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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Aug 20. 2024

진짜 '리즈 시절'을 아시나요?

유행어와 스노비즘

https://sports.v.daum.net/v/20220226232047634

토트넘은 26일 밤(한국시간) 리즈 엘런드 로드에서 열린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2021/2022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7라운드 원정경기에서 4-0으로 승리했다. 손흥민은 후반 40분 케인의 도움을 받아 팀의 4번째 골을 터뜨렸다. 손흥민과 케인은 합작골 37골째를 기록하며 프리미어리그 신기록을 달성했다. -기사 본문 중-


축구 좋아하시나요?


개인적으로 최애의 스포츠는 야구다. 특정 리그를 꼽자면 한국의 KBO 리그다. 야구 사랑 이야기는 이전에 연재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축구는? 사실 스포츠를 두루두루 좋아해서, 와이프는 '싫어하는 스포츠가 있긴 해?'라고 핀잔 아닌 팩트 폭행을 던지곤 한다. 축구는 특정 팀보다 '한국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좋아하는 것 같다. 국대의 A매치를 응원하는 것은 물론, 한국인이 진출한 해외 리그의 경기를 가끔 보면서 응원하곤 한다.


스페인 라리가 파리 생제르망의 막내 이강인, 독일 분데스리가의 이재성, 정우영, 김민재 그리고 영국 EPL의 울버햄튼 황희찬과 토트넘의 손흥민 까지, 사실 주말 밤, 새벽에 몰래 시청하는 스릴도 좋지만, 다양한 축구의 문화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해외 리그에 대한 관심은 아무래도 2002년의 신데렐라, 히딩크의 황태자 박지성의 진출부터다. 네덜란드를 거쳐 입성한 당대 최고의 리그, 최고의 인기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는 TV 중계 시청만으로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펼쳐졌다.


맨ㆍ첼ㆍ아ㆍ리

2005년의 EPL은 '맨첼아리'라는 4강 구도로 타 리그를 넘어서던 도약의 시기를 맞이했다. 그 무렵 홍콩 출장 중에 '맨유'의 경기날이면 핫플레이스들이 스포츠 바로 변신하는 순간을 목도하기도 했으니,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는 가늠되고도 남을 듯하다. 토요일 저녁 손흥민 토트넘에게 0-4로 패한 팀이 눈길을 사로잡은 '리즈 유나이티드'라는 리그 하위 약체팀이, 바로 이 2005년을 소환해 주었다.



'리즈', 네가 거기서  나와


'리즈 유나이티드'는 일상 속에서 자주 소환되는 팀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바로 왕년, 전성기를 빗대어 이야기하는 '리즈 시절'이 바로 이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축구 팬이나 상당수 어원에 관심 많은 분들은 알고 계시겠지만, 흔히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의 근원이 어디인지 잘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도 많아 보인다. 이 참에 '리즈 시절'에 대하여 이야기해 볼까 한다.


"리즈 시절"

리즈 시절은 특정 인물이나 단체의 '황금기', '전성기' 또는 '왕년'을 가리키는 시다 유행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프로 축구단인 '리즈 유나이티드 FC'를 줄인 '리즈'와 '시절(時節)'의 합성어다. 정확하게는 현재는 예전만 못하다는 의미가 강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반대의 경우는 '흑역사' 정도가 대칭될 것 같다. 영어로도 'Leeds days, Days in Leeds'라는 표현이 남아 있지만, 주로 축구ㆍ스포츠 분야에 한정하여 사용하다 최근에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축구계에서의 유행은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던 때에 같은 팀의 팀 내 라이벌이었던 앨런 스미스의 과거 소속팀 리즈 유나이티드 전성기 시절을 지칭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축구 커뮤니티의 은어로 시작했으나, 이후 지속적인 유명세를 타며 다른 분야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유행어가 되었다. 방송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며, 가벼운 논조의 기사에서도 종종 눈에 띈다. 연예계에서는 역변한 인물의 과거 전성기 시절을 이야기하며, 현재의 모습을 은연중 폄하하는 의미로 주로 사용한다.


리즈 유나이티드 전성기


진짜 '리즈 시절' 아시나요?


주인공이자 과거에 화려했던 구단인 리즈 유나이티드 FC는 현재는 잉글랜드 챔피언스 리그(2부)에 속해있고, 최근 다시 강등을 걱정할 정도의 퍼포먼스를 내고 있다. 과거에 과도한 이적료 지출로 인한 파산을 신청하기도 한 구단이지만 20세기와 21세기 초반의 그들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지배한 진짜 '리즈 시절'이 있었다.


