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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 없이 다가오는 "상실의 시대"

지금 우리 학교는(2022, All of us dead)

by 박 스테파노


제대로인 K-좀비가 나타났다


영화, 드라마 시리즈의 장르는 이전보다 세분화되고 파편화되고 있다. 심지어 각 영역의 장르들이 융합을 하면서 새로운 장르나 변용되는 파생 장르를 지속적으로 창출하고 있는 것이 요즘 영화판이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영화의 장르를 물어 오면 서슴없이 말하는 장르가 “좀비물”이라고 대답한다. 비단 영화뿐 아니라 소설이나 웹툰도 좀비 이야기라면 빼놓지 않고 찾아보고 미국 유명 드라마 <워킹데드>를 필두로 연이은 시리즈의 공개를 기다리며 완주하기도 하였다.


마음속에 기묘한 기질이 숨어 있어서 그러할 수도 있지만, ‘좀비’에 의해 유린되는 일상을 보고 있노라면 한 편의 안도감과 다른 한 편의 불안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이 개인적인 관심을 끌어당기는 요소이다. 애써 가면으로 감추어 온 인간 본연의 욕구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빙빙 둘러 이야기할 수 있는 배설구 같은 장르이기에 내 개인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을 골라 든 것도 큰 고민이 없었다. 단, 한 가지 우려가 있었다. 최근 개봉, 방영한 K-좀비ㆍ포스트 아포칼립스ㆍ디스토피아 물에 대한 실망이 앞장서고, 웹툰, 그것도 10년이 훨씬 지난 웹툰을 원작으로 삼은 것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감이 뒤서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면서, 그 우려는 방구석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무릎을 탁 치며 "그래 이것이 좀비 장르지!"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오게 되었다.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


"좀비"라는 장르가 있어?


영화나 티브이 쇼의 좀비 장르는 1930년 대 등장한 <화이트 좀비(1932)>로부터 시작한다고 전해지는데, 실제로는 좀비 영화의 모태가 된 조지 A 로메로의 '좀비 3부작'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 <시체들의 새벽>(1978) <죽음의 날>(1985)에 이르러서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의 거의 모든 것이 완성된다. 알듯 말 듯 한 이유로 깨어난 시체들, 어기적 어기적 움직이며 탐욕스럽게 인육을 찾아 헤매는 좀비들, 좀비에게 물리면 다시 좀비가 되는 사람들, 사랑하는 이가 좀비가 되었을 때의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바이러스처럼 증식하며 다가오는 종말의 공포, 매스미디어와 세상의 소위 “트렌드”에 중독돼 주체적인 사고력을 잃은 현대인에 대한 은유, 좀비보다도 야비하고 잔인한 인간에 대한 절망 등등 좀비"장르"의 모든 것이 '좀비 3부작'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시체의 밤>

이렇듯 ‘좀비물’은 20세기가 되어서 만들어 낸 최신의 현대 주류 장르라 할 수 있다. 하드고어적인 식육의 작면이나 구토와 오심을 유발하는 좀비들의 외모, 그리고 지각과 감정이라고는 없이 그저 단순한 욕구에 의해 이리저리 ‘떼’를 지어 다니는 좀비들의 모습으로 장르적인 메시지 전달의 주된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풍자’ 일 것이다. 인간을 풍자하고 그 인간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와 세상을 풍자하며, 그것을 목도하는 제삼자 인척 하는 관객들의 이중적인 생각들을 풍자하는 것이다. 좀비물에 어처구니없는 "쓴웃음"을 유발하는 기괴한 웃음코드가 상존하는 이유가 된다.


좀비 영화에서 시체들이 깨어나고, 좀비에게 물리면 다시 좀비가 되는 악순환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끔찍한 공포이다. 개인적인 공포 호러물이 아닌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공포물에는 ‘재난영화’들이 어느새 제법 자리 잡고 있다. 사회적 공포는 사실 뻔한 주제와 드라마로 펼쳐진다. 흔히 '아포칼립스'라는 이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공포'로 대변하며 이야기한다. 이러한 공포에 대한 경험과 포커스가 이전의 공포영화에서 이동ㆍ전환하고 있는 증거가 ‘좀비물’의 창궐이라고 할 수 있다.

