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온 이를 대할 때마다 선하게 변하던 그들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어색한 나의 억양에 일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눈치라도 챈 듯 사슴은 천천히 나를 바라보다 숲속으로 들어갔다. 돌아서기 전 나를 향한 사슴의 눈짓은 멀리서 온 이를 대할 때마다 선하게 변하던 그들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 낯선 문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문드문 아는 한자 몇 개가 있었을 뿐 공항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이제 낯선 소리까지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목이 말라 제일 먼저 편의점에 들어갔지만 한국에도 파는 음료가 아니면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일본까지 와서 이미 아는 맛은 먹고 싶지 않아 눈짐작으로 오래 고민해 음료를 골라봤지만 문제는 그 사람 다음이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나는 계산대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고 눈짓으로, 표정으로, 손짓으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전했다.
아무리 처음 가보는 곳이어도 많은 게 익숙한 국내 여행과 달리 해외에 가면 작은 것도 낯설고 서툴다. 낯선 게 드물어지고 서툴면 흠이 되는 나이, 하지만 해외에선 다 큰 어른도 계산 하나에 허둥지둥하게 된다.
눈짓과 표정과 손짓으로 말하는 나를 보면 현지인들의 눈빛은 대부분 선하게 바뀌었다. 갈피를 못 잡는 나를 차분히 기다려주며 대답을 천천히 해주었고 어떨 때는 서툰 한국어로 말해주기도 했다. 마치 세상이 낯선 아이를 다루는 듯 내 행동을 자세히 관찰하며 어떤 동작을 취해줘야 할지 고민하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여행은 도시를 피하는 편지만 해외에서는 오히려 도시를 즐긴다. 거리를 걸으며 건물의 간판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글자를 모르니 문자도 조형물의 일부로 보이고, 말을 모르니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음악처럼 들린다. 모든 게 완상의 대상이다. 그들의 언어를 몰라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거리에는 부모와 함께 나온 아이들도 보였다. 부모와 무어라 말을 주고받는 아이를 보며 어린아이가 일본어를 참 잘한다고 생각해보다 피식 웃었다. 경상도에 처음 놀러 갔을 때가 떠올랐다. 버스에서 초등학생도 안 돼 보이는 아이가 경상도 사투리로 자기 엄마와 대화하는 걸 보았을 때도 어린 애의 능숙한 사투리에 감탄하며 혼자 손뼉을 쳤던 적이 있었다.
어쩌면 저 아이와 내가 보는 거리의 풍경이 같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보다 말과 글을 처음 배우던 조카가 생각났다. 웃음과 울음으로만 자신을 표현하고 상대의 표정과 행동으로만 세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 온몸으로 너는 너를 표현하고 있었구나. 낯선 곳에서 내가 받은 호의를 생각해본다.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고, 조금 더 차분히 기다려줄걸.
숙소 근처의 작은 술집에 들어가 카운터 석에 앉았다. 이번에도 종업원의 눈을 마주치며 손가락으로 맥주와 안주를 주문하자 종업원도 빠르게 눈치채고 눈짓과 미소로 대답해주었다. 관광지여도 현지인이 많이 오는 가게인지 일본어가 잔뜩 들려왔다. 맥주를 한 잔 다 비울 때쯤 넥타이를 맨 중년의 남자가 오른쪽 끝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내 왼편 끝에 앉아 있는 사람과 아는 사이인지 인사를 건네더니 이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가 대화를 나누는 둘 사이에 앉아 있는 꼴이 되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둘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타국에 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둘이 나누는 대화를 내용을 짐작해본다. 직장이나 가족의 이야기 혹은 서로의 안부일까? 좀 전에 추가로 주문을 하며 나도 모르게 한 한국말을 그들도 들었으니 어쩌면 낯선 여행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져 자리를 바꿔드려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을 때쯤 왼쪽의 남자가 먼저 일어섰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와 '사요나라'가 귀에 들어왔다. 나도 저 말은 아는데! 수간 계산을 하고 나설 때는 사장님께 일본어로 인사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휴대폰을 꺼내 '잘 먹었습니다'를 일본어로 검색하고 몇 번을 속으로 외어본다.
'고치소오 사마데시타. 고치소오 사마데시타. 고치소오 사마데시타.'
하지만 결국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이다 가게를 나섰다.
홋카이도에서도 외진 이곳의 밤거리는 늦은 시간이 아님에도 무척 조용했다. 아무런 말도, 간판도 보이지 않는 길에 들어서자 한국의 시골과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숙소로 가기 위해 휴대폰으로 지도를 보며 걷다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사슴 한 마리가 내 앞을 지나고 있었다. 나를 힐끗 쳐다본 사슴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골목길을 가로질러 숲을 향해 언덕길을 걸어갔다. 고라니가 아니고 사슴이라니, 사슴과 달리 아무렇지 않을 수 없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사슴을 흔하게 볼 수 있는지 궁금해 급하게 검색해보니 홋카이도에서는 에조 사슴이라는 토속 종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도망갈까 봐 더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사슴이 언덕에 올라 풀을 뜯어 먹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한참을 풀을 뜯던 사슴은 밥 먹는 모습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게 무안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사슴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다 인사말 외에는 제대로 꺼내지 못했던 일본어를 조심스럽게 입에서 떼어보았다. 여기는 일본이고. 너는 에조 사슴이니까.
‘오이시 데스까?’
어색한 나의 억양에 일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눈치라도 챈 듯 사슴은 천천히 나를 바라보다 숲속으로 들어갔다. 돌아서기 전 나를 향한 사슴의 눈짓은 멀리서 온 이를 대할 때마다 선하게 변하던 그들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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