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애도할 때 얻는 유익
별로 한 게 없는데 6월이 코앞이다. LA는 한여름을 빼고는 계절감이 없어서 더더욱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상이 반복되는 느낌이다. 사실 나한테만 올해가 느리고 괴로운지도 모르겠다.
시험관도 해봤고, 할 수 있는 건 후회 없이 해봤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마음을 너무 과소평가했나보다 (난임에 대해 쓴 <거까그까>의 챕터를 다시 읽었는데 어찌 그렇게 자신 있게 ‘100% 나로 살겠어!’라고 끝을 맺었는지.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은 문젠데 말이다). 매달 생리가 시작할 때면 다잡았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한없이 좌절스러워졌다. 문제는 에리기와 나의 삶에 아이라는 존재가 없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물만 나왔다. 주변에 임신을 한 친구나 신생아가 있는 친구들을 일부러 만나지 않은지도 꽤 됐다. 괜히 조절할 수 없는 눈물 때문에 서로에게 민망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임신과 육아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듣기 싫었다. 배부른 소리라고만 느껴졌다.
근데 언제까지 피하고만 살 순 없지 않은가. 태어나는 생명은 축하받아 마땅하고, 귀여운 아기 사진들 덕분에 랜선 이모 삼촌들이 힐링을 하는걸. 세상은 잔혹하게 무엇을 인지하는 순간 그것만 보인다. 애인과 헤어지고 나서 걷는 거리에는 커플들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혼한 친구가 생긴 뒤로 접하는 모든 로멘틱 코미디 영화에는 항상 바람피우는 여자/남자가 아름다운 사랑으로 등장하더라.
워싱턴 디씨에 사는 친구들이 놀러 오라고 하는 데 세 달을 고민했다. 가는 김에 오랫동안 못 봤던 친구들을 다 보고 오고 싶은데, 대부분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 표를 끊기까지 나로서는 큰 결심을 한거다. 아예 마음을 먹고, 마침 유진이 추천해 준 <모두의 입양>이라는 책까지 다운을 받아 비행기를 탔다. 내 상황을 직시하고(슬슬 인정하고) 모든 옵션을 진지하게 고려는 해봐야겠기에. 일단 알아야 고려라는 걸 해볼 수 있을 테니까.
<모두의 입양>이라는 책은 입양 사후 서비스 기관인 ‘건강한입양가정지원센터’를 설립한 사람답게 이설아 대표가 정말 다각도에서 입양의 모든 면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쓰여졌다. 사실 나에게 ‘입양’은, 좋은 뜻으로, 내 아이가 있고 나서 다른 아이를 돌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아마도? 정도의 마음이었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안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단어다.
‘상실을 애도할 때 얻는 유익’이라는 챕터를 읽는데 ‘난임 입양 가족’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여기에 속할 수 있는 거구나. 전체 입양 가족의 절반을 넘지만 우리 사회에 드러나지 않는 독특한 위치를 지닌다는 난임 입양 가족. 입양한 아이를 사랑하지만 내가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사실이 일상에서 어떻게 툭툭 튀어나올 수 있는지 쓰여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일처럼 읽혔다.
그동안 우리 입양 문화는 입양 자녀를 가슴으로 ‘낳은’ 아이라고 홍보해 왔기에, 입양 부모가 난임의 상실을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입양은 아이와 부모 행복의 완성’이라는 모두의 기대감 앞에서
내밀한 상실감을 토로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입양으로 난임의 상실이 치유되어 행복하다고 말하는 목소리만큼이나
입양하더라도 난임의 상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목소리 역시
같은 크기로 전해져야 한다.
... 난임으로 인한 상실은 입양을 통해 얻는 행복과 별개의 영역이다.
이 챕터 이후부터는 ‘상실’ 이라는 단어에 꽂혀 더는 읽지 못했다. 내가 느끼고 있던 감정이 ‘상실감’이었구나. 남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박탈감이라기 보다는 내 내면의 인간으로서/여자로서 느끼는 상실감.
아이를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하는 커플로 살아가는 삶.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했다. 이건 임신을 시도하지 않은 채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정한 커플’ 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아이가 없다’는 팩트는 같지만,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삶과 둘의 의지로 주체적으로 선택한 삶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상실감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불쑥불쑥 튀어나올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둘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이 만족스러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게 무언가가 필요한 상태와
타인에게 그것을 해 줄 수 있는 상태는 전혀 다르므로,
내면의 필요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건강히 세우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모두의 입양, 이설아>
그래서 요즘은 ‘부부 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함께 양육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이전에 서로가 각자의 모습으로 설 수 있는 것,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부부 관계이기에. 사실 평생 둘이서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상대의 단점, 맞지 않는 부분이 도드라지게 보이기도 했다. ‘육아’라는 공동 과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함께 무엇으로 시간을 보내지? 그 시간을 각자 보내도 괜찮은 걸까? 취미와 성향이 너무 다른 우리가 서로로 충분할까? 하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는 한없이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상실감이 굉장한 전우애와 동질감을 주어서, 그래, 나에겐 너밖에 없지, 날 온전히 이해하는 건 너밖에 없지, 하는 쫀쫀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애초에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또 한편으론 그렇기도 하니까),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가치관과 삶의 모습을 새로 그리는 과정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오히려 내가 너무 날 희생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요즘 우리 엄마는 전화로 대뜸 “그냥 애 없이 둘이 살아~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원래 국제 개발 하고 싶어 했잖아. 아프리카를 가든 어디를 가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좋겠어”라는 말을 한다. 이런 말은 처음이라 낯설었지만, 아이를 가짐으로써 포기해야만 한다고 여긴 것들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 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둘이 살아가는 삶’은 오히려 서로에게 의존하기보다는 각자에게 충실히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가장 가까이 사는 서로의 존재 자체로 의지가 되고, 영감이 되고, 힘이 되지 않을까.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지지자가 되어 가는 거다.
워싱턴 디씨에 있는 일주일 동안 정말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만났다. 막 돌이 지난 아이가 있는 집, 생후 18개월이 된 아이가 있는 집,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집, 두 자녀가 있는 한국인 부부/국제 부부, 자폐증이 있는 아이들을 치료하는 센터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싱글 언니까지. 매일 밤 다른 집에서 자며 새벽 1시가 넘도록 우리의 삶에 대한, 건강한/건강하지 않은 아이가 있는/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본 게 꽤 도움이 됐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음이 푹 꺼질 때마다 에리기와 솔직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단은 아이를 낳는 문제 이전에, 함께 아이를 낳고 기르고 싶은 존재가 있음에 감사하자는 결론을 냈다. 갖지 못한 것보다는 가진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니까.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할 수 있는, ‘아이’를 뺀 ‘우리 둘’의 관계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그토록 바라는 것이 꼭 축복이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매여 나의 중심이 흔들려버리는 삶은 사실은 죽은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니까.
머리로 아는 걸 행위로 옮기기 위한 단련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는 것을.
결국엔 단련될 것이란 것을.
둘이 살아도 괜찮다는 주문을 외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