"좀비 영화"라고 검색하면, 어마무시하다

<인디펜던스 데이>, <월드워> 등 ‘외계로부터의 침공’이 대변하는 ‘외부로부터의 공포’에서 ‘내부로부터의 공포’로 이동된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이전 드라큘라나 뱀파이어물부터 몬스터가 등장하는 공포물도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공포로 작용한다. 평온한 사회를 위협하는 것은 ‘공산주의’나 ‘파시즘’ 같은 외부의 공포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좀비는 죽음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시작된다. 좀비에게 물리지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내 옆의 가족과 이웃이 좀비가 될 수도 있다. 내 가족이고 이웃이었던 사람들은 좀비가 되면 어떠한 대화도 가능해지지 않게 된다. 대화가 불가능한 비이성적 비감성적 존재가 되어 버린다. 아무런 교감도 없이 살아 있는 사람의 살점만을 탐욕하는 잔인한 좀비들은 어떤 무엇으로 막아 내기 힘들다. 십자가나 은총알, 마늘도 소용없고 독실한 퇴마 사제의 기도도 소용없으며, 머리를 조준하지 않는 한 인간의 무기도 무용지물일 뿐이다. 막 다른 곳에 몰리면 방법은 둘 중 하나만 남는다. 좀비가 되던지 자신의 머리통을 스스로 날려 버리던지.



왜 지금, 오늘 ‘좀비’인가?


심리학자 메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피라미드 모양의 바닥의 욕구부터 그 위로 상향할수록 가치를 부여하는 욕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설명한다. 가장 첫 번째 욕구는 ‘생리적 욕구’이고, 2단계가 ‘안전의 욕구’, 3단계가 ‘소속, 애정의 욕구, 4단계‘존경의 욕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아실현의 욕구’로 구분되며, 하위의 욕구가 충족돼야 상위의 욕구가 실현 가능해진다는 이론이다.

메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


‘좀비 장르’에서는 하위의 두 가지 욕구만이 남게 된다. 신선한 살점을 찾아 물어뜯어 먹어야겠다는 욕구와 그에 반해 좀 잡을 수 없는 이 위협들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가는 두 가지 욕구가 충돌하며 이야기를 끌어낸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자아실현과 존경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는 인간의 군상들이지만 실제로 처연한 바닥의 상황에서 라면 그저 두 개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극도록 이기적이 되고 선과 악의 경계를 마음대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은 이러한 좀비 장르의 전형적인 코드들을 담아내고 있다. 각자의 삶의 모습으로 다양한 군상으로 하루를 학교에서 보내는 학생들이지만, 바이러스가 퍼지고 감염자가 생기면서 이들의 고민과 궁리의 목적은 단순하게 이분되어 버린다. 아직 감염되지 않은 자를 물어뜯거나, 감염된 좀비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서 안전한 피난처로 도달하는 것, 이 두 가지 이외에는 어떠한 욕구도 개입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좀비물에서는 복잡한 심리적인 교착이나 애정의 전선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연상호 감독의 3부작 <부산행>, <반도>, <지옥>이 간과한 지점). 각자의 삶의 모습을 살짝살짝 보여 주면서 다양한 군상들이 결국은 이 본능적인 모습으로 귀결된다고 무뚝뚝하게 말할 뿐이면 된다.

본질에 집중한 정통 "좀비물"


수도권 변두리 작은 도시 효산시의 사람들이 하루를 살아 거는 방법과 목적은 다양하였을 것이다. 홀로 키우는 딸을 위해 구급대원의 고된 업무를 묵묵히 하는 아버지부터, 외아들을 끔찍이 사랑해 새로 개업하는 치킨집에 아들의 이름과 얼굴을 박아 넣은 엄마, 하루하루가 또 같은 듯 다르게 마주하는 늘 불행하다 푸념하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일상을 메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좀비와의 사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는 이들에게 이전의 목적은 소멸되어 버린다. 그저 생존하거나 생리적으로 욕구를 채우거나 두 가지의 이유만 남게 된다. 그들이 사는 방법이 업무던지, 노동이던지, 공부이던지, 삥 뜯기 던 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좀비 장르에서 좀비나 살아남은 생존자나 이러한 본초적인 ‘욕구’를 드러내게 되고 이 욕구를 이루기 위한 과정 속에서 사건들과 대치가 일어나게 된다. 생존자들은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디인가에 있을 ‘안식처’와 ‘치료법’을 찾고자 한다. <나는 전설이다>에서 주인공이 AM방송을 틀며 생존자를 찾고 다른 생존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도 이러함이고, <레지던트 이블>에서 생존자들이 모여든 바다 위의 큰 요새도 이러한 목적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감염된 좀비들은 스스로의 욕구는 아니지만 바이러스나 숙주가 요구하는대로 남은 생존자를 감염시키며 인류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 물어 버리고자 개떼처럼 몰려다니기 일쑤이다.