 앨런 스미스, 리오 퍼디난드, 해리 키웰 등 슈퍼 스타들이 이 팀을 거쳐갔다. 20세기 요한 크라위프의 AFC 아약스 암스테르담이 유럽 축구계를 점령하기 전까지 리즈 유나이티드는 리버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톤 빌라와 함께 전성기를 맛보았다. 1964년부터 1974년까지 리그 우승 2회, 준우승 5회, 1973년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 1975년 UEFA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기를 1차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리즈 시절"은 1991-1992 시즌 리그 우승과 2000-2001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했던 2차 전성기 시절을 비유한 것이다.


진짜 '리즈 시절'


리즈 유나이티드의 신성 앨런 스미스가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하면서 박지성과 자리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앨런 스미스가 별 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가운데 국내 축구 팬들은  '앨런 스미스를 욕하는 파 '와 '축구를 아느냐, 리즈 시절에는 대단했다'라고 옹호하는 파로 나누면서 벌인 사이버 설전이 한국에서의 '리즈 시절'의 의미로 정착하게 된다. '옛날에 잘났다는데, 지금은 별로야'라는 일종의 핀잔으로 변형 고착화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EPL을 처음 접한 축구팬과 박지성 팬심, 그리고 앨런 스미스의 부진 3박자가 어우러져서 탄생한 신조어가 '리즈 시절'이다. 축구 카페나 관련 사이트에서만 쓰이는 말이었다가 점점 다른 인터넷 공간으로 단어가 퍼져나가고, 방송이나 밈들이 연예인들의 "리즈 시절"을 부각하며 일상의 비유적 단어가 된 것이다.



'스노비즘'이라는 비판


유행어의 탄생과 기원은 다양하다. 무심코 사용하는 세간의 은어들이 대표적 비유로 사용되는 것도 현실이다. '리즈 시절'도 이런 유래와 비유적 의미의 연혁 때문에 일각에서는 비판을 하곤 한다. 바로 '의미는 알고 사용하냐'는 "스노비즘"에 대한 비판이 그러하다.


스노비즘

스노비즘(snobbism)이란, 어떤 대상의 실체적 본질에 대해서는 관심이나 식견이 없으면서, 그저 남에게 과시하거나 돋보이게 하기 위해 껍데기만 빌려오는 성향 및 허영을 나타내는 문화사회학 용어다. 영국의 작가 새커리가 작품 <스노브 독본: 영국 속물 열전(The Book of Snobs)>(1848)에서 단순히 신분이 낮은 사람을 뜻하던 조소의 의미 '속물'(snob)이라는 단어가 19세기부터 '신사인 체하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변용되었다. (snobbery 속물근성, snobbish 신사인 체하는)


아마 실제 영어권에서는 스포츠 팀의 '찬란했던 시절'이라는 '아련한 좋은 추억'에 방점이 있었지만, 국내의 사이버 세상의 변용의 틀을 거쳐, '지금은 왜 이래'의 핀잔으로 바뀐 것에 대한 비판을 '스노비즘'이라고 비판하는지도 모르겠다. 정확한 유래를 인지하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정보가 숨어 있어 '고의적'인 과시욕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지적이 반대로 '스노비쉬'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남자들이 과시하며 여자분들에게, 니들이 축구를 아냐고 무시하던 시대도 지나 버렸으니까. 엘라시코 클래식을 보며 남친과 여친이 응원전을 하던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도 2008년, 16년이나 되어 가는 작품이다.


<아내가 결혼했다 (2008)>


'리즈 시대' 넘어 '리즈 경신'으로


'리즈 시절'은 유래를 따지면 거의 17년이 지났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대중들에게 더 친숙해진 용어로 자리 잡힌 듯하다. 현재는 해당 유행어에서 파생된 "리즈 경신"이라는 단어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현재의 성과나 상태가 왕년의 전성기를 뛰어넘어 새로운 전성기를 찍었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리즈 시절이라는 용어가 대중들 사이에서 오래 사용되며 '왕년의 좋았던 시절'에서 단순히 '전성기'로 뜻이 다시 전환 확장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유적 표현이 사용자의 자정으로 제자리를 찾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응원할께요
여러분들의 '리즈 시절'은 존재하나요?
있다면 언제일까요?


수년 전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 하나>를 볼 때, 90년 대의 그 찌질한 망한 부잣집 20대 아들의 모습이 가슴에 아렸었다. 돌아보고 싶지 않던 그 시절, 아무도 응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응원하며 이겨 내던, 그 시절이 거꾸로 생각하면 나의 '리즈 시절'일지도 모른다. 가장 순수했고, 아주 건강했으며, 정의롭고 헌신적이었으니까.


다시 '리즈 경신'의 날을 그려 본다.

비록 건강하다 할 수 없고, 그다지 정의롭지 못하며, 매우 이기적인 기도로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말이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지금, 바로 비루한 오늘의 일상이 가장 고귀한 고점일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뒤 돌아본 어느 날 오늘이 리즈 시절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아 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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