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나왔지만 고향은 나의 말을 따라 늘 나와 함께 있었다.
"삼촌, 따순 물 좀."
이제 여섯 살 된 조카가 따뜻한 물을 달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웃는 삼촌을 조카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본다. '따순 물'을 따라주기 전에 왜 달라는지 물어보자 돌아온 조카의 대답에 나는 다시 박장대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이 차강게."
형과 형수가 음식점을 운영하는 까닭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이 꼬마 아가씨의 입에 어느새 나의 엄마와 아빠가 쓰는 전라도 사투리가 붙기 시작했나 보다.
"아따, 니도 인자 전라도 가스나 다 됐다잉."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찬물에 섞어 주면서 '차강게'를 계속 읊조려 본다.
내가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당연히 고향을 떠나고부터였다. 직장 생활을 대전에서 하게 되면서 28년 동안 머물던 전라북도를 처음으로 벗어나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전라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서울 사람들이 들으면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전라북도 - 정확히는 전주의 사투리는 전라남도보다 그 정도가 약해 영화나 그 외의 다양한 매체에서 나오는 전라도 사투리의 특징이 많이 두드러지지는 않다. 더구나 대전이 속한 충청남도는 전라북도와 바로 붙어 있어서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사투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대전에서의 내 말투가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전은 대도시였고 전라도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역의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사투리와 어울리는 도시의 모습은 아니었고, 어쨌든 대전은 전라도가 아니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전라도 말이 낯선 말임을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여름방학 방과 후 수업을 할 때였다. 비문학 지문에 '민주주의의 의의'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고 나는 별생각 없이 늘 읽던 대로 읽었지만 내 발음을 들은 학생 대부분이 웃기 시작했다. 나는 조카가 그러했듯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학생들을 쳐다봤고 학생들은 지문이 제대로 이해가 안 되니 다시 읽어달라 했다. 어려운 단락도 아닌데 왜 그러느냐며 내가 해당 문단을 천천히 다시 읽어주자 학생들은 세상에 '민주주으에 으으'라는 말이 어디 있냐고 나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민주주의의 의의'를 [민주주으에 으으]라고 읽고 있던 것이다. 그때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ㅢ] 발음을 의식하지 않으면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고향인 전주에서 수업했었을 때는 그 어떤 학생도 나의 [ㅢ] 발음에 대해 지적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날 집에 와서 음운론 책을 펼쳐보니 전라도 지방에서는 [ㅢ] 발음을 [ㅡ] 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다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지금도 나는 'ㅢ'가 들어있는 글자를 발음하면 살짝 긴장하곤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몸을 의자에 기댄 채 의자를 뒤로 기울이며 수업을 듣던 학생이 끝내 중심을 잃고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져 버렸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진 학생을 보고 너무 놀란 나는 '오메!'라고 외쳤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이 전부 웃기 시작했다. 심지어 넘어진 학생도 그 상태로 웃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오메'라는 단어를 사투리가 쓰인 시나 영상에서만 접해 봤지 전라도 특유의 억양을 살려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을 살면서 처음 봤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내 사투리가 넘어진 학생의 민망함을 덮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내 사투리는 낯선 고장에 오자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나는 사투리를 쓰는 국어 교사가 되어 있었다.
지금 나는 고향을 떠나왔지만 고향은 나의 말을 따라 늘 나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 사투리를 쓰고 있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그곳이 어디든 나는 잠시 전라도를 다녀온다. '고기'를 [괴기]라고 발음하시는 할머니께서 나를 키워주셨던 부안. 지리산을 품고 있는, 어린 시절 역 앞에서 잠시 살았던 남원. 대학 동기들이 많이 살고 또 내가 2년간 의무 경찰로 군 복무를 했었던 군산. 교생 실습을 나가 처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깊은 산골의 장수. 부모님을 따라 가을이면 단풍 구경을 갔었던 내장산의 순창과 정읍. 사랑하던 사람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며 읍성을 천천히 걸었던 고창. 학창 시절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전주. 그리고 우리 가족들이 지금 살고 있는 완주까지. 그곳의 말은 '그랬냐잉'처럼 어미 끝에 유성음 'ㅇ'을 붙어 말이 끝날 때마다 소리가 부드럽게 울려 퍼진다. 또 '밥 먹었어?'처럼 짧게 끝나는 도시의 물음과 달리 '밥 먹었냐-?'처럼 말끝을 좀 더 길게 빼는 말투는 고층 건물이 많이 없어 내가 자란 고장에서는 쉽게 볼 수 있었던 먼발치의 하늘과 지평선을 닮았다.
한편 낯선 고장 속 내 사투리는 가끔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눈이 많이 내려 눈이 차에 꽤 쌓여 있던 밤, 일행에게 '눈이 솔찬히 내렸네요.'라고 말했지만 '솔찬히' 때문에 일행은 내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솔찬히'의 뜻을 설명해 주면서 내가 타지에 살고 있다는 걸 다시금 알게 되었다. 한번은 영화 '곡성'이 개봉했을 때였다.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잘 그려낸 영화답게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이 새어 나오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이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 큰엄마와 똑같은 억양을 쓰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아버지의 옷을 가져다주며 아버지에게 잔소리하는 아이의 말투는 평소의 우리 가족과 너무 비슷해서 저 어린 배우의 고향이 전라도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두 시간이 넘는 동안 생생히 들리던 익숙한 고향의 말들은 극장을 나오자마자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날은 유독 내 말들에서 자연스럽게 사투리를 끌어내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그리웠었다.
전주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한 친구가 유독 내가 사투리를 심하게 쓴다고 말 한 적이 있었다. '그냐?'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그 말이 내심 듣기 좋았다. 한국을 떠나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인이 한국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나 역시 내 고장의 말을 잊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를 길러준 사람을, 자라오며 봐온 풍경을, 내가 지나온 추억을 잊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다.
돼지고기와 김치가 아낌없이 들어가 있던 김치찌개와 이맘때면 붉게 물들어가던 감나무가 있던 부안 할머니 집을. 지금도 있을지 모를 남원역 앞의 긴 가로수 풍경을. 군산의 시원하면서도 짠 내 나던 바닷냄새를. 사람을 홀리게 만들던 내장산의 빨강을. 함께 나고 자라 학교 선후배 사이 이전에 모두가 이웃사촌이었던 장수의 아이들을. 고창 읍성을 걸으며 사랑하는 이를 기다릴 때 봤던 노을을. 웃고 울던 20대의 내 청춘을 거의 다 보낸 전주의 대학교 교정을. 그리고 지금 우리 가족을 품어 주고 있는 완주의 햇살을 말이다.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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