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와 금기의 문화
1980년대는 집안에 금은보화가 가득하지는 않았지만 살림이 펴지던 시기였다. 부친은 사우디 모래바람을 이겨내며 인편이나 배편으로 살림살이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작은 장난감 속에 롤렉스 시계가 들어 있었고, 파킨슨씨를 앓고 있던 할머니의 알부민 상자들도 들어 있었다. 해외 파견을 더 이상 이어 가기가 힘들어 퇴직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컨테이너 하나 가득 온갖 물건을 실어 보냈다.
당시 유명했던 웨스틴하우스의 냉장고, 세탁기, 중공산 돗자리, 페르시아 양탄자들, 그리고 역수출된 포니 2까지, 집을 제외한 한 살림이 들어 있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던 부친의 1호이자 마지막 유산 'Revox' 오디오가 닐데크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미놀타, 니콘 카메라들과 부속 장치들이 한가득이었다. 14인치가 대세였던 당시에 20인치 컬러 티브이와 함께 들어온 것이 'SONY 비디오 플레이어'였다. VHS와 베타맥스 버전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뒤로하고서라도 이 비디오 플레이어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선사했다. 극장에서도 볼 수 없었던 영화들을 만나는 순간은 내 인생에도 깊숙이 영향을 남기었다.
이제 사춘기가 막 시작되던 남자아이에게 관심사는 자연스레 '어른들의 비디오'에 쏠리게 되었다. 시골 장례 참석차 자리를 비운 부모님의 안방 장롱을 수색하여, 잘 개어 놓은 솜이불 사이에서 찾아낸 비디오테이프는 선악과를 손에 쥔 아담의 심정을 가늠하게 해 주었다. 부모가 아이에게 감춘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소위 성인용, 지금의 19금, 청불의 테이프는 왕성한 사춘기 남자 형제들에게 수음의 상상만 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금지하는 모든 것은 대체로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세상을 처음 접한 나이가 고작 열하고 셋이었다.
당시 비디오물을 만드는 프로덕션이 활성화되지 않아 정식 유통보다 무단복제의 무단 유통이 성행되었다. 비디오 샵도 없던 시절 단골 사진관 한편에서 꺼내 주던 신보들 중 '부모님 것'이라는 특별 봉인의 테이프가 있었다. 주로 성애 장면이 노출된 영화들이었다. 미국의 B급 갱스터부터, 프랑스의 작품성 가득한 에로티시즘, 그리고 아주머니들의 입을 타고 유행하는 작품들. 그중 이불 사이에서 떨어진 테이프에는 파란 사인펜 글씨로 제목이 쓰여 있었다. '차타레 부인'이라고 적힌 테이프 속의 영상은 얼굴이 달아오르고 오금이 저린 장면들도 제법 되었지만, 그 안의 몽환적인 음악과 희뿌연 안개 같은 배경은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1928년에 집필된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문학계에서 유명한 작품이다. 작품성이나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외설' 논란으로 유명하다. 일각에서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더불어 '외설 논쟁'의 대표작으로 불린다. 또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 플레베르의 <마담 보바리>, 그리고 서머셋 몸이 쓴 <인생의 베일>과 함께 '5대 불륜소설'이라고도 이야기되곤 했다.
이 작품 출판의 역사는 소설이 겪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다. 1928년 작가가 만년작으로 개인적으로 출간한 이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 외국에서만 줄곧 유통되었다. 그가 죽은 후 30년이 지난 1960년에 펭귄 사가 최초로 이 작품을 영국에서 출판해서야 무삭제 원어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라나, 펭귄 사는 1959년에 발효된 음란저작물 금지법에 따라 고발 기소 당하고 만다. 수많은 유명 작가들이 피고 쪽 증인으로 출두한 끝에 재판에서 간신히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300만 부 이상이 팔려 나가며, 표현의 자유를 확대시킨 최초의 사회적 사건이 되었다.
금기를 극복한 역사 때문에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문학적 표현과 작품성 보다 생생한 성애 묘사로 유명해졌다. 이야기의 플롯은 논란에 비하면 단순하다. 주인공인 레이디 콘스탄스 채털리는 잉글랜드 중부의 부유한 지주 클리포드와 결혼한다. 작가이자 지성인에 귀족인 남편이지만 그녀의 결혼 생활은 허전하기 이를 때가 없다. 귀족의 마지막 명예 달성을 위해 1차 세계 전쟁에 참전한 남편이 척추 부상을 당해 하반신 마비의 휠체어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콘스탄스는 남편의 사냥터지기인 올리버 멜로스의 목욕 장면을 훔쳐본 계기로 정열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결국 멜로스의 아이를 임신한 콘스탄스는 남편을 떠난다. 멜로스와 콘스탄스가 잠시 떨어져 이혼을 하고 남편은 결국 재활을 성공해 일어서며 이야기는 맺어진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대학생이 되어 소설로 다시 만났다. 제법 긴 이야기가 만연하게 그려져 있지만 소설은 성애 소설, 외설 문학이라는 오명에서 그 진가를 찾기 힘들었다고 느꼈었다. 남녀 사이의 솔직한 성애 묘사가 있긴 하지만, 지금의 자극적인 콘텐츠에 비한다면 심심한 수준이다. 그 성애적 표현보다 여성이 성적 관계를 적극 원하고 만족감을 가감 없이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를 넘어 선 일이 되었다. 그때까지 영미 문학사에서 솔직한 성적 욕구와 섬세한 쾌락의 표출, 그리고 성관계에서의 만족과 실망 성취감을 그려낸 작품은 흔치 않았다.
