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뒷 그늘
2024년 하계 올림픽이 프랑스 파리에서 개막을 앞두고 있다. 국가 규모의 국제 행사는 이제 더 이상 축제의 앞면 만을 생각하기 어렵다. 100년 만의 프랑스 파리 개최라는 기대를 앞세우지만, 정작 파리지엔들은 장기간 하계휴가를 틈타 2/3이 파리를 비웠다. 자신들의 주거지를 비운 이유는, 가뜩이나 오버투어리즘에 지친 파리지엔들이 더 몰려드는 올림픽 노매드를 견디기 어렵다는 생각이 커서다. 또한 여러 세계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고, 그 틈에서 자기주장을 위해 사건 사고를 일으키기 좋은 필요충분 조건이 갖추어진 까닭도 있다. 이렇듯 올림픽이라는 허울 좋은 잔치상 밑면에는 늘 어두운 그늘이 있다. 그래서 1988년의 기억을 소환해 본다.
기억 속의 88년은 화려한 날들이었다. 고교 진학을 한 가계는 살림을 주욱 펴서 교실에 에어컨을 달아 주는 반장 엄마를 두었다. 그뿐인가 제법 동네에서 이름 좀 흘려서, 밸런타인데이에 버스정류장에서 작은 팬미팅?을 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88 올림픽. 잠실에 위치한 8 학군 끄트머리 공립 고교생인 나와 친구들은 올림픽 핑계로 그야말로 학업을 놓았다.
성화봉송로 깃발부대로 시작한 올림픽 방학은 꿀맛 같았다. 체조, 역도, 육상 등 당시 비인기 종목을 공짜로 단체 관람했다. 군인 아저씨들과 좋은 자리싸움하던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마지막 마라톤 코스 박수부대까지. 교복 자율에 두발 자율, 그리고 자율학습의 자율이 잠시 작용하던 날들이었다. 터울 많은 동생을 둔 친구 녀석은 하교 후 막내 초등학생을 집에서 기다렸다는 진정 꿈의 학교 생활이었다.
올림픽이라는 국제 스포츠 이벤트는 이처럼 일상 깊숙이 영향을 주었다. 당시 시골 외가 동네에 가서 "잠실고"를 다닌다고 어른들께 말하면 반응이 미지근하다가도, "올림픽 열린 동네"라고 모친이 거들어 나서면 호응이 일었다. "좋은 학교 다니는구먼!"이라고 말이다. 뽕밭을 메운 주공과 시영 아파트들이 가득 찬 동네라는 사실은 알바가 아닌 게 되었다.
당시의 미덕은 힘든 티를 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소개보다 올림픽 한 단어가 먹히는 시대였다. 내 처지보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이벤트에 사명감과 책임감을 내 세우는 것은 도덕률처럼 되어 버렸다.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시 되는 것에 당연함을 느끼는 시대였다. 그때는 고교생인 나에게도 불편함 없이 스며든 생각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그 사명감에 대한 당연한 듯한 말본새와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대학을 가고 나서 어느 엉성한 영상물을 보면서부터였다.
88 올림픽을 앞두고 가난한 서민의 동네가 강제 철거된다.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전투경찰과 용역깡패들을 동원해 군사작전 같이 동네를 밀어내었다. 그곳이 노원구 상계동, 지금의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선 그곳이다. 이창동의 <녹천엔 똥이 많다>를 읽었다면 알겠지만 그곳은 일명 달동네였다. 달동네는 산업화의 그늘이 만든 산물이었다. 서울로 몰려든 상경 노동자들이 무허가로 집을 짓고 주거촌을 형성한 곳이 달동네다. 그 달동네에서 내몰린 세입자를 위한 주거 정책은 있지도 않았고, 차후를 위해 있을 계획도 없었다.
