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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현 Feb 10. 2024

첫 월급의 순간들

한 달을 단위로 하여 지급하는 급료

 내 인생의 첫 월급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사실 이걸 월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 살 터울의 형과 함께 신문을 다달이 돌리고 받은 노동의 대가이니 월급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월급을 받은 날이면 형과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찍 문을 연 슈퍼마켓에 들려 이것저것을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새벽, 한참 일을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으니 무엇이 맛이 없었을까. 그런 날이면 기분이 좋아 남은 신문을 가게 주인분께 드리기도 했고, 괜히 주차된 차의 와이퍼 사이에 신문을 끼어 주곤 했었다. 

 돈 관리는 형이 했으므로 우리가 얼마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 그런 것보다도 월급날에 형이 사줄 장난감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주어진 대가가 너무 적어 일종의 노동 착취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인이 된 후 한 번은 이 문제에 대해 형에게 따진 적이 있었지만 형은 자기도 그때는 학생이어서 똑같은 신문을 돌려도 성인에 비해 부수 당 적은 돈을 받은 피해자였다고 억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형이 훨씬 더 많이 가져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청은 형제 사이에도 있었다. 

  몇 번의 계절 동안 신문 배달을 하며 번 돈으로 부모님의 생일 선물을 사 드리기도 했었고, 우리가 가지고 싶던 물건들을 사기도 했었다. 그때는 우리가 번 돈으로 부모님께 무언가를 사드리면 당신들도 좋아하셨을 거라고 여겼었지만, 그 새벽 두 아들이 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우리를 말릴 수 없었던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그렇게 좋아하시지만은 않으셨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나 홀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받은 첫 월급은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난 이후였다. 친구의 연줄로 공공기관에서 일하게 된 나는 우체국에 배정이 되었다. 우체부 아저씨들이 편지를 수거해와 큰 테이블에 쏟아부으면 그것들을 집어 들고 칸마다 동 이름이 쓰여있는 책장 앞에 서서 편지를 분류하는 게 내가 맡은 일이었다. 편지를 분류하는 일은 신문 배달과 비슷해서 며칠은 속도가 느렸지만 칸들의 위치가 외워지자 나의 분류 속도는 같이 일하던 공익근무 위원 형들과 비슷해졌다. 경력직 신입이 들어왔다고 좋아하던 형들에게 어떻게 공익으로 빠지게 되었냐고 물어보자 한 형이 내 안경을 뺏어 써보더니 '가능성이 있네.'라는 말을 해 주었다. 눈이 나빠 공익으로 왔다는 형들의 말을 듣고 나는 신검, 그러니까 병역 판정 검사를 받기 전까지 부푼 기대를 가지고 살아갔었다. 그리고 일 년 후 나는 현역으로 입대를 했고 지금은 예비군에 민방위도 끝나가는 처지이다. 도대체 그 형들은 눈이 얼마나 안 좋았던 것이었을까?

 첫 월급을 받는 날, 나는 그동안 쉴 때마다 정독해두었던 우체국 쇼핑 카탈로그에서 부모님께 선물해 드릴 홍삼 파우치 세트를 주문했다. 그리고 홍삼이 집에 도착했을 때 부모님은 놀라기도 하셨지만 홍삼의 브랜드를 보고 당황해하시는 눈치였다. 

 엄마는 홍삼 상자를 다시 포장하며 "아빠가 몸에 열이 많아서 홍삼을 먹으면 안 돼."라는 말고 함께 환불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아빠가 홍삼을 못 먹는다고? 거짓말. 나름 신경 써서 산 홍삼인데, 우체국 쇼핑 카탈로그에도 추천 상품으로 있던 홍삼인데 환불이라니. 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다신 선물 같은 거 사드리지 않을 거라고 말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 부모님께서는 내가 어디서 바가지를 당해 이름도 모를 브랜드의 홍삼을 비싼 가격에 사 왔을까 봐 그랬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서운한 마음이 컸기에 부모님께서 홍삼을 실제로 환불하셨는지 아니면 다 드셨는지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주말 부모님의 식당에 들렀을 때 음료수 냉장고에 있던 홍삼 파우치를 보았다. 형이 사다 준 거라며 아빠는 나에게도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홍삼은 정관장의 것이었다.