문제는 살아남은 생존자나 감염된 좀비나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에 진짜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학교 밖”이라는 일상의 퇴교 길 목적지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생존의 목표가 되어 버린다. 그곳이 안전할지 나를 받아 줄지 알 수는 없다. 그저 이성도 감성도 없이 나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좀비만 되지 않는다면 지구 끝 어디라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한 사람이나 이미 죽어 깨어 난 좀비나 지금의 삶은 고단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소소한 재미의 한국의 좀비물


"대작"의 유혹을 물리친 소소하지만 단단한 드라마


잔인하기만 하고 결말마저 찝찝하기에 비주류 공포영화로만 작은 극장이나 비디오 샵에만 걸려 있던 좀비 영화가 21세기 들어 대중적인 장르로 부상하게 된 것은 대니 보일의 <28일 후(2002)> 이후가 아닐까 싶다. 초자연적인 설정이 아닌 인간의 인위적인 ‘바이러스(분노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는 ’ 28 시리즈’는 대중적으로 상업영화의 주류에 올려놓게 되었다. 이후 <시체들의 새벽>을 리메이크한 <새벽의 저주(2004)>가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나는 전설이다>, <레지던트 이블>, 그리고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월드워 Z(2013)>을 통해 좀비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공식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2009년 웝툰이 원작

이러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트화는 성패에 있어서 두 가지의 전제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금융공학의 정작용이 가능한 할리우드 영화처럼 막강한 물량의 투입으로 스케일을 잡아 버리던지, 아니면 긴 호흡을 가지고 큰 줄기의 이야기에서 많은 관점을 파생시킬 수 있는 소위 ‘드라마투루키’가 튼튼해야 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야기나 게임을 기반으로 긴 호흡의 시리즈를 기획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10년도 넘은 웹툰(2009 연재)을 드라마 메이킹한 <지금 우리 학교는> 은 "떡잎"부터 남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한국에서도 제법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주제의 영화ㆍ드라마들이 선을 보였습니다. 이런저런 작품들 열거 속에, 많은 관객들에게 회자된 것은 김은희 작가의 <킹덤>과 연상호 감독의 <지옥>을 포함한 자칭 3부작이 아닐까 싶다. 이 두 '거장'이 되고 싶어 하는 인기 스토리 텔러의 작품들은 크랭크인부터 요란했다. 엄청난 홍보에 호화 캐스팅, 그리고 언론과 평단의 띄워 주기까지 말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어라?" 하는 물음표만 가득 채우게 되었다. 무언가 "그럴듯한" 담론에 두껍게 형성되지 않은 철학과 세상에 대한 인사이트가 그저 "자의식의 향연"으로 끝나고 말아 버렸다. 감히 말하자면, 실패작들이다.


그럼 <지금 우리 학교는>은 왜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을까?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무명에 가까운 연출자가 신인배우들로 14년 전의 웝툰을 드라마로 만든다니, 누가 주목을 했을까. 나름의 이유와 준비가 잘된 작품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가장 장르의 문법에 충실한 "정공법"이 통한 것이다.

"자의식"만 가득한 "거장 병"


우선 <지금 우리 학교에서는> 에는 세상에 대한 풍자가 선명하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살아 있다. 집단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고교생들도 틀에 박힌 교복을 개성을 내어 입듯 각양각색이다. 전교 1등 학부모회 간부 딸 반장부터, 늘 2등인 과학 천재, 성적에 힘겨운 양궁부 에이스, 왕따 피해자, 학폭 가해자, 그리고 가난하지만 늘 친구들과 함께인 어디선가 만난 적 있을 것 같은 몸과 맘이 모두 건강한 녀석들 까지. 다를 것 없기를 바라는 그들의 모습은 다채롭다. '기생수(기초생활수급자)'라 놀리고, SNS를 통한 학교 폭력이 나고, 공부로 전국 100등이면 서울대를 가지만, 양궁으로 100등이면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엘리트 스포츠'의 현실도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학교 밖은 어떤가요? 늘 그렇듯 정치인들은 빠져나가고, 마지막 보루가 되는 군인, 경찰, 소방관만이 "소임"을 다할 뿐이다. 언론은 말해서 무얼 할까. 좀비가 득실 한 효산시로 슈퍼 챗을 노리고 들어 온 유튜버에게 형사가 왜 이런 지옥판에 제 발로 왔냐고 핀잔을 주자 대답하며 말한다.


