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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Jul 28. 2024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2016)

삶은 당신이 잠들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

소아외과 전문의 수현(김윤석)은 캄보디아 의료 봉사길에 눈먼 노인으로부터 신비한 알약을 얻는다. 노인의 말로는 이 알약을 먹으면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시간이 여행이 가능하다 한다. 믿거나 말거나 손해 볼 일은 없어 보이기에 수현은 알약을 삼키고, 정말 노인의 말 대로 30년 전의 자신(변요한)과 마주치게 된다. 과거의 자신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수현은 오로지 한 가지만 바라며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계속한다. 문제는 오랜 시간 머무를 수 없다는 것과 알약은 열 개뿐이라는 것이다. 열 번의 시간여행을 통해 수현은 그토록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을까? 그 소원 같은 일은 과거를 바꾸고 현재의 나를 바꾸지는 않을까?


점, 선, 면, 그리고 시간


상당수의 창작된 가상의 이야기는 ‘만약에 ~이라면’이라는 상상과 공상의 플롯을 잠재적으로 내포하곤 한다. 이런 상상과 공상이라는 플롯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문학작품은 물론 영화에서도 시간여행은 이야기를 엮어 가기 좋은 소재인 것은 분명하다. <백 투 더 퓨쳐>, <시간여행자의 아내>, <나비효과>처럼 흔히 상상하기 쉬운 시간여행을 직접소재로 사용하거나, <어바웃 타임>, <이프 온리>, <사랑의 블랙홀>처럼 되돌리고 싶은 순간을 위한 마법의 묘약 같은 사랑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이터널 선샤인>, <첫 키스만 50번째> 같이 직접적인 시간여행은 아니지만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 같은 함의를 내포하는 영화도 상당수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지나간 순간을 다시 고쳐 잡는 상상은 문학이나 영화의 콘텐츠가 아니더라도 멍 때리는 우리네들의 상상의 커리큘럼에 고정 메뉴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것들은 되돌려지지 않는다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인간의 아주 작은 항거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시간’의 힘은 엄청나고, 거역할 수 없고, 그리고 무섭기까지 하다.


‘시간’에 대한 아쉬움은 하루의 단위를 86,400초로 쪼개어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과거의 사람들보다 더 절실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개념이 일상에 얼마나 점유하고 있는가 차이로 설명될 수도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에 대해 가장 설명하기 쉬운 것도 ‘시간’의 의미이다. 쉽게 생각해서 시계를 생각해 보면 된다.


아날로그시계는 시침, 분침, 초침의 바늘이 시간의 원주를 시계방향으로 일주하며 모든 ‘면’을 점유하며 그 면의 크기로 시간을 설명한다. 그러나 디지털시계는 면의 개념이 아니라 바로 그때 그 시간, 즉 ‘점’에 대한 개념으로 시간을 이야기한다. 0이거나 1인 컴퓨팅 시퀀스가 대표적인 디지털 시간 개념인데, 멀리서 보면 선이나 점처럼 보이지만 미시적으로 가까이 다가서서 보면 모든 시간은 그저 점으로 존재하고 설명된다. 과학이나 컴퓨팅 공학의 기본적인 개념이야기를 꺼내어 낸 것은 ‘시간여행’이라는 것이 바로 이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딱 한 번만’이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


영화에서 2015년의 수현은 30년 전의 사건을 마음속에 묻어 놓은 채 시간을 보내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 연아(최서진, 김성령)를 잃었기 때문이다. 본인의 잘못이라 자책되기에 그 일을 되돌리고 싶은 것이다. 아니 처음에는 그저 딱 한 번만 그녀를 보기만 해도 좋을 것만 같다. 묘한 노인으로부터 받은 신비한 알약이 시간여행을 실현시켜 준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수현은 그날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지나온 시간들의 점유된 ‘면’은 무시하고 그저 그 ‘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시간을 ‘점’으로 오역을 하는 순간 과거의 그 점의 변환은 이후의 시침이 지나가는 면들에 영향을 주고, 지나 온 30년은 헝클어져 버리는 것이다. 30년 전 연아를 찾게 되면 20년 동안 삶의 전부였던 사랑하는 딸 수아(박혜수)의 존재는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수아를 지키려 보면 연아와의 인연은 어떤 이유이든지 단절되어야 한다. 삶이라는 것은 사람이 잠들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이라는 캄보디아의 묘한 노인의 말처럼, 결정짓기 힘든 선명한 선택지를 두고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다.  


“행복했을 때만 생각해.
그 기억만으로도 살아져”


딸 수아가 보고 싶은 사람을 앞으로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아빠 수현은 대답한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기억만이라도 행복하게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누군가는 살아 헤어지기보다 죽어 못 만나는 것이 맘이 덜 아프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살아가고 살아 내는 것이 죽어 없어지는 것보다는 나은 일일 것이다. 만날 수 없다면, 행복했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떠 올리고 그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답일지도 모른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살아온 만큼 살아가면 백 살이 넘어가는 나이에도 이따금 시간을 되돌리는 공상을 하게 된다. 대부분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부끄러운 일의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거나, 아쉬움이 가득한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제대로 된 좋은 이별을 그려 보기도 한다. 그런 생각들은 불과 몇 달 전의 일들부터, 몇 해 전으로 그리고 30대 시절로, 20대 청춘 그때로 입시와 입사의 시점으로 점점 더 뒤로 달려가기 마련이다. 이런 생각의 역진의 끝은 결국 내 탄생에 대한 회의와 의구로 마무리되니 그다지 유쾌한 공상은 아니라는 결론으로 접게 된다.


영화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많은 시간여행 영화가 그러하듯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그 행복한 결말이라는 것이 지나온 과거를 모두 뒤집는 것은 아니다. 지나온 시간은 시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때 그렇게 살아온 것도 그 이유가 다 있을 것이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지금 이 순간도 내일이 되면 되돌리고 싶은 어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몇 해가 지나면 아련한 추억이나 아찔한 과거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하나로 남는다.  


타고난 사랑꾼이라 생각해도 몇 번 되지 않은 사랑의 결말을 무겁게 마무리 짓곤 하기 십상이다.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지나온 시간들이 되고 만다. 무거운 마음의 무게에 비례해 시간은 점점 가속을 붙이고, 어느새 주름이 자글거리는 중년의 문턱을 넘어 가운데 들어서는 것이 인생 아닌가. 해가 바뀌고 나이가 늘어 가면서 두려움이 앞선다. 살아가는 상황에 대한 자신은 가득한데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사랑함’에 둘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여러 번 거울을 마주 보고 물어보기도 한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면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런 중에 영화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내게 무언의 동조를 주었다. 아니 영화를 보면서 내가 나에게 동조하며 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먼 훗날 오늘의 이 점 같은 순간에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답을 한다.


지금 여기, 바로 그대 사랑하겠노라고.


p.s 기욤 뮈소의 원작 소설을 읽어 보고 싶은 마음 가득이다. 문학과 영화는 늘 상호 조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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