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미술부
1980년대, 그때는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랬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학생시절의 엄마도 손재주가 아주 뛰어났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그림 하나만으로 엄마는 들어가기 힘들다는 전교미술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단 하나, 물감, 그놈의 물감이 없었다.
그 당시 제일 잘 나가는 물감은 신한물감이었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 형편이 어려운 엄마는 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전교미술부의 꿈은 슬픔과 함께 건너가버렸다.
세월이 흘러 30대가 된 엄마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싶었나 보다.
'포크아트'라는 것을 배워 탁자나 작은 액자 귀퉁이에 아름다운 꽃을 그려오곤 했다.
냄새도 없는 그 꽃은 참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40대가 된 엄마는 뇌수술을 두 차례나 겪어야 했고,
가장이 되었으며,
홀로 외할머니와 미성년자인 나를 오롯이 부양해야만 했다.
아프고 고달프고 팍팍한 인생에 미술이란 뜬구름 같았을 것이다.
사치나 호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엄마의 아름다운 재능을 오랫동안 볼 수 없었다.
지금처럼 다이소와 같은 곳이 있었더라면,
외할머니가 물감하나만 사줬더라면,
그 가난하고 고달팠던 유년시절에 다른 꿈을 꽃피우지 않았을까.
그럼 인생이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가도,
글쎄, 또 다른 이유로 또 다른 얼굴로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었겠지.
어느덧 50대가 된 엄마는 '버터크림플라워케이크'라는 버터크림으로 아름다운 꽃을 케잌이나 빵 위에 만드는 일에 관심이 생겼다.
어려운 형편이라 유튜브를 보며 독학을 하더니 혼자 힘으로 뚝딱뚝딱 만들곤 했다.
주변 지인들이 너무 예쁘다며 버젓한 가게도 없는
엄마에게 알음알음 주문을 하곤 했었다.
엄마는 그때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생계를 이어나가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해내기에는 체력이 많이 부족했나 보다.
엄마는 퇴근 후 늦은 시간에 지인이 부탁한 컵케잌을 만들다 위경련이 심하게 난 이후로 만들기를 중단했다.
여전히 엄마 손에는 많은 재능이 살아 숨 쉰다.
아직도 생계에 치여 살지만 엄마의 재능이 언젠가 빛나는 순간이 왔으면 한다.
가끔 엄마는 D.I.Y 페인팅이라고 그림 도안 위에 채색을 하는 시간을 갖곤 한다.
그마저도 드물지만 말이다.
내가 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나는 엄마의 미처 빛나지 못한 재능을 꽃피워주고 싶다.
방법은 잘 모르겠는데 그래주고 싶다.
이제는 내가 그 물감을 얼마든 사줄 수 있으니까.
엄마라는 이름 아래 묻힌 꿈들이 세상에는 분명히 많을 것이다.
많은 꿈들이 소리도 없이 기척 없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꿈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