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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Aug 23. 2024

마침내,,, 결국, 이제야, 기어코... 사랑

헤어질 결심 (2022, Decision to Leave, 2021)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일반 관객보다는 평단에서 진동이 더 세게 울렸을 것 같다. 마음의 감동과 감탄의 여진이 진동이 되었을지도, 좋긴 하지만 섣부른 단정이 어려운 단체톡방에 진동이 계속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영화에 대한 수식 중 가장 흔한 수식이 '영화적인 영화의 진수'라는 수사이다. 영화면 영화지 영화적인 영화란 무엇인가. 식자적 우월감은 돈벌이가 되든 안되든 그들의 프로필이 뽕을 넣어 주기 마련인가 보다.


포스터 (사진=다음영화)

영화적인 영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작품 <영화는 영화다>라는 작품이 머리를 스쳤다. 도대체 '영화적인 영화'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영화는 서사의 예술이다. 이야기가 중심을 잡는 문화 예술 표현의 하나가 영화다. 이 영화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이야기를 진짜처럼 구현해 실제로 느끼게 만드는 것을 핍진성이라고 한다. 분명 이야기인데 그럴듯한 이야기를 장면 구성으로 펼쳐 관객의 시공간을 잠시 왜곡시키는 효과를 준다.


또 한 가지의 영화의 표현 양상은 "이것은 영화이다"라고 계속 레드썬 핑거 스냅을 날리는 형식이 있다. 갑자기 내레이션이 나오거나, 배우가 갑자기 스크린에 대고 방백을 하고, 스튜디오를 부러 노출시키는 효과로 일종의 소격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런 영화에 늘 빠지지 않는 용어가 미장센이고, 클리셰이다. 그놈의 마장센과 클리셰가 맞다.


박찬욱의 영화는 '영화적인 영화', 달리 말해 '영화인이나 영화인이 되고픈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나도 참 좋아한다. 박찬욱의 영화는 영화 교과서의 참고 자료로 쓸 것들이 넘쳐 난다. 시그니쳐가 된 사방무늬 벽지에 70년대 단독 주택 인테리어의 질감이 그러하다. 가끔 튀어나오는 내레이션은 덤이다. 인물들은 프로토타입이거나 그 변형들이다. 대칭과 비대칭의 화면 구성과 봉우리 꼭대기에서의 부감샷까지. 일반인들은 그냥 놓치기 마련인 장치들이 매 씬마다 등장한다. 그래서 박찬욱 영화는 늘 피곤하다.



박찬욱 영화의 키위드 "복수"


박찬욱의 영화에는 괴상한 것들이 가득 차 있다. 가혹한 고문과 체벌, 비정상적인 성적 표현과 섹스,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뱉는 비웃음 같은 유머 코드. 이런 것들이 주요한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인물들도 하나같이 괴이하다. 나사 한 두 개는 빠진, 2% 이상 부족해 보이는 인물들이 서사를 이끌어 낸다.


<복수는 나의 것>의 유괴범 류(신하균)는 청각 장애인이고 <박쥐>의 상현(송강호)은 심지어 뱀파이어다. 모든 작품의 주요 인물들은 어마 어마한 사건과 상황을 맞닥트리지만, 그들은 어딘가 모자란 존재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는 어떠한가. 이렇듯 박찬욱의 영화에서는 극단적인 비정상을 전면으로 배치하여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관념을 낯설게 만든다.

낯설다 (사진=다음영화)

<헤어질 결심>의 최대 낯섦은 '사랑'이다. 사랑을 전면으로 내세운 박찬욱의 영화는 낯설기만 하다. 이제 나이가 늙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결국 평론에서 이야기하는 기독교적 구원의 정수인 사랑 복음을 앞세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 사랑은 이전 작품 <아가씨>에도 전조로 등장하긴 했었다. 그러나 일반작이지 않은 소수자의 성애 묘사로 그마저도 낯설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 놓고 '사랑'이란다. 낯설다.