작품에 대하여 "외설 논란"만이 부각되어 아쉬운 면이 있다. 문학작으로 명작이나 걸작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분명 역작이고 수작이기 때문이다. 신분제도에 대한 부조리, 남녀의 사회에서의 불평등, 그리고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그늘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문화와 사회, 그 속의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다시 영화, 당시 비디오 속 <차타레 부인>으로 돌아가 본다. 이 영화의 주인공 코니(콘스탄틴) 역은 당시 사춘기 소년은 안다면 다 알만한 '실비아 크리스텔'이 맡았다. 큰 키에 벽안의 관능미 가득한 여배우는 그야말로 당대의 섹슈얼 아이콘이었다. 네덜란드 출생의 176cm의 여배우는 미국에서도 X등급을 받은 <엠마뉴엘> 시리즈와 <개인교수>, <채털리 부인의 사랑>등에 출연하며 세계의 애로 시네마의 히로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2012년 후두암으로 타계한 그녀에 대한 이야기도 한 보따리가 된다. 선입견과 달리 IQ160이 넘는 5개 국어 능숙하게 구사하는 지적인 일상과 <엠마뉴엘> 시리즈의 미적 재평가와 영화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의 기회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실비아 크리스텔은 전성기가 한참 지난 1992년 <파리애마>에 출현하며 한국 영화와의 인연도 이어 나갔다.
사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한국의 에로영화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고결하고 정숙했던 아내가 성적 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관심이 없는 남편에게 성적 불만을 느낀다. 성적 능력만큼은 인정하는 불륜남과 간통을 저지르며 걷잡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른다는 플롯은 한국 애로 영화의 클리셰였다. 대표적인 <애마부인> 시리즈를 비롯하여 1980~90년대 에로 무비의 정석이 되었다. 아직도 이 플롯은 핑크 무비의 단골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이 현상은 한국 영상 산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기술의 베타맥스 버전을 누르고 상술의 VHS가 시장을 지배하면서 비디오는 "에로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비디오 대여점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에로물은 직접 창작 프로덕션(유호프로덕션 등)이 우후죽순 생겨 났고, 비교적 검열과 유통이 쉬운 수입 작품들이 공급되기 시작했다. 베타 버전의 소니가 비판하고 금지하던 성인 포르노의 공급망의 중심에 비디오가 차지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VHS'라는 싸고 보급 좋은 기술의 시대가 도래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3298197
스토리가 좀 복잡하면 허가가 안나다 보니 권선징악적인 뻔한 구도로만 작품을 만들었다. 직업묘사도 제한이 커 매춘부나 불특정「부인」이 단골주인공이 됐다. 반면 수입에로물은 「작 품성이 있다」는 이유로 검열폭이 넉넉하다. -인터뷰 기사 중-
에로물의 전성기는 '금기'를 강조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빅토리아 시대의 완고한 남성중심의 귀족문화와 시대상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외설적 성애 묘사로 우회로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서슬 퍼런 '검열의 시대'에 호스티스 장르와 에로 장르는 그저 구순기를 막 끝낸 혈기만 왕성한 아둔한 민중을 위한 최음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호스티스나 매춘녀처럼 노동의 계급 중 가장 밑단의 계층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회와 시대의 모습을 러닝타임 내내 보여준다. 검열은 그 살색에 눈을 팔고 통과시켜 주는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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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친의 몰래 비디오를 열어 보던 '야한 영화'로 영화 청년으로 거듭났다. 실비아 크리스텔의 <엠마뉴엘 시리즈>, <차타레(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보면서 성적 욕구 외의 또 다른 호기심과 탐구심이 깊어진 기억이 깊게 남았다. 폴 벤호건의 영화나 미키 루크의 뇌쇄적 야한 영화, 그리고 봉만대 감독의 재기 발랄함과 일본 영상산업을 살린 로망 포르노까지, 에로티시즘은 작품성과 예술적, 미학적 평가를 떠나 영화를 산업으로 연착륙시켜 준 역할이 지대했다고 생각한다.
-야한 영화로 사회를 이야기하다-
‘독자를 불편하게 할 것. 독자를 매혹시킬 것’.