 

 처음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받은 첫 월급은 고향의 한 사립 고등학교에서 9월에서 11월까지, 3개월간 기간제 교사로 일했을 때였다. 교사 임용 시험이 11월에 있었으므로 공부에 집중해야 할 때라 주위에서 모두 일하는 것을 만류했지만 이미 그때의 나는 4수생이었고, 올해 또 떨어지게 되어 앞으로 제대로 기간제 교사라도 하려면 짧은 경력이라도 필요했기에 아무도 가지 않으려던 그 자리에 지원을 하였다. 더구나 내년에 그 학교에서 국어 교사를 뽑는다는 말도 있었으니 나에겐 더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교생 실습 때 마련했던 정장을 입고 첫인사를 드리러 간 날, 그 학교의 교사들은 내 이름보다도 축구를 좋아하는지를 먼저 물었다. 알고 보니 남자 교사가 대부분인 그 학교에서는 교내 축구 동호회를 속한 분들이 많았고 또 학교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렇게 3개월 후 임용 시험을 앞두고 있던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어떤 날은 퇴근 후에도 도서관이 아니라 축구장으로 향했다.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에는 몇몇 여자 선생님들도 오셔서 응원을 하시곤 했다. 그분들도 기간제 교사들이었다. 

 국어 실력보다 축구 실력이 나날이 발전해 가던 어느 날 통장에 입금된 첫 월급을 보고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당시 이백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얼마를 버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갔기도 했지만 그동안 해왔던 아르바이트보다 노동의 강도가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나에게 예상외의 큰돈이었다. 

 '꼭 선생님이 되자!'

 원래도 선생님이 꿈이었지만 그때 그 통장에 찍힌 액수가 다시금 큰 동기를 유발해 주었다. 틀렸다. 그때의 나는 이렇게 다짐했어야 했었다. 

 '이 정도 받을 바에는 친구들처럼 기업으로 취업을 하자. 학창 시절 공부는 내가 더 잘했으니까.'

 첫 월급으로 나는 정장 한 벌을 샀다. 단벌 정장 안에 셔츠만 바꿔 입는 걸 학생들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은 돈과 2개월을 더 일하며 벌었던 돈으로 빚을 다 갚았다. 마지막 학기 이전에 과톱을 놓쳐 장학금을 받지 못했을 때 집에서는 학자금 대출을 받기를 원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대학생 생활비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사회에 진출하기도 전에 얻은 빚으로 나는 마지막 학기의 등록금과 고시원비 그리고 독서실비를 충당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3년간 조금씩 갚던 빚을 겨우 3개월 일했다고 처분할 수 있다니. 기업에 들어간 친구들이 얼마를 버는지 알지 못했던 나는 교사만 되면 금방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해 교사 임용 시험에 붙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직 나는 부자가 되지 못했다. 


 공무원으로서 교사가 되어 받은 첫 월급은 스물아홉 살의 3월이었다. 불과 몇 달 전에 받았던 월급을 기억하며 월급날 며칠 전에 미리 올라오는 월급 명세서를 조회해 보다가 나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럴 리가 없다.'

 기간제 교사를 할 때보다 훨씬 적은 월급에 나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으로 먼저 교사의 삶을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긴 통화 끝에 우리가 내린 결론은 '고등학교 때 나름대로 공부 좀 한다고 했던 우리가 무엇에 홀려 사범대에 진학을 했을까?'였다.

 그래도 막상 월급날이 되니 기분은 좋았다. 학생 시절부터 꿈이었던 교사가 되어 돈을 벌었다는 사실과 간절함으로, 때로는 절망으로 버텼던 20대의 시간들을 보상받았다는 느낌이 적은 월급보다 더 큰 기쁨을 주었기 때문이다.  

