려갈수록 수압은 높아진다. '아포리아'나 '알레고리', '명징'이나 '직조' 같은 개념어는 독자에게 질식감을 준다. 전문 용어를 과시하기보다 그 용어가 담고 있는 현상을 감각적으로 번역해야 한다. 용어 없이도 개념의 본질을 전달할 수 있을 때, 독자는 두려움 없이 비평의 심연으로 잠항하게 된다.
서평이 이 책은 이런 내용이다라고 정답을 주려 할 때 비평은 죽는다. 일부 유명 서평가들이 스스로를 독서 전도사라 이야기하며 좋은 평만을 강조하지만, 세상의 모든 책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출판산업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 암묵적 동의가 지금의 문단과 출판의 빈약함을 키웠다. 비평적 서평은 독자의 마음속에 작지만 깊은 균열을 내야 한다. 완결된 해석을 제공하기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스스로 답해야 할 질문을 던지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주인공의 선택은 과연 정의로운가?" 혹은 "작가가 침묵한 이 공백에 우리는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하는가?" 그 질문이 독자를 수동적 소비자에서 능동적 비평가로 변화시킨다.
오픈 워터 과정을 마친 독자는 이제 비평가라는 버디(Buddy—다이빙 동반자) 없이도 스스로 문학의 심해를 탐험할 근력을 갖추게 된다. 비평의 쓸모는 비평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데 있지 않다. 독자가 더 이상 비평가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텍스트의 심연에서 진실의 조각을 건져 올릴 수 있게 돕는 것. 그것이 비평이라는 장르가 존재하는 가장 겸허하고도 위대한 목적이다.
비평가여, 광장으로 내려오라
대중의 호기심이라는 원초적 욕구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저 유행과 미숙함이라고 폄하할 일이 아니다. 이미 사회는 자본과 기술의 권력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이를 거스르는 구식 저항이 아니라 매끄럽게 이용하는 신식 반도체가 필요한 시간이다.
"그렇다면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한 입소문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영화가 좋다, 나쁘다였을까, 혹은 영화가 재미있다, 재미없다였을까. 그 어느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도대체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을까'라는, 궁금증 자체였다. 〈왕과 사는 남자〉가 만들어 낸 천만 관객의 키워드는 바로 '대중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 아르떼 〈궁금증이 만든 천만영화...'왕과 사는 남자'의 비밀〉, 오동진 평론가
최근의 천만 블록버스터와 수십만 부의 베스트셀러가 거두는 성공은 비평적 찬사와 무관하다. 오히려 비평가들이 무시하거나 저평가할수록 대중의 결집력은 강화되는 기현상마저 벌어진다. 이 동력의 핵심은 호기심과 FOMO(Fear Of Missing Out)다. 대중은 비평가가 추천하는 내밀한 걸작보다, 내일 아침 단톡방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남들이 다 본 그 영화를 선택한다. 비평이 어떤 작품이 좋은가를 묻는 동안, 대중은 어떤 작품이 지금 뜨거운가를 묻는다. 비평가가 작품의 질을 측정하는 저울을 닦고 있는 사이, 시장은 이미 알고리즘과 군중심리에 장악되었다.
비평가의 권위가 실종된 시대, 비평의 첫 번째 생존 전략은 어디에서 말할 것인가에 대한 응답이다. 신문 지면이나 두꺼운 계간지의 성채 안에서 대중을 내려다보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대중이 머무는 광장으로 내려와야 한다. 이는 비평의 수준을 낮추는 타협이 아니라, 전달 방식을 재설계하는 큐레이션으로의 진화다. 〈기생충〉(봉준호, 2019)이 칸과 아카데미를 석권했을 때, 대중은 비평가의 긴 논문보다 유튜브의 짧은 분석 영상이나 레터박스(Letterbox)의 한 줄 평에 더 열광했다. 비평가는 이제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아니라, 대중이 작품이라는 숲을 헤매지 않도록 돕는 탐험 파트너로 거듭나야 한다.
두 번째 전략은 언어의 온도를 바꾸는 것이다. '아포리아', '헤게모니', '탈구축' 같은 박제된 개념어들은 대중과의 대화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복잡한 미학적 현상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것이야말로 비평가의 진정한 실력이다. 신형철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비평을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한 노력이라 정의하며, 비평의 언어가 어떻게 독자의 심장에 가닿을 수 있는지 증명했다. 독자가 느낀 막연한 감동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 대중이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지점을 정확히 타격하는 명료한 문장이야말로 비평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마지막으로 비평은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적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알고리즘은 통계로 말하지만 비평은 영혼으로 말한다. 〈퍼펙트 데이즈〉(빔 벤더스, 2023) 같은 느리고 긴 영화가 대중적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알고리즘의 추천 덕분이 아니라, 그 영화 속 상실과 회복의 서사를 집요하게 읽어낸 비평가들의 인간적인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평은 결국 혼자 쓰는 것이지만, 혼자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비평가는 작품과 독자 사이의 공백을 응시하며 그 공백에 다리를 놓으려는 사람이다. 다리가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건너갈 수 있으면 된다. 천만 관객이 몰린 영화도, 단 한 줄의 서평도 없이 절판된 소설도, 비평의 눈앞에서는 동등한 물음표다. 비평은 성공을 확인하거나 실패를 단죄하는 법정이 아니다. 작품이 세상에 던진 질문을 받아 적고, 그것을 다시 독자에게 건네는 중계자다. 중계는 조용한 일이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된다.
"느리고 신중한 의견은 이제는 아무도 없는 광장에 너무 늦게 도착한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시대가 빠를수록 비평은 느려야 한다. 알고리즘이 취향을 예측할수록 비평은 예측 바깥을 가리켜야 한다. 군중이 같은 방향을 볼 때, 비평은 반대편이 아니라 군중이 미처 보지 못한 측면을 본다. 그것은 반항이 아니라 보완이다.
재미있으면 그만이라는 말, 틀리지 않다. 다만 비평은 그 옆에 조용히 앉아 이렇게 묻는다. 그 재미가 당신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좋다. 한 번쯤 들어보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비평의 쓸모는 거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