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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치하늬커 Jan 12. 2022

자연에 짓는 자기만의 방

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캠프파이어 앞에 모인 여자들> 매거진 구독자들은 아마 눈치챘을 것이다. 한동안 글이 올라오지 않았던 이유를. 2020년 2월 달에 떠난 제주도 여행 이후로 WBC는 아무 곳도 갈 수 없었다. 그게 펜데믹이 오기 전 마지막 여행이 됐다. 다섯 명 모두에게. 호기롭게 시작한 사이드 프로젝트는 WBC 한국판을 준비하기 위한 ‘파일럿 여행’만 한 채 코로나로 잠정 중단되었다. 


LA로 돌아간 나는 일 년 반 동안 꼼짝없이 미국에 갇히게 됐고, 100% 온라인으로 전환된 업무 환경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자연이었다. 코로나19 초기에는 모든 실내 공간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산으로,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모아서 어디론가 떠날 순 없었지만, 항상 보는 친구 세명과 ‘Quarantine Bubbles(격리 버블, 코로나 확진자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주 만나는 사람들끼리 그룹을 만들어서 지낸다는 표현)’을 만들어서 거의 매주 만나 산책, 등산, 캠핑, 아웃도어 클라이밍, 서핑을 했다. 마스크를 벗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LA 근교의 대자연이 주는 웅장함 안에서 희망을 느꼈던 시간이었다. 질병도, 바이러스도, 죽음도 거대한 섭리 속에 스쳐가는 한 시기일 뿐이라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2020-2021년도를 지나며 자연으로 나가는 행위가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준 굉장한 선물이다. 


특히 자연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캠핑이 좋았다. 문명의 편리함에서 벗어나(미국 국립공원들은 핸드폰이 안 터져서 강제 인터넷 차단!) 인간 본연의 욕구와 오감을 관찰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을 보내게 됐다. 그래서 그냥 자연도 아니고 ‘대자연’, 혹은 ‘야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한 번도 캠핑을 한 적 없는 친구에게 자연과의 첫 만남을 갖게 해주는 걸 일상의 미션으로 삼게 됐다. LA에서 발견한 대자연 속에 묻혀 있는 캠핑 스팟을 틈만 나면 주변 친구들에게 소개한다. 내 꼬임에 넘어가 코로나를 뚫고 LA에 놀러 온 지현이와는 합법적 비박지인 알라바마힐에 갔다. 나보다 LA 생활을 오래 했지만 한 번도 캠핑을 가본 적 없는 유주에게는 말리부 주립공원에서 텐트 치는 법을 알려 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나도 좀처럼 살면서 백패킹을 해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검색하면 수많은 준비 꿀팁이 쏟아지지만 주변에 직접 도움을 받을 사람은 없었다. 혼자 무작정 해볼 수 있었지만 여자 혼자 산 위에서 자기는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의 장벽을 넘기는 힘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0대가 되도록 마음속 버킷리스트로 남겨져 있던 생애 첫 백패킹을 작년 봄에 하게 됐다. 샌프란시스코에 살다가 LA로 이사 온 친구가 꾸준히 1년에 한 번씩은 백패킹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난 뒤다. 너의 장비를 빌려 쓰고 싶은데, 나의 첫 경험에 함께 해주지 않겠냐고 물었다. 


온도가 떨어져도 춥지 않을 만한 옷, 불을 피우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강물을 정화해서 마실 수 있는 워터 필터, 어디든 좋은 풍경이 있으면 오늘의 잘 곳을 정해 누울 수 있는 텐트와 침낭을 한 가방 안에 다 넣고 걷기 시작했다. 내 몸 하나를 건사할 수 있는 의, 식, 주가 하나의 배낭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꽤 근사하고 든든한 느낌을 주었다.

짐을 쌀 때 얇은 책을 하나 챙겨가겠다고 집은 책이 하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었다. 눈 덮인 산과 차갑게 시린 파란색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햇살에 달궈져 따뜻한 바위에 누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때로는 아직 오지 않은, 때로는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어떤 여성 혹은 바로 자기 자신의 삶, 자기만의 방을 가지거나 가지지 못했거나 여성은 쉼 없이 상상했다. 각자가 피워 올린 허구에 현실이 화답하는 일이 과연 찾아올지, 만약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언제일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허구에 빚진다."


이민경 님이 쓴 추천의 말을 읽는데 이 부분에서 멈칫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불과 몇십 년 전, 몇 년 전에는 누군가의 허구였음을. 허구를 상상하는 힘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것을 새삼 떠올렸다. 버지니아 울프의 허구에 힘입어 우리는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됐지만, 여전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것들이 남아있지 않나. 과거에 비해 여성들은 충분히 자유로워졌지만, 자유의 극치인 여행과 모험에 있어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제한하거나 누군가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지 않는가. 여자 혼자 마음껏 여행하고, 온갖 위험한 것들에 나를 노출시키고, 아무 걱정 없이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날 수 있는 허구를 상상한다. 


그 허구를 현실로 만드는 방법이 바로 넓은 자연 속에 나만의 방을 마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닿았다.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WBC의 첫 리트릿 캠핑은 무조건 백패킹이었다. 대자연에서의 하룻밤. 장비가 없는 사람도 경험해볼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자연에 자기만의 방을 지어 보는 경험을 모든 여성들이 한 번쯤은 해 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한 번의 경험이 각자의 삶을 또 다른 허구를 상상하도록 인도해 줄 것이라 믿으며.


모험하는 여성들의 아웃도어 커뮤니티, Women's Basecamp(WBC)는 여성들에게도 야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모험의 경험이 조금 필요할 뿐이죠. 자연 속에서 나를 마주하고 몸으로 연대하는 각종 밋업 및 라이프 리트릿에 함께하지 않으시겠어요? WBC 여성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womensbasecamp를 팔로우하세요!







WBC 한국에서 활동할 커뮤니티 빌더들과 함께 떠난 첫 번째 라이프 리트릿, 덕적도 편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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