 같은 학교로 발령을 받은 두 명의 동기 선생님들과 함께 첫 월급 턱으로 며칠 전부터 준비한 떡을 돌렸다.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전체 메시지를 돌리고 한 분 한 분 떡을 나눠드렸다. 이제 갖 교사가 된 햇병아리 같은 우리가 준비한 떡을 받으며 선배 선생님들은 덕담을 해주셨다. 이후 시간이 지나 나도 몇 번의 첫 월급 턱을 받곤 했다. 쥐꼬리만 한 첫 월급을 쪼개가며 준비했을 신규 교사들의 떡을 보면 첫 월급을 받기까지의 시간을 잘 견뎌준 그들이 대견하기도 했고, 혹시나 이 길을 걸으면서 월급에 혹은 근무 환경에 실망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월급 턱을 돌리고 자취방에 돌아와 엄마 통장에 용돈을 이체해 드렸다. 월급이 생각보다 적었기에 아빠한테는 드리지 못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엄마부터 챙기라는 아빠의 가르침에 따랐으니 아빠도 괜찮으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엄마에게 용돈을 이체해 드린 지 1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아빠가 요즘 힘드니 자신에게도 용돈을 줄 수 있냐는 문자가 아빠에게서 왔다.  그때 아빠는 트럭 운전수를 그만두고 엄마와 함께 김밥 집을 하고 있었을 때였으나 아빠가 배달 중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김밥 집은 여러 사정 때문에 장사가 잘 되고 있지 않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한때 아빠가 벌어 오는 수입으로 우리 식구가 먹고살았던 적이 있었다. 아빠는 우리 집의 어미 새였고 더 어린 시절로 가면 세상의 모든 아빠가 그러하듯 아빠는 나의 슈퍼맨이었으며, 세상의 풍파에 가장 가까이 서서 나를 보호해 준 첫 번째 방파제였다. 그랬던 아빠가 아들인 나에게 용돈을 달라는 문자를 보낸 것이다. 아마 몇 달은 고민하셨을 테다. 

 아빠가 말하기 전에 미리 보내드릴걸. 한 남자의, 한때는 가장이었던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드릴걸. 나는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바로 아빠에게도 용돈을 이체해 드렸다.  

 그리고 일 년 후 아빠는 용돈을 좀 올려달라고 문자를 주셨다. 이번에는 이체 대신 전화부터 드렸다. 

 '아빠?!'


 월급의 사전적 정의를 검색해 본다. 

 '한 달을 단위로 하여 지급하는 급료'

 앞으로 내가 또 '첫 월급'을 받을 일이 있을까? 다른 일로 돈을 번다고 한들 한 달을 단위로 하여 반복하는 일로 돈을 버는 일은 교직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내 첫 월급으로 글을 쓰는 일은 30여 년이 흐른 후나 될 것이다.

 대신 이제 신규 교사의 첫 월급 턱을 받을 때처럼 누군가의 첫 월급을 지켜보는 일이 생기곤 한다. 올해 우리 반의 두 학생이 하교 후에 하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반 친구들에게 간식을 돌린 일이 있었다. 한 명은 헬스 트레이너로 일하면서 번 첫 월급으로 초코파이를, 이후 그걸 지켜본 또 다른 학생이 음식점에서 일하면서 번 첫 월급으로 탄산음료를 사 왔다. 길지 않은 교직 생활이지만 이런 경험은 나도 처음이었고 그 학생들이 정말 기특했다. 돈 버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처음 느꼈을 테고 그만큼 더 자신을 위해 쓰고 싶은 마음이 컸을 텐데.

 이렇게 학생들에게 또 한 수 배운다. 인생의 많은 경험을 한 후라 '처음'이라는 것이 낯설어질 남은 나날들에 또 한 번 첫 월급을 받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이 쥐꼬리의 쥐꼬리만한 돈일지라도, 그래서 내가 대접할 수 있는 것이 엽서 한 장의 값일지라도 지인들에 꼭 한 턱을 쏘리라. 다시 겪은 첫 월급의  특별한 경험을 지인들과 함께 나누리라.  








글, 사진 :: 임성현

Insta :: @always.n.all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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