박찬욱의 영화를 흔히 기독교적 원죄의식에 의한 구원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선과 악의 모호한 대치와 완전히 선하지고 완벽하게 악하지도 않은 자들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리벤지 배틀은 결국 '원죄'를 이야기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담과 하와가 범한 신에 대한 거역이라는 죄를 지니고 태어나기에, 그 선악의 자리는 뒤바뀌거나 모호하게 교차된다는 이야기다. (박 감독 제작사 이름이 '모호 필름'이다)


하지만, 내가 보는 박찬욱의 영화는 '복수'의 플롯이 관통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복수를 빼면 이야기는 헐거워진다. 복수 3부작이라는 초기의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는 전형적인 복수의 플롯을 보인다. 갚고 돼 갚는 이야기가 골자를 이룬다. 다음 작품부터는 다소 모호해지지만 복수가 들어 있다.


박찬욱 복수 3부작 (콜라쥬=다음영화)


<박쥐>는 신성과 인성의 종교적 관습에서 벗어나는 주체들의 복수가 뱀파이어의 모습이 되었다. <아가씨>는 모든 세상의 선입견과 인식의 틀에 대한 복수를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 작품 <헤어질 결심>에서 복수를 찾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느끼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니 이 작품 안에서 '복수'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헤어질 결심'의 다른 말이 '복수심'이었던 것이다.



'헤어질 결심' '복수' 다른 말일까


스웨덴 추리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베크 형사 같은 해준(박해일)은 품위 있어 보인다. 그 품위가 자살 변사 사건 아내 서래(탕웨이)에게 주는 눈길마저 부여잡진 못한다. 두 개의 살인 사건(결과적으로)의 범인인 서래와 그 사건을 맡은 해준의 로맨스는 부적절하다. 격정의 묘사가 없더라도, 그들이 흔한 유부남, 유부녀 밀회라 해도, 가장 '불륜'스러운 것은 사건을 두고 마주 선 두 사람의 입장이다.


서래의 호감과 적극적인 표현이 진짜 절절 끓어오르는 사랑인지는 모호하다. 자신의 불완전한 입지의 극복을 위한 의도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해준은 한눈에 그녀들 마음에 담는다. 처음부터 용의자가 아닌 유가족으로 대한다. 아니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 드러나 표현한다. 흠뻑 빠져 든 순간, 그녀는 '헤어질 결심'을 선언한다.


둘 사랑스럽다 (사진=다음영화)


연인 간의 이별 통보는 일종의 배신이다. 관계의 단절을 선언하는 심정의 폭력일 수도 있다. 그 배신의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시간이 지나 되 물으면, 이유가 다 있기 마련이다. 상대가 먼저 배반한 것에 대한 선전 포고이거나, 소원해진 관계에 대한 억지 매듭이거나. 그 배신에는 이유가 그득하다.


서래의 결심은 '모든 것을 끝낼 결심'이다. 서래는 가정으로 돌아간 해준을 따라 부러 안개 도시 이포로 찾아들었다. 해준의 아내(이정현)가 "이포는 떠나는 곳이지, 찾아오는 곳이 아닌데"라는 의구심 가득한 추임은 사실이 되어 버린다. 해준을 만나러, 그 앞에서 더 확실한 결심을 보이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슬아슬한 사랑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부담인 것이다. 해준은 과거의 평판과 현재의 안정에 금이 갈 수 있고, 서래는 현재의 정갈함과 미래의 희망이 무너질 일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서래의 불안정한 상태 때문이다. 밀항한 독립 유공자의 손녀, 출입국 직원과의 묘한 결혼, 이 상황에 필요한 것은 해준의 '품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품위는 해준의 과거와 현재, 즉 평판과 안정이 있을 때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서래는 무기력한 상황을 던져 준 모든 세상과 시간들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그 모든 것들과 헤어질 결심을 통해서 말이다.


