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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Aug 19. 2024

각자의 '자유'의 총합이 '모두의 자유'가 될까?

개인의 자유와 모두의 자유는 투쟁 중

자유주의자에게 개인주의는
드라큘라에게 십자가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러시 림보-

극우 보수 논객 러시 림보, 사진=다음


미국의 유명한 보수 논객이자 라디오 진행자 러시 림보의 말이다. 언뜻 이해가 아리송하다. 리버럴, 리버럴 하고 주문처럼 되뇌는 이들에게 '개인주의'는 슈퍼맨에게 주는 클립토 나이트가 된다는 것이니까.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면 이해가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지금 '자유'를 강조하는 정치 세력과 통치자를 살펴보면 추정 가능하다. 물론 그들의 '자유'가 철 지난 '반공'을 변검처럼 탈바꿈한 것일지 몰라도, 그들의 구호 맨 앞단에는 '자유'가 있다. '민주주의'라는 교과서 명기를 굳이 '자유민주주의'라고 변경할 만큼 소중한 가치 표현이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누구의 것일까?


개인 각자의 가치 기준은 각자의 지문처럼 각자 저마다일 것이다. 그들의 가치 중 '자유'라는 것은 '오롯이 나로 존재할 자유'가 근본이 된다. 아마도. 김어준을 좋아할 자유, 싫어할 자유, 윤석열을 지지할 자유, 검찰을 비판할 자유, 동성을 사랑할 자유, 보다 쉽고 편익이 많은 일을 할 자유, 그리고 존엄하게 죽을 자유 같은 수많은 자유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자유'가 맞다. 그런데 이들의 총합은 정부가 말하는 '자유 민주주의'안에 들어가 존재할까? 확신에 가까운 추측건대 아닐 것이다. 각자의 자유의 총합은 모두의 자유가 되지 않는다.


이 정권이 강조하는 '기업 활동의 자유'를 보자. 기업들의 각종 규제를 없애고, 완전한 자유 경쟁의 시장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공기업, 공공사업을 민간에 이관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자면 코레일, 한국전력, 가스공사 이런 것들이다. 기업의 논리로 보면 맞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기업활동을 지탱하는 각 개인 주체의 자유는 어찌 될까?


민영화의 그늘, 사진=한겨레

우선 코레일을 최적화하여 민영 논리로 운영되면 하루에 한두 명 타는 간이역, 수십 명 타는 지방 작은 역들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럼 그 기차 때문에 통학을 하고 출근을 하는 이용자들의 주거의 자유, 이동의 자유, 학습의 자유는 물론 최소한의 권리보장도 힘들어질 것이다. 세금의 위용은 이럴 때 발휘된다. '자유'의 기저에는 그 자유를 위한 조건의 충족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공적 노력의 이유가 국가ㆍ정부의 존재 이유다. 누군가의 주장대로 '정부에 의한 자유 보장'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반대 의견이 있다. TBS 같은 언론은 다르다고. 대중의 의사 반영, 취향 형성, 그리고 사실의 탐사와 진실의 추구를 하기 위해 '정부의 관여는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영방송 불필요론'이 이런 이유로 형성된다. 그렇다면 민영의 미디어는 어떤 누구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광고를 주는 광고 지본들의 눈치, 인사권을 줜 그 자본과 혼연으로 맺어진 최대 주주일가, 그리고 스스로 정권을 창출한다고 믿는 언론 종사자들의 민영 미디어가 우리 각자의 자유를 정부와 공공이 개입한 공영 미디어보다 더 보장해 줄 것이라는 확신의 근거는 무엇일까?


보통 민주주의 사회를 4 등분해서 1, 2, 3 쿼터를 정의한다. 1 사분면은 정부, 관공, 공공, 2 사분면은 민간, 기업, 그리고 3 사분면은 시민단체, NGO 등의 시민사회를 말한다. 현대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1 사분면이 줄어들고 2,3 사분면이 확대된다고 이야기들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가장 커지는 사분면은 4사 분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 4 사분면은 시민, 국민, 대중들 각각이라는 '주체'가 차지한다. 이들의 자유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며 시장의 법칙에서 커버하지 못하는 보다 다양한 자유, 다수에 밀려난 소수자들의 자유, 사용자에게 쫓겨난 노동자의 자유, 그리고 개인주의자로 행복할 자유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섹터 이론, 사진=성남시민학교


붕어빵 장사는 '공영'으로 운영할 필요가 없다. 소비자들, 구매의사, 지불의사만 있다면 그들의 니즈에 따라 파편화되고 발전하니까. 잉어빵, 슈크림 붕어빵, 반반 붕어빵, 프리미엄 붕어빵 등, 개인의 각양각색에 최대한 응답한다. 그러나 공공이 필요한 영역은 공론과 대중의 감시와 독촉 없이는 발전하거나 지속되지 않는 부문이다. 진입장벽이 높고 가격의 투명성이 요구되는 유틸리티, 객관성과 자본 권력으로부터 분리된 미디어, 적자를 무릅쓰고서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보장을 위한 인프라는 아이러니하게 '모두의 것'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의 최대 이익은 모두가 이익을 공유할 때 가능해진다.


개인적으로 '공공의 운영'이 적절히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효율과 이익이 우선되는 영역이 아닌 편익과 보편성이 담보되는 영역이 그러하다. 교육, 안보, 치안, 그리고 언론이 그 범주다. 웹 3.0 시대에 데이터조차 '개인의 것'이 된다는 전망이다. '모두의 행복'은 개인 각기의 행복을 총합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혼자 살아 낼 수 없다. 그래서, 나의 행복의 한 모퉁이를 잘라 덜어내더라도 모두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함께 하는 마음, 그래서 세금을 내고 투표를 하는 것 아닐까.


최근 정부와 위정자들의 행보는 물론 인식마저 위태롭게 보인다. 모든 결함을 덮어 버리는 '자유'의 구호가 넘실댄다. 민주주의의 요체인 '자유'와 '평등' 중에 '평등'은 비교적 인식 수월하다. 상식의 기준에서 무게를 달 수 있을 것 같이 개념 정립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자유' 앞에선 늘 갸우뚱 댈 수밖에 없다. 그 개념은 물론 인식의 평가마저 애매모호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철학적 사고는 늘 중요하다. AI가 판치는 세상에 철학이 유용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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