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익을 최대로; '우리'는 어디까지인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평생 성실히 일한 목수다. 사이좋게 지내던 아내는 몇 해전 머리에 큰 바다가 생기고 폭풍이 몰아쳐 이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사이좋았던 아내 사이에 자녀는 없다. 유일한 낙은 목수일을 하고 남은 자투리 목재를 가지고 목공예로 소품이나 작은 가구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와서 일하던 현장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지만, 심장에 큰 문제가 생겨 당분간 일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국가에서 보장하는 ‘질병수당’을 받기 위해 당국에 신청하였으나 기본점수(?)에 미달되어 기각되었다. 관련 항고를 위해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유료통화 시스템은 두 시간 가까이 대기 중이라는 모차르트 음악만 나온다. 애써 통화한 담당자는 심사관의 전화가 올 때까지 상고 진행 접수가 어렵다 하였다. 궁리 끝에 찾아간 관공서에서는 질병수당에 기각이 되었다면 구직활동을 하면서 실업 구직수당을 상담 신청하란다.
이런저런 항의와 민원 중에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 가족을 마주쳤다. 자신도 목구멍이 포도청 신세이지만, 당장 오늘을 버티기 어려운 이 가족을 그냥 지나치긴 어렵다. 여태껏 없이 살아도 그리 살아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내 코가 석자인 지금 수당 신청 항고에서 승소해서 수당을 받고, 케이티는 그녀가 원하는 주경야독의 희망 가득한 삶을 찾을 수 있을까? 가난한 내가 더 가난한 그들을 돕는 것은 이상한 일인가?
브리티시 시네마의 거장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시쳇말로 ‘불순한, 그리고 불손한’ 영화다. 계급주의 영화 메시지를 사실적인 표현으로 직접적으로 말하는 그의 작품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결말에 이르러서 이 영화의 메시지가 ‘비관적’인지 ‘희망적’인지 헷갈림을 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21세기 자본주의 영국 사회의 칙칙한 바닥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인다.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그 노동의 기회가 줄어든 만큼 복지혜택을 원하는 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은 늘어난다. 한정된 재정사항에서 당국이나 공무원들은 그 급여나 수당의 지급에 점점 까탈한 조건만 늘어 댄다. 복지의 수혜를 받으려는 사람이나 복지 체계를 전달하는 공공이나 답답하기는 매 한 가지이고 좀처럼 그들의 소통관계에서 인간적인 무엇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진다.
이런 모습은 저 멀리 영국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별반 다르지 않다. 가장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이 절체절명의 늪에 빠져 있을 때 손을 선뜻 내미는 사람은 많이 가진 자들이 아니다. 그 가장 가난한 사람보다 조금 나은 형편에 있는 사람, 바로 차상위의 가난한 자들이 손을 내밀기 마련이다.
이 또한 사람이 사는 곳, 특히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가진 곳의 현실이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저 평범한 인생을 가진 독거노인일 뿐이지만, 단 한 가지 사실에 분노하고 선언한다. 빈부와 계급에 상관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중을 주지 않는 공권력에 맞서며 선언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이다!"
영화를 보면서 한동안 입에 올리지 않았던 단어 ‘공동선(共同善)’을 떠올리게 되었다. 대학 재학 시절 성당에서 중고등학생들 교리교사를 한 적이 있었다. 고작 몇 살 많은 사람이 아이들에게 신의 말씀과 인간의 존엄에 대해 가르치려 들었던 그런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겨울에 고3 아이들과 시골 수도원으로 피정을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하기 위해 준비하며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프로그램이 ‘우리의 이익을 최대로’라는 팀플레이 경쟁 게임이었다. 짧은 설명을 하자면 홀수 조로 나누어 O, X 양자택일을 하게 하고, 그중 소수에게 점수를 몰아주는 그런 게임이었다. 중간중간 지점에 서로 합의하고 협의하는 소위 모두 O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단 그 협의는 꼭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게임이었다.
모든 경쟁이 그러하듯 아이들은 열성적으로 자신의 조가 이익을 얻어가도록 게임에 임했다. 마지막 라운드를 진행하고 순위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결과를 이야기하였다. 어떠한 경우라도 모두가 O를 내었을 때만큼의 이익 총량을 낼 수 없는 룰이 숨어 있었다.