앱이 내레이션을 (사진=다음영화)


박찬욱 감독은 서정적인 멜로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이유는 절대로 그런 이야기는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주변의 이야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야기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마침내 사랑 이야기는 완성되었을까?


영화에서 ‘마침내’는 ‘결국’이라는 뜻으로 처음 쓰이고, 중간에 ‘이제야’ 같이 쓰이다가, 마지막엔 ‘기어코’의 뜻을 보이는 것 같다. 박찬욱은 <헤어질 결심>으로 세상에 소소히 복수하는 사랑이야기를 마침내 이루어 내었을까?


마침내 (사진=다음영화)


'신파극’이란 일제 개화기 시절에 유행하였던 멜로드라마 형식의 연극을 지칭한다. 대체로 무르녹은 연애, 엽기적인 사건 등 강렬한 정서적 자극이 있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대개는 주인공이 어려운 처지에 몰려 관중의 눈물을 자아내다가 끝에 가서 행복을 찾는다는 결말로 끝난다. 통속적인 윤리관에 입각한 권선징악의 교훈을 담곤 했다. 요즘에는 ‘신파조’라는 이야기로 그저 감성을 자극하여 사람들의 눈물을 짜내는 의도된 ‘졸작’을 대변하기도 한다.


제도와 관습을 벗어난 사랑에 대한 응징이라는이면에는 그 사랑이 이루어 지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의 양면성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신파’라는 것은 세련되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는 그저 뒤처진 낡은 감정의 조각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뻔한 사랑이야기에 화도 내고 울고 함께 기뻐하기도 한다.


박찬욱의 영화는 복수를 덧댄 신파극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완성하기 힘든 사랑들이 열거되었다. 가족을 위한 헌신에서 오는 범죄(복수는 나의 ), 사랑이라 속여온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친절한 금자씨), 누이와의 근친 사랑에 대한 금기(올드보이), 관능과 욕망, 그리고 소명과의 갈등(박쥐), 금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수단으로써의 사랑(아가씨) 그러하다. 신파는 어려운 사랑이어야 제맛일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한 발 더 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호함은 이포의 안개처럼 더 깊어졌고, 사랑에 입혀진 복수의 플롯은 더 은밀해졌다. 그런데, 솔직히 심심해졌다. 초기 <해가 뜨는 달>은 논외로 하고,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와 <복수의 나의 것>은 주춤 거리는 서사들이 있었다.


제목조차 그렇다. 수식어가 있어야 설명 가능한 쭈뼛거림이 있었다. 그러다가 단정하고 확언한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기이하고 부조리한 것이라고. 제목이 곧 타이틀 롤이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처럼 말이다. 그런데 다시 <헤어질 결심>이라니, 다시 주춤거리는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 다시 뫼비우스의 회귀일까.


<산해경>이 예상되는 벽지, 시각적이지만 영화는 읽는 맛이 있다 (사진=다음영화)


이 시대의 감독을 꼽자면 봉준호와 박찬욱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감독의 작품은 자신의 필모들이 조응하는 상호 텍스트를 생각하는 맛이 있다. 언뜻 드는 생각이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웹툰'같다. 시놉시스는 간단하지만 풍성히 영상과 관계로 풀어내는 삑사리의 미학이 있다. 그에 비교하여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은 '소설' 같다고 생각이 든다. 시각적인 것들이 가득 차 있지만 이내 텍스트로 모두 변환되어 머리에 박힌다. 시나리오 책을 읽을 맛이 있다고 할까.


봉 감독이 학창 시절부터 만화 마니아에 직접 그리기도 했다는 사실, 그리고 박 감독이 작품 구상에 소설이나 소품을 적극 레퍼런스한다는 점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영화를 보는 맛, 읽는 맛을 주는 것이 '영화적인 영화'의 정수가 아닐까. 두 감독의 신작이 늘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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