좋은 문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프랑스 3대 출판사의 하나인 쇠유(Seuil)의 편집자는 위와 같이 답했다. 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때 최고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최고가 아니더라도 괜찮은 작품이란 최소한 둘 중 한 가지 조건은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선뜻 이해는 물론 동의하기가 어렵다. 특히 지난 문학사에 마광수와 장정일을 경험한 세대라 '외설'과 '금기의 한계 돌파'의 기준점은 늘 아슬아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외설(猥褻)이란 단어는 그 한자부터가 매우 난해한 단어이다. 외람할 외猥에 더럽힐 설褻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획수부터가 압박이다. '외람되오나~' 할 때의 그 외猥자에 '속옷을 드러낸다'는 의미의 설褻자의 단어 조어는 "사람의 성욕을 함부로 자극하여 난잡함"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음란, 선정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는 말은 사실 '자의성'이 지배하는 단어다. 그 기준이 저마다의 나름이기 때문이다. "전체를 보면 예술이고 집중해 보면 외설"이라는 시쳇말이 도는 까닭이다.
예술에서의 외설 논쟁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그리스 희극을 외설 희극이라고 하며 한 때 중세시대에 교회에서 금서로 삼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희극들은 성적인 농담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난잡하고 질 낮은 대사로 가득 차 있었다. 식욕, 물욕, 성욕으로 가득 찬 미물의 모습이 배우들의 가면에 그대로 표현되었다. 늘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그리스 남자들에 대해 섹스 파업을 하는 이야기도 들어 있다. 당시는 이것이 일상 다반사였다.
기독교 교리가 통치의 이념이 되고 금욕이 미덕이 되는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의 발목만 봐도 비도덕적인 세상이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그 시대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미덕은 윤리와 도덕의 기준에서 그럴듯한 정숙으로 치환되던 시대에 성애와 불륜은 세상의 기득권인 남성들이 그어 놓은 자의적 척도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마치 금기의 기준인 '금도'라고 칭하는 것도 그 시대의 지배자 남성들의 주장이었을 것이다.
미디어들에서 표현의 자유가 이야기된다. 보통 정치적 함의의 표현의 자유, 헌법에서 보장하는 자유, 그리고 사회적 미디어 콘텐츠에서의 자유를 언급한다. 그것은 엄밀히 "발언의 자유, freedom of speech" 다. 그 "자유"의 의미가 제각기처럼 보이는 것도 불편하지만, 더욱 눈을 감게 되는 것은 '표현'에 대한 협소한 생각들 때문이다. 키보드 앞에서의 내뱉는 배설들, 그리고 정치적 의도와 설정에 의한 의사 표시를 표현의 자유에 빗댄 것은 사실 한때 문학도로서 섭섭한 일이다.
표현은 인간의 실재하는 생각과 사유, 느낌과 상징을 그대로 표출하는 상징화의 작동이다. 그 표현은 보다 상층적이고 비유적인 고도의 함의가 응축된다. 예술의 표현이 그 결정채가 아닐까 싶다. 좌우, 내편 네 편을 가르는 표현의 논쟁은 그저 휘발적인 얕은 욕구의 반사작용일 뿐이다. 진정한 표현의 자유는 세상에 형성된 그럴듯한 통념이 매우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 불편함에 관심이 주목되어 끝내 매혹시키는 것이 예술의 의미가 아닐까.
세상 관심사가 온통 '힙하고 섹시한 무엇'에 쏠려 있다. 머리로 억지 이해한 텍스트들을 다시 타이핑하기 바쁜 세상이 되었다. 마치 제 것인 양 뽐내고, 그것이 거죽인지 알맹이인지 판가름하기도 전에 따라 한다. 자칫 뒤처질까, 따돌려 질까 걱정이 실체적 함양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늙수그레한 사람의 흰소리이지만,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넷플릭스도 빠르게 돌려 보는 세상이라지만 읽었으면 참 좋겠다. 책, 그것도 소설과 고전을 읽어 내었으면 좋겠다. <걸리버 여행기>와 <천공의 성 라퓨타>를 엮어내는 '진짜 맥락'을 짚는 세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표현의 자유에 외설, 불륜은 오래된 논쟁의 기록을 남겼다. 그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가치와 시대의 목소리를 뒤늦게 발견하기도 한다. <자유부인>이 주는 작품뿐 아니라 시대가 준 '대명사'의 의미를 이해하고,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읽어 내리는 여전한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해 반추하는 시간도 참 멋진 일이다. 살색 회면과 도덕적 편견에만 갇혀 있지 않다면 말이다.
*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책부터 권합니다. 2권이지만 그럭저럭 진도가 나갑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도 6권입니다. 이 또한 책부터 읽었습니다.
* 2022년부터 넷플릭스에서 리메이크작이 스트리밍 중입니다. BBC에서 만든 것, 기타 영화작품이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1981년 작을 권합니다. KBS 드라마 <차달래 부인>과는 혼동하지 마시길.
* 금서(禁書)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속 가능하다면 노력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