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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차니피디 Oct 09. 2020

TV, 유배 보내기

강진에서 만난 정약용

어린 시절 고향 집에는 빨간색 중고 흑백 TV가 한 대 있었다. 동그란 안테나를 이쪽저쪽으로 움직여야 화면이 보였고 가끔 화면이 시커멓게 변할 땐 손으로 옆면을 치면 살아났다. 유일하게 바깥세상 이야기를 볼 수 있기에 둘째 형과 TV를 보곤 했다. 흑백에서 칼라로 바뀌고 동그란 브라운관에서 평면으로 기술이 발전했다. 40인치 PDP가 처음 나왔을 때는 놀라웠다. 거실에 자동차 한 대를 걸어 놓은 친구 집이 부러웠다.     


요즘은 손가락만큼 얇은 대형 화면 TV가 집마다 걸려있다. 첨단 기능에 디자인과 실내장식의 기능까지 더해졌다. 그렇다고 세상을 보여주는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어린 자녀를 자극하는 화려하고 중독성 강한 유해 콘텐츠가 넘쳐난다. 흑백 브라운관 시대와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뉴스에는 사건 사고가 넘쳐나고 정치, 경제는 IMF 이후 위태롭다는 이야기만 20년째 들려오고 있다. 인문예술 콘텐츠도 있지만 도움이 안 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부모가 모르는 사이 아이의 파릇한 두뇌는 바보상자의 노예가 되어 간다.     



몇 해 전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전라남도 강진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산 중턱에 있는 다산초당 마루에 앉으니 바람과 풀벌레 새소리만 들렸다. 다산은 18년간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을 비우고 글을 읽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와 같은 훌륭한 책을 저술했다. 유배지에서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보낸 편지를 읽다 보면 그의 가족사랑을 알 수 있다.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 강진을 거닐면서 시니와 차니에게 나는 어떤 아버지인지 생각했다. 손톱만큼이라도 다산의 삶을 배우고 싶었다.      

2017년 8월 다산초당

삶에서 변화를 주고 불필요한 것을 버릴 수 있는 때는 이사가 아닐까. 강진에 다녀온 다음 해 이사를 하면서 거실 TV를 안방으로 유배를 보냈다. 폴란드에서 일할 때 만든 추억이 깃든 TV라서 차마 버릴 수는 없었다. 거실은 장식장과 책장, 넓은 책상을 놓았다. 책장 위로 두 칸에는 유럽에서 살 때 모아둔 와인, 도자기, 기념품이 있고, 엄마 아빠 결혼사진 옆으로는 시니차니의 유치원 졸업사진 돌사진이 있다. 아래 세 칸에는 모두 책이다. 아빠가 버리지 못하고 20년 넘게 보관하고 있는 묵은 책도 있다. 반대편에도 아이들 책이 가득한 책장과 전자피아노가 놓여 있다.      

TV 대신 거실 책장

거실은 TV가 사라진 날부터 소파에서 책을 보거나 가족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 변했다. TV를 유배 보냈지만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다. 아빠가 강연을 준비할 때면 식구들 앞에서 리허설을 한다. 가족회의에서 PPT를 보여주기도 한다. 일요일 오후에는 ‘가족 영화관’ 스크린으로 사용한다. 아이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네 식구가 소파에서 둘러앉는다. 영화관의 달달한 팝콘은 아니지만 엄마가 찐 옥수수를 먹으며 시간과 돈을 절약한다. 오손도손 재미는 두 배다. M 본부의 역사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은 챙겨본다. 출연자들이 역사적인 현장을 찾아가 설명하고 퀴즈도 풀면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재확인할 수 있어서 재미있다. 해외여행을 나갈 수 없는 요즘은 세계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다른 나라 사람들 구경도 한다.





<시니 생각>     

새로운 집에 이사를 와서 기분이 좋았죠. 근데 TV가 거실에 없으니 허전했어요. 아빠가 퇴근하기 전에 가끔 엄마의 허락으로 만화영화를 보곤 했답니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는 TV 보다 책 읽는 게 더 재미있어졌어요. 우리 집에서 TV는 좀 스마트하게 사용되고 있어요. 아빠 강연 리허설, 가족회의와 유튜브 모니터, 가족 영화관 스크린으로 다양하게 사용된답니다. 제가 좋아하는 손흥민 선수의 경기가 있는 날은 새벽에 아빠와 같이 응원하기 위해서라도 TV는 꼭 지켜낼 거예요.

TV는 프레젠테이션 모니터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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