<상계동 올림픽>은 특별한 편집 없이 날 것의 필름이었다. 다소 주관적이고 편입견 가득한 시선으로도 보였다. 흔들리는 핀트와 프레임은 지나고 보니 그때의 처절한 다급을 대변했는지도 모르겠다. 정부는 아무리 애써도 갈 곳 없는 이들이 겨우 터를 잡은 곳. 그렇게 정 붙여 살던 곳을 무자비하게 부숴 버렸다. 그 포악한 철거반과 상처 피 흘리며 저항하는 철거민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폭력은 낡은 필름을 뚫고 나올 듯했다. 어찌할 도리 없이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그들의 울부짖음은 더 크게 들렸다. 그곳이 서울이라는 것에 더 놀랐다. 88년도 내가 살던 잠실에서 버스로 30분을 가면 닿는 동네여서 더 충격적이었다. 같은 도시 안에서 누구는 올림픽을 위해 시간 쪼개어 깃발을 흔들었고, 어떤 이는 피땀으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깨달음의 진동이 있다면 그때 느끼게 되었다. '모두의 축제'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의 의도 앞에서는 개인이 너무나도 힘이 없던 시절이었다. 절대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진 시기였다. 그곳의 사람들은 큰 욕심 없이 살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이유 없이 단죄를 당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서글프지만 사실이고 현실이었다. 겪어 보지 못한 불행은 함부로 견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그리고 현장 속으로 가고 싶었다.
대학시절 활동한 가톨릭 학생회 모임에서 이 처절한 다큐를 보았다. 88년에 메이킹된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1인 다큐는 충격적이었다. 소성당 창문을 암막 커튼으로 가리고 본 실상은 1980년 광주의 봄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로 만날 때와 같은 소름이 올랐다. <파업전야>처럼 초창기 독립 다큐멘터리가 그렇듯 상영할 장소는 성당ㆍ교회ㆍ대학이 전부였다. 이를 계기로 현저동 철거민 투쟁과 강남 구룡마을 재건 사업에 깊게 관심과 참여를 하게 되었다.
소위 학부모들의 워너비였던 목동은 상계동보다 이전인 1983년 똑같은 철거의 상처가 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대의 '광주대단지', 성남 구시가지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살림이 나아져 그럴듯한 집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을까? 그럴 가능성은 로또 당첨 확률보다 낮아 보인다.
1995년 서대문 안산 밑의 현저동, 소위 '옥바라지 골목' 윗동네에서 만난 분들을 2012년에 강남 구룡마을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밀려 밀려 결국 무허가 판자촌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린벨트 비닐하우스를 전전하다가 강남 보금자리 개발로 '마지막 층'이라는 구룡에 들어와 자녀를 키우고 손녀를 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가난은 지긋지긋한 대물림이 관성인 듯했다.
88 올림픽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보살필 이웃이 아니라, 치우고 감추어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외국 관광객, 방문자, 외신들에게. 양평동 철거민들의 복음 자리 마을,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당산동, 사당동 철거민들의 한독 마을, 목동 철거민들의 목화연립에 살던 사람들도 또 같은 이유로 쫓겨났다. 이들이 살던 곳도 역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까? 아니면 어디로 갔을까?
현저동 활동 때 군대 휴가를 받아서도 방문을 했다. 당시 군연초인 88 담배를 챙겨 동네 어르신들과 장기를 두곤 했다. 당시 독립 포대에서 태권도 시간마다 전우들의 머리를 깎아 주며 담배를 이발비로 받아 둔 것이 요긴했다. 이렇게 개발 이전 살던 대부분의 사람은 서울 밖으로, 간신히 서울 끝 판자촌으로 밀려났다. 정부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런 일들이 계속 진행 중이다. 철거는 진행 중이다.
철거민들의 투쟁은 잇권 사업과 엉키게 되었다. 집을 소유한 소유주와 세입자는 물론, 투기꾼들과 시민단체 사회운동가 등 여러 이해관계가 불안하게 성겨 붙어 있다. 서로는 불신하기 일쑤였고, 갈등으로 다투기 십상이 되었다. 집을 어떻게든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용산의 비극이 일어나고 구룡 마을에선 세력다툼으로 방화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 상계동이 위치한 노원구는 거대한 인구 밀집지역이 되었다. 선거철에 인기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30년이 넘은 아파트의 재개발이 이야기된다. 다시 이곳에서 누군가는 밀려나고 누군가는 버티다 사달이 날지도 모르겠다. 성남의 구도심은 정비사업이 되고 있을까? 똥이 많던 녹천 위의 이 콘크리트 마을은 다시 생기를 찾을까? 그 이웃들은 어디에 있을까... 내 고향 서울은 아직도 그늘이 깊게 드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