‘우리’, ‘이익’, ‘최대’라는 단어 중에 가장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우리’라는 개념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학생들의 경우 ‘우리 조’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우리’를 여기 모인 ‘우리 모두’로 생각하였다면, 모든 라운드에 O를 제출하고 모두의 이익을 최대로 했을 것이다. 이 지점이 ‘공동선’의 문제였다.
공공의 선, 공동의 선을 자본가가 주도하는 자유주의 계급에서는 마치 ‘전체주의’나 ‘사회주의’로 변곡 해석하기 마련이었다. 마치 ‘가난’이라는 것은 개인의 문제이며, 개인의 노력과 진정성이 결여된 징벌적 계급이라 단정하고 만다. 그래서 그런지 소위 ‘부자’라는 가진 자들은 그 가난한 자들의 진정한 가난의 이유를 살피려 하지 않고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 ‘가난’은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너희들’의 잘못일 뿐이고 나는 나 스스로가 열심히 살아 잘 사는 것이라는 논리다. 그래서 ‘모두’가 잘살거나 ‘모두’가 적당히 가난하자는 분배정의는 ‘빨갱이’들의 불순한 의도일 뿐이라 생각하고 만다.
크리스천으로서 가장 혁신적이고 현세에 지침적인 선언이라 생각하는 문헌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한 ‘사목헌장’이다. 교회와 사회의 경계를 떠나 급속도로 산업화되는 이 지구상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공동의 선, 그리고 불변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헌이다. 이 문헌의 69장이 경제활동과 재화에 대한 내용인데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지상 재화의 목적(69항) :
경제생활과 관련해서 명심해야 하는 또 한 가지는 지상 재화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소유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근본적으로 지상 재화는 모든 이의 것이라는 이 원칙은 늘 새겨야 한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지침을 제시한다.
하나는 자신의 재물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재화의 충분한 몫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 사람들은 쓰고 남은 것만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참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고
△ 극도의 궁핍 속에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재산에게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취득할 권리가 있다.”
- '현대 교회의 사목헌장(1962)'-
극도의 궁핍에 속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재산에게서 자기에게 필요한 재화를 취득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이다. 급진적인 사회주의적 선언처럼 보이지만, ‘우리’라는 개념의 정의로 돌아간다면 보편타당한 주장이다. 이 세상의 재화는 이 세상의 모든 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활동의 학문적 정의를 보더라도 부자가 가진 것들은 ‘모든 이’들의 경제 활동에 기인한다. 따라서 그 공동의 선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가난한 이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이들은 인간으로서, 이 세상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 조금 세게 말하자면 누구나 일상에서 죄를 짓고 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근 10년 동안 본 영화 중 가장 도드라진 영화였다. 같은 해 개봉한 <곡성>을 볼 때만 해도 결말에서 내 머리를 이처럼 때릴 영화는 당분간 나오지 않을 것이라 장담 가깝게 이야기하곤 했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그 이야기를 번복하게 되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결말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영화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당시 영화관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극장에 조명이 환하게 들어오기 전 어느 누구도 일어나지 못했다. 거대 서사가 있지도 않고 엄청난 사건이 진행되지도 않은 소위 ‘좌빨 노장 감독’의 느릿느릿하지만 또박 또박한 일기 같은 영화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영화를 보고 그러한 충격과 부끄러움으로 리뷰를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신문의 어느 기고를 보고 분노와 함께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경영자 총 연합회 회장의 영화를 본 리뷰였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나와 동시대에 사는 사람의 생각이 상식이 이처럼 굴절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 보니 그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깊게 들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부유하게 가진 자가 아닌 덜 가난한 사람인 것일지도 모른다. 가난한 모든 현상에 외면하는 가진 자들도 문제이지만, 밖으로 티 내는 알량한 봉사활동과 나눔이라 볼 수 없는 의미 없는 적선으로 의무를 다한다 생각하는 이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의가 훼손되고 파괴된 세상의 가치 틀 안에서의 정의는 절대로 불의하다. 그 불의를 인지도 못하고, 부끄럽다 생각도 못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도 혁명은 아직 필요하고 광장은 유효한지 모른다.
날이 많이 더워졌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 힘든 시간이 깊어진다. 가난한 사람이 늘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이 가난해진다는 방증이다. 그것이 '우리 이익의 총합'이니까.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는 필수이고 권리다. 그 연대와 권리를 불편해 할 수 있으나 불법이나 일탈로 매도하는 일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양해야 할 일이다. 누구나 가난에 빠질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 특히 변동이 예측을 능가하는 극도의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선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