"언론이 언제 진실을 알리는 거 봤어요?"
세상의 좀비보다 무서운 "사람들"

이렇듯, 드라마는 이 세상의 문제와 이슈를 "돌려 까지" 않는다. 세월호가 거론되고, 학폭위의 유명무실이며, 정치인들은 그저 당파적인 유불리를 계산하기 바쁘다. 10대라는 특정 계층의 관점을 무기삼아 몸사리는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 물론 원작이라는 최후의 방패가 있고, 다른 작품들 보다 제작비가 덜 들어간 것들이 대범함의 근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본과 세평, 그리고 흥행에 곁눈질 하며 더덕 더덕 아무도 알아 챌 수 없는 메타포의 향연을 그려낸 이전의 "유명인"들의 작품보다 용감하다. 이 용기가 "핍진성", 즉 가장 그럴듯한 혈실 풍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학교에는> 에는 좀비다운 좀비가 있다. 우리가 흔히 시쳇말로 ‘좀비 같은 삶’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자신만의 확고한 생각이나 목적이 없이 그저 ‘살기 위해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빗대어하는 이야기다. 이 세상에서의 좀비 같은 우리들의 모습은 ‘어기적’ 그리고 ‘의욕 없음’으로 대변된다. 원래 좀비 영화에서 좀비의 모습은 불편한 관절꺾기와 어기적 거리는 느려 터진 행동이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럴 것이 좀비는 본연 ‘시체’이기 때문이지요. 한 번 죽고 나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기본적인 욕구만 발휘된 채 몸을 다시 세우게 된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사후 경직이 오고 부패가 시작된 좀비들의 걸음은 어기적 거리기 일쑤이고 느려 터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초창기 좀비 영화가 저예산 B급 무비였기에, 동네 주민이나 아마추어 배우를 좀비로 사용하다 보니 동작이 어색하고 굼떴다는 분석도 있지만, 좀비는 본래 느려 터진 존재였다. 역설적으로 느려 터졌기에 그들은 무섭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느려 터진 그들이 이성의 각성 없이 살 냄새를 맡아 떼를 지어 느릿느릿 다가오는 모습은 사실 무척 공포스럽기가 끝이 없다. 갑자기 나타나는 번개돌이 유령보다 무서움은 배가되고 그들의 지치지 않은 느릿한 다가옴은 이내 도주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28일 후> 이후 상업영화의 장르로 편입이 되면서 화려한 편집에 후반 작업 그리고, 러닝타임 내내 몰라 붙여야 하는 블록버스터의 공식을 내재하면서 좀비들이 무척 빨라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좀비 같은 삶’은 알아차릴 만큼 ‘번쩍’하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부지불식간에 나를 물들이는 무력감, 원하지 않지만 어느새 99% 비주류에 속해 버린 내 모습을 어느 날 문뜩 발견하면서 삶이 공포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 학교에는>의 좀비는 "본연"에 충실하다. 몇몇 돌연변이를 제외하고는 '사고'나 '판단'하지 못한다. 청각, 시각, 후각에 집중하며, 새살과 신선한 피에 대한 욕구로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이내 목표물을 찾아 물어뜯고, 씹어 먹는다. 최근 좀비물, 특히 한국의 것들은 "직접적"인 좀비의 사냥과 피해를 묘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흥행 걱정에 본질을 버린 껍데기가 된 것이다.

가장 좀비스럽게 정공법으로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 학교에는>에는 ‘낯설음’이 가득하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드라마적 구성, 소설이나 연극, 영화에서 ‘낯설게 하기’는 무척이나 유용한 도구이다. 쉽게 말해 ‘뻔하게’ 유추되는 이야기들은 매력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김은희 작가나 연상호 감독의 작품은 "설명"이 가득 차 있다. 때로는 내레이션ㆍ자막으로 다른 때는 등장인물의 어색한 자세한 설명으로 말이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많은 관객이 쉽게 이해해야 하고, 때로는 그 관객들의 눈높이에서 이야기의 구조와 결말을 타협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드라마를 채워가는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디렉팅 역량의 한계도 분명하게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입니다. 장황한 담론이 "시대정신"을 억지로 만들 수는 없다.

