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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현 Feb 17. 2024

이 도시의 색

이 도시의 색들로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되었지.

1.

 얼마 전 극장에 가 영화를 봤어. 너와 자주 가던 우리의 극장은 차마 가지 못하고 처음 가보는 극장으로 갔어. 표를 사고 자리에 앉기까지 모든 것이 낯설더라. 극장 특유의 소란스러움과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적당히 어두운 조명, 그리고 푹신한 의자까지도.

 그래서 몇 번을 그냥 나갈까 고민했어. 이러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거든. 밝은 영화인데 나 혼자 울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수도 있잖아. 너와 함께 가던 극장만 아니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간이 주는 감각들이 너를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어.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영화가 끝나고 동시에 일어서는 사람들 사이에 내가 혼자라는 거야.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좀 더 앉아서 영화는 어땠는지, 이제 무얼 먹으러 갈 건지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었지.

 애꿎은 영화표만 만지작거리다가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어. 덕분에 있는지도 몰랐던 쿠키영상을 놓치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극장과 너무도 달랐어.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화려하던 조명도 모두 사라지고 침묵과 어둠만이 가득한 거리가 있었거든. 이제 이 도시는 너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있었어. 바짝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어 마치 나 혼자만 살아있는, 그래서 오히려 나만 죽어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도시.

 '어차피 이곳에서 너는 혼자였어.'

 어딜 가든 똑같은 밝기의 도시 속 조명들이 그렇게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어.



2.

 이 도시에 나를 어울리게 해준 건 너였어.

 내가 몇 년을 살면서도 보지 못했던, 고향과는 다른 이 도시만이 가지고 있는 그 색들을 너는 나에게 보여주었어. 혼자 걷던 익숙한 길도, 몇 번 가봤던 뻔한 장소도 마치 처음 가보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숨을 불어 넣어주었어. 늘 반갑던 너의 동네를 함께 걸을 때면 나는 이 도시에 오길 잘했다고, 그리고 이곳에서 너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렇게 혼자임을 일깨워주던 이 회색의 도시에 너는 색을 입혀주었고, 이 도시의 색들로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되었지. 그리고 그럴 때마다 너와의 사랑이 계속해서 내 하루가 되길 바랐고, 너와의 하루가 그렇게 내 삶이 되길 바랐어.



3.

 하지만 지금 이 도시의 색은 너와 함께 모두 바래버렸어.

나는 너의 동네를 이제 돌아서 지나가야만 했고 어쩌다 너의 동네를 지날 수밖에 없을 때면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어.  혹시라도 너를 보게 될까 봐. 너를 마주치고도 싶었지만 너를 피하고도 싶었거든.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이 도시를 더 싫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너의 동네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주 가던 극장, 우리가 자주 들리던 카페, 우리가 자주 걷던 산책로 모두 이제 갈 수가 없기에 가끔씩 내가 섬에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곤 해.

 그래 맞아, 섬. 내가 걸어 지나간 길들은 금세 바다가 되고 오직 내가 서 있는 자리만이 나에게 전부인 곳. 때론 사막 같다고도 생각했어. 밟히는 건 물기 없는 모래고 불어오는 건 건조한 바람이 전부인, 너와 함께였던 장소를 지나가게 되면 예전의 우리 모습이 신기루처럼 보이는 그런 사막 말이야.

 너는 어떨까? 너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는 이곳에서 너는 어떻게 지내니? 나보다 이 도시가 덜 낯설게 느껴질까? 함께였던 장소가 서로의 시간만이 전부인 나와 달리 너는 나 아닌 시간들과도 함께였을 테니.



4.

 다시 낯설어진 도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마저 고요하고, 달은 매일 고층 건물에 가려진 채 지나치게 밝은 간판들의 불빛만이 어둡게 비추고 있는 이곳. 오늘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혼자 집에 걸어가는 길이면 잠시나마 사랑했던 이 도시가 또다시 나에게 말을 걸어. 이곳은 처음부터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고.

그거 아니? 여긴 아무도 내가 혼자인 걸 몰라. 원래 없던 사람처럼.

 언젠가 이 도시를 다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내가 오래도록 이곳을 사랑했으면 해. 이 도시를 언젠가 떠나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 너를 원망하지는 않아. 잠시나마 이 도시만의 색을 네 덕분에 알게 되었으니까. 가끔은 네가 고맙기도 해. 아니었으면 이곳은 더 숨 막혔을 테니까.

 궁금해. 당장이라도 너에게 전화를 걸어 묻고 싶어.

너에게도 이 도시의 색이 달라 보이는지. 조금이라도 흐릿해졌는지. 그래서 예전에 너에게 했던 말 - 이 도시는 내게 너무 낯설고 외로웠다던 그때의 내 말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는지.

 지금 너는 이 도시의 어디쯤을 걷고 있을지.




* 이 글은 치즈(CHEEZE)의 노래 'Alone'을 듣고 착상을 얻었다.

본문의 '여긴 아무도 내가 혼자인 걸 몰라. 원래 없던 사람처럼'은 해당 곡의 가사에서 인용하였다.





글, 사진 :: 임성현

Insta :: @always.n.all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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