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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Mar 27. 2021

#39 잠 못 드는 밤

그의 귀걸이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듯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휘를 본 가면을 쓴 사내의 춤사위가 잠시 느려지는가 싶더니 앞으로 더 나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망설이는 것인가?


갑자기 이 방의 모든 냄새가 눈앞을 어지럽게 할 만큼 토기가 쏠렸다.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마마!”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홍비와 그저 무감하게 그것을 보는 태평공주.

쓰러진 휘를 보며 서서히 가면을 벗는 예현. 

휘의 눈에 담긴 마지막 잔상이었다. 

     

홍비는 최대한 살금살금 태평공주와 의원 가까이에 다가갔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들이 은밀히 주고받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어째서 쓰러진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또 음식에 무엇을 탄 건가?


홍비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황태의가 그러지 않았나? 절대 독으로 죽을 여자는 아니라고. 

그때 태평공주가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왕비께서 심신이 지쳐서 그러하니 좀 쉬면 낫는다는구나! 너는 어서 왕부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리거라.”     

태평공주는 그녀에게 아주 따듯하게 말을 건넸다. 오히려 웃는 낯으로 저에게 말을 하는 것이 더욱 수상하게 느껴지는 홍비였다.      


“사람을 시키면 될 ……”

“네가 직접 가려무나!”     


돌연 차가워지는 말투. 홍비의 얼굴에 난색이 퍼졌다. 

저마저 이곳에 없으면 꼭 다시 왕비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심신이 지쳐서?’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분명 다른 꿍꿍이가 숨겨져 있는 거다.      


“아닙니다! 소인이 마마가 깨어나시면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흠! 그러든지 말든지…’     


태평은 쌩하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홍비는 침상에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찌해야 할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장소가 떠올랐다. 평소에는 귀찮다고 여겼더니 정작 필요할 때는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쓸모없는 녀석이다!’      


한편, 예현은 머리를 부여잡고 방 안에서 서성였다.      


‘왜 여기에 그녀가 있던가.’


가면을 썼지만, 저를 알아본 게 분명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태평공주 옆에 그녀가 있는 것을 본 그는 까무러칠 만큼 놀랐다.     

 

그리고 저를 보고 갑자기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녀의 얼굴. 


제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대던 그녀의 얼굴에 무천과 영노의 얼굴이 겹쳤다.      

도망을 쳤다. 전쟁이 끝나고, 다 집어던지듯 훌훌 털어 낙양이 아닌 장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끝나버린 전쟁과 함께 그의 인생의 목표도 사라지고 없었다. 

영노의 말이 옳았다. 

발해로 떠나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북방의 민족들이 서로 앞다퉈 들쑤시며 건안으로 밀려들어 올 때. 대조영은 그때를 기회로 삼아 북쪽으로 대규모 이동을 시작했다. 백제 유민들도 이에 기댈 거라는 제 뜻은 빗나갔다.     

 

“백제와 고구려는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다”     


본래 동명성왕의 후손들이다. 더욱이 그 원류는 부여가 낳은 혈족들. 

어째서 그들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가. 


어차피 당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민인 것에는 저나 그들이나 다르지 않다. 

도대체 피보다 더 진한 것이 무엇이기에.      


사타무의라는 가면을 벗고 태평공주 옆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시대 최고의 권력자인 그녀를 제 밑에 깔고 굴복시키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매일 밤 달뜬 신음을 흘리며 가슴에 매달리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은 우월감에 사로잡혔다.    

  

부여 휘, 그녀를 보는 순간 

마치 화려했던 짧은 무대가 끝이 난 것처럼 눈앞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섬뜩하고 아찔했다.      


그리고 불현듯 드는 생각. 


이는 차마 못 할 짓. 이미 자신이 태평공주의 정부인 걸 아는 여인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부끄럽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지. 아직도 내게 부끄러움을 느낄 만한 자존심이 있던가. 내내 자신을 보는 그 차가운 눈빛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후후! 왕비가 회임을 했어!”

“!”     


태평공주는 벽을 보고 서 있는 예현의 몸을 두 팔로 감았다. 

예현은 구토를 하며 쓰러지는 휘를 떠올렸다.      


“왕부의 경사로군요.”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흠! 괵왕비가 회임이라니! 하하!”     


감정 없는 웃음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분노, 시기, 질투가 복합적으로 섞인 치기 어린 목소리. 이 여자는 온 세상을 발아래 두었음에도 항상 무언가에 목말라했다.      


“마마께는 훌륭하신 친