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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심삼일 글쓰기 Nov 17. 2019

#2.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던가


사진에 보이는 게 유치원 건물 전부였다. 아이들은 저 좁은 공간에서 교육을 받는다.


닭장과도 같았던 좁은 유치원

인도네시아에서 처음으로 했던 일은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이곳은 한국과 반대로 공립학교가 유복한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고, 사립학교가 가난한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라고 한다. 


학교는 대부분 걸어서 가기에는 먼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중학생만 되도,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한국에서 만약 그랬다면, “이노무 시끼. 불량학생도 아니고. 이리 오니라.” 이러면서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혼났을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를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오토바이가 주요한 교통수단이었다. 후에 깨닫게 된 것이지만, 이곳은 도로 포장 상태가 좋지 않고, 대부분 2차선으로 길이 구성되어 있었다. 차를 타고 가면 움푹 파진 곳을 피하기가 쉽지가 않고, 2차선의 좁은 차로에서는 자주 길이 막히기 때문에, 차보다는 오토바이가 이동하기에 수월했다. 물론 비싼 차를 살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이다.              



천장은 구멍이 났으나, 수리할 여력이 없었다.


잠시 뒤, 우리는 유치원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구멍 뚫린 지붕이었다. 게다가 조그마한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꼬마 아이들.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여건의 유치원이었다. 


이곳은 먼 곳에 있는 국립 유치원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원장 선생님께서 자비로 만드신 곳이라고 한다. 모든 운영비는 원장 선생님이 장사를 해서 버는 돈으로 유지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낡은 유치원은 벽이 허물어지고, 천장은 구멍이 뚫리고, 금방이라도 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게다가 뒤에 있는 작은 공터에는 허름한 미끄럼틀 하나만 있어서, 도저히 아이들이 놀 공간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내가 이런 곳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면, 얼마나 앞날이 막막했을까? 하루하루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 꿈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채로 살아야한다는 것.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이 너무 가엽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유치원 아이들을 위해서 과자 선물을 준비해갔다. 선물을 받아든 아이들의 미소가 어찌나 행복해보였던지. 한국 사람들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녹아버린 초콜렛이 이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맛있는 과자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특이한 일이 발생했는데, 실수로 과자를 전해 받지 못한 아이가 갑자기 토라져서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똘망똘망한 아이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새어나오려 하는 모습을 보면 아마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사람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재빨리 아이에게 과자를 챙겨주었다. 그러자 아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유치원 놀이터, 작은 미끄럽틀 하나가 유일한 놀이거리였다.


우리는 유치원을 떠나서 나링굴 중학교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들과 같이 공을 찼다. 내가 공을 잡을 때마다 쏟아지는 환호성에, 순간 메시가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군대에서 사단장님이 이런 맛에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고, 알면서도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학교에 갔을 때, 나에게 한국말을 걸어오는 인니가 있었다. 참 놀라웠다. 예전에 한국인 봉사팀들이 왔을 때 조금 배웠고, 지금은 독학으로 한국말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다른 학교를 몇 군데를 돌아다녔는데, 의외로 “안녕하세요.”하고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영어야 그렇다 쳐도, 한국의 언어로 이런 시골의 인니인들이 말을 걸어온다는 것. 그것은 생소하면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은 이렇게 호의적이지만, 처음에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할 때는 얼마나 막막했을까. 인도네시아 사회는 폐쇄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난 땅을 잘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이방인을 잘 받아들이지도 않는다고 한다. 교장선생님이 처음에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훤히 보였다. 그리고 그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곳에서 이들의 호의적인 웃음과 정겨운 한국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일 터이다. 아주 더디지만, 조금씩 교장선생님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판은 금이 가고, 가까스로 벽에 붙어있었다.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던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방문하면서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도대체 이렇게 더운 곳에서 선풍기 하나 없이 어떻게 공부를 하고, 곧 무너질 것 같은 천장과, 덜렁덜렁거리는 칠판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 공부를 하는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환경을 탓한 적이 많았다. ‘쟤는 금수저로 태어나서 호의호식하면서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럴까.’, ‘쟤는 어릴 적에 외국에서 살다 와서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영어를 잘하네.’ ‘쟤는 잘생기고, 키도 크게 태어나서 좋겠다.’ 등등, 내가 태어난 환경에 대해서 간혹 불만불평을 토로 하곤 했다. 그런 것들은 그들이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부유한 집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누리는 모든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왔다. 그에 비하면 나는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 아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들보다 호의호식을 하고 있었고, 이들이 감히 사먹지도 못할 것들을 마음껏 사먹을 수 있었다.


도대체 내가 인도네시아의 아이들보다 나은 점이 무엇일까? 흔히 내가 불평하던 것처럼, 이 아이들이 나보다 노력을 적게 했기 때문에 이런 불우한 생활을 하는 것일까? 내가 이들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만약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들처럼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처럼 작가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어떻게 먹고 살아야할지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동안 내가 고민해온 모든 것들이 배부른 고민처럼만 느껴졌다.


나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 속에서,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참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행복한 것들인지도 모른 채, 그저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불만불평만하고 있었던 것을 아닐까.

  세상에는 나보다 더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있지만, 나보다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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