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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Sep 26. 2016

며느리의 설거지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그릇의 사용에 대한 철학적인 산문을 읽은 적이 있다. 정작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그릇이 아니라 그 안쪽의 빈 공간일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대단한 깨달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릇은 담는 것 말고도 하는 일이 많으니까.  <은희경의 ‘중국식 룰렛’ 중 ‘불연속성’을 읽다가>



돌이켜보니 대단한 일 아닌가 싶다. 한국 고유의 명절 추석에 그것도 시댁(정확히 말하면 시누의 집)에서 설거지 한번 하지 않은 며느리라니. 그게 바로 나다. 사정상 시댁에서 제사는 지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체로 여유로운 명절이긴 했다. 이번에는 강원도에 사는 남편의 누나인 시누가 시어머니 댁으로 올라오지 않고 우리가 어머님을 모시고 강원도 횡성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어려서부터 친가 외가 모두 경기도 아니면 서울에 살아 명절, 민족 대이동을 겪어 본 적 없는 나로선 설레는 경험이기까지 했다. 물론 추석 연휴 전날 내려간 게 아니고 추석 당일 친정아버지의 추도식을 지내고 내려간 거라 그 느낌에 정도의 차이가 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시댁 또한 집에서 차로 20분남짓 거리이기 때문에 명절 교통난 같은 건 경험해 보지 못해 그 피로도가 와 닿지 않았다. 추석 당일 낮 12시 출발, 4시간 반을 운전해 횡성에 도착했다. 예상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처음이라 그런지 가히 죽을 만큼 힘들진 않았다. 중간에 딱 한번 남편과 운전대를 교대하고 우리는 무사히 아이의 고모 집에 도착했다.


추석에 시댁에서 설거지 한번 안 한 며느리


우리가 도착할 시간을 계산해 미리 음식을 만들어 놓고 상까지 차려 놓은 덕에 시장할 틈 없이 바로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 횡성에서 유명한 한우를 굽는 건 기본,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문어숙회와 잡채, 각종 전이 상 위에 올라왔다. 식사가 끝나고 남편과 시 아주버님, 그리고 시매부가 조촐하게 술상을 이어갔다. 시누의 고등학생 큰 딸과 아들이 부지런히 나머지 상을 치웠다. 나는 설거지할 생각으로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시매부가 자리에 앉아 계시라며 설거지는 알아서 하겠다고 나섰다. 명절인데 음식 하나 하지 않은 며느리가 설거지라도 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아니에요, 라고 여러 차례 말하며 주방 싱크대 앞에서 섰지만 이번에는 시누가 극구 나를 말리며 멀리서 온 손님인데 가서 쉬라고 주방에서 자꾸 나를 밀어냈다. 어쩔 수 없는 척 거실로 나온 나는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으로 아이 옆에 앉아 아이패드로 핑크퐁을 보여주었다. 아이가 맞는 두 번째 추석, 꼬물거리는 아이 하나 생겼다고 온 집안이 웃음으로 가득했다. 처음부터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던 나는 온 가족이 하나가 되어 아이를 예뻐하고 신기해하는 여러 상황들을 접하며 내가 아이 낳길 잘 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추석 당일도 집으로 돌아가는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도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명절을 보냈다.


illust by 윤지민


설거지하니까 결혼하고 처음 맞이했던 명절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게 있어서 시댁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했던 신혼 초였다. 그때는 기대에 못 미치는 여러 안 좋은 상황들 때문에 남편과 자주 다투기도 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정말 안 싸우는 거다. 아마 그때도 추석이었을 것이다. 시댁에 우리 부부와 시아주버님 그리고 시누의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당연히 막내며느리인 내가 고무장갑을 꼈다. 초장에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나는 나지막이 남편을 주방으로 불렀다. 요건은 내가 비누칠을 할 테니 너는 옆에서 헹궈라, 였다. 남편은 워낙 집에서도 집안일을 잘 도와줬기 때문에 서슴없이 내 옆에 서서 고무장갑을 나눠 꼈다. 그런 동생의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보던 시누가 딱 한 마디 했다.


“어머, 우리 막내가 설거지를 다 하네.”


그걸 들은 시어머니가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곁들여서 놀라셨던 건 확실하다. 아니 너는 이리 오라며 남편을 말렸던 것 같다. 나는 되려 거기다 대고 “집에선 더 많이 해요”라고 남자가 설거지하는 풍토에 대해 기겁하는 시댁 식구들의 눈초리에 기죽지 않으려고 강하게 나섰다. 약간의 반발심도 없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그땐 시누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 기싸움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괜히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왜 시댁이라고 며느리만 설거지를 해야 되는가? 그렇다고 친정에서 사위가 설거지를 하는 것도 아닌데. 어쨌거나 그 이후 명절에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지 않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설거지 맡겨주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군말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어쨌거나 그땐 시누이나 나나 모두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거리를 유지하고 생긴 다정한 관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나마 우리 시댁 식구들이 그렇게 꽉 막힌 사람들은 아니어서 그래도 애 데리고 서울서 와준 나를 설거지 명단에서 제외시켜주니 세월의 힘도 느껴지고 나도 이제 시댁 식구를 단순히 ‘시’자 붙은 사람들이 아닌 내 가족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 같다. 결혼하기 전에 시어머니는 딱 시어머니처럼만 대하는 게 가장 좋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친정엄마 못지않게 친하게 지내지 말고 이웃에 사는 어른을 대하듯 예의 바르게 공경하라는 뜻이었다. 그래, 어떻게 시어머니가 엄마가 될 수 있어, 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와 가까워지는 건 좋지만 풀어지는 건 싫었다. 지금도 가끔 그럴 것 같을 때마다 나 스스로를 정비하듯 바로 세우고 있기까지 하다. 거리를 유지하다 보니 다정한 관계가 생긴 것 같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딱 그만큼의 거리. 서로 걱정하고 인내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거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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