설명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킹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에는>의 캐릭터는 '전형적'이다. 프로토 타입의 인물들이 자기의 자리를 뻔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회차가 거듭될수록 뻔하지 않습니다. 전형성은 극 중 캐릭터와 공감대를 쌓게 해 주는 효과가 있다. 이틀 밤 사이 벌어지는 생과 사라는 극한 갈림길 위에서 등장인물들은 너무나도 평면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그때 신묘한 "한수"가 등장한다. "뒤통수"가 그것이다.


누구 하나 그럴 것 같지 않은 캐릭터들이 예상을 벗어난다. 입체적으로 변모하고, 그 캐릭터와 쌓은 공감이 찝찝해 질만큼 낯설어 보인다. 멸시하던 급우가 친구들의 두둔을 받자 좀비의 피를 상처에 묻히고, 나중에 친구들이 그립고 미안해 나선 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담배를 찾는 아웃사이더는 의리 있는 쿨한 선배가 되고, 소개령을 내린 계엄 사령관은 책임감과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거둔다. 강력계 형사는 개그 캐릭터를 담당하고, 노안의 보잘것없는 의경은 '현역 입학 서울대 2학년생'을 커밍아웃한다. 가장 큰 낯섦은 철썩 같이 남주라 믿던 청산(윤찬영)의 죽음이다. 배신감마저 드는 뒤통수였다. (앗! 스포일러. 저도 뒤통수)

두 신인? 배우의 연기도 좋다


일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 상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무엇일까? 지진ㆍ화산 폭발 같은 천재지변? 전쟁ㆍ테러와 같은 인간의 광기? 살인ㆍ강간ㆍ폭력이 엄습하는 이 사회의 뒷골목? 아니면 끊임없는 청구서와 독촉의 전화? 이런 것들은 피하거나 해결 가능한 영역에 있거나, 나와는 먼 이야기로 들려 '공포'라기보다는 '불안'에 가까워 보인다. 진정 공포스러운 것은 "상실"의 공포가 아닐까 싶다.


상실에 대해서 여러 정의와 의견이 있겠지만, 상태의 설명으로 이야기하자면 불가항력 하고 복구 불가의 단절, 망실, 손해를 말할 것이다. 친구와 가족, 이웃이 좀비가 되어 사실상 "사망 상태"가 되어 버리고, 집과 학교는 도시 통제를 위한 소개로 불타 없어진다. 대학 진학을 위한 수능도 없어지고,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대회도 열리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의심"과 "불신"이라는 사회적인 전염병이 바이러스처럼 창궐되어, 더 이상 '믿을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상실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공포스러움을 넘어 무기력과 자포자기가 이어지는 무서운 "상실"이 퍼져 버린 것이다.

"상실"과 싸우는 분투기


"상실"은 여러 형태로 스며든다. 사고나 재해로 인연을 상실하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신체나 감각을 상실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짜"들에 의해 "진짜"가 받을 '기회의 상실'도 있다. 임상 상담 없는 유명 아동 정신건강 전문의, 자격증 없이 강하게 '길들이기'하는 가짜 개통령, 그리고, 어디부터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학력ㆍ이력의 '검증대상 공인'까지, 그들이 앗아간 기회는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돈과 영향력을 내세워 오히려 겁박한다. "다 없어집니다"리고 '공갈'로 상실에 대하 겁을 준다.


그런 요즘 비겁한 기득권의 '공갈의 행위’는 교묘하고 발전된 형태로 우리에게 결핍과 상실이라는 공포감을 주입시키고 있다. “우리는 진정성으로 무장된 대중이라 소용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 공포감은 실로 무섭게 스며들고 만다. 그리고 그 방법 또한 업그레이드하고 다양한 형태로 이종 변형(異種變形)하여 실체를 느끼기도 이전에 우리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을 조성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공갈의 위력은 대단함으로 작용한다.

상실의 예방은 "믿음"과 "신뢰의 연대"로


'상실'을 예방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아식별'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누가 좀비이고, 아닌지. 누가 물렸으나 돌연변이가 되었는지. 어른들은 정말 우리를 구하러 올 것인지. 친구를 믿고 손 잡고 뛰어내려야 하는지. 엄마의 모습만 믿고 따라가도 되는지. 이 모든 것은 "살아 남기"위한 최소한이 된다. 진짜 뉴스와 가짜 뉴스, 진짜 명장과 사이비 흉내꾼, 그리고 이 콘텐츠 산업에 진짜 "펀더멘탈"이라는 인프라가 있는지도 이제는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일상의 상실"은 예고 없이 다가 오니까. 종교, 역사, 정치의 담론을 애써 씌우지 않아도 충분히 공포스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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