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길과 인연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아들이 늘 걱정인 어머니께서 올해 초 한 여성분의 신상을 이야기하더니 한 번 만나보면 어떻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이미 그런 자리를 몇 차례 거절해 왔었지만 새해가 지난 지 며칠도 안 되어 또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는 어머니를 보니 웃음이 났다. 마지못해 상대가 누구인지 물어보자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성분의 이야기를 줄줄이 꺼내셨다. 여성분은 새해가 되면 어머니께서 늘 점을 보러 가는 역술가님의 막내딸로, 역술가 선생님은 예전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사주를 보러 갔을 때 나도 뵌 적이 있었다. 올해도 어머니는 가족들의 운세를 보기 위해 역술가님을 만났었고 아들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역술가님이 내 운세는 안 봐주고 예전부터 아드님이 마음에 들었다는 말과 직접 소개를 제안한 것이었다. 어머니와 사주를 보러 갔던 당시에는 내가 만나는 이가 있어 말을 꺼내지 못했었다며 자기의 막내딸과 사주도 잘 맞는다는 말씀도 함께 전하셨다. ‘나를?’이라는 생각과 함께 문득 우연히 거리에서 도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어머니께서 나를 아들이라고 소개하자 역술가님은 나를 보며 ‘눈이 맑구나’라는 인사말을 건네셨었다.
여성분의 나이가 너무 어려 거절을 했었지만 어머니는 그 거절이 못내 아쉬웠던지 몇 달이 지난 후에 다시 역술가님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네 결혼이 늦는 게 마음에 여전히 옛사랑을 품고 있어서라고 하시더라.”
예상치 못한 말에 큰 웃음이 나왔으나 일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사랑했고 그만큼 더 많이 그리워하느라 누구도 만나지 않던 시절이, 새로운 이를 만나려고 해도 끝내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쉽게 가까워지지 못하던 시절이 당시에는 적당한 결혼 적령기였었다.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리며 한편으로는 역술가님이 두 번의 만남 동안 내 눈과 사주에서 무엇을 보셨던 건지 궁금해졌다.
얼마 전에는 친한 동생이 대만 여행을 다녀온 후 빨간 실을 하나 선물해주었다. 대만의 한 절에서 사 왔다는 실은 월하노인의 실로 소지하고 다니면 이 빨간 실이 보이지 않는 끈을 당겨 인연을 만나게 해준다고 했다. 많은 선물을 받아봤지만 빨간 실은 처음이었고, 먼 타국까지 가서 형을 생각해 준 마음이 고마워 한동안은 휴대폰 케이스에 넣어놓고 다녔다. 다만 하필 휴대폰 케이스가 투명해서 이게 무슨 실인지 묻는 사람들에게 그 쓰임을 설명할 때마다 민망함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빛이 있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빛은 열을 전달하고, 어떤 빛은 물질을 투과한다고 한다.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길과 인연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 이 두 가지가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실재한다면 어떨지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삶이 정해져 있어 한 편의 소설처럼 처음과 끝이 쓰여 있다는 상상. 정말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하든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 오는 허탈감보다 다른 길로 벗어나더라도, 당기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만나게 될 존재들에 대해 궁금증 더 생길 듯하다. 이미 완결된 소설일지라도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모든 내용이 새로우니까.
오히려 내가 만날 존재들과 나로 이루어진 그 이야기가 재미있었으면 한다.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면 시인이 쓴 수필의 문체를 닮았고, 내가 사랑하는 소설들처럼 희미하고 잔잔하지만 그 안에 단단함을 가지고 있는 내용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밑줄을 긋듯, 꼭 내가 한 말과 행동이 아니어도, 내게 주어진 이야기에 밑줄 그을 일들이 많았으면 한다. 그리고 그 일들을 내가 알아챘으면 좋겠다.
지금 나는 이야기의 어디쯤 와있을지. 오늘은 아니었지만 내일은 밑줄 하나 그어 보고 싶은 일이 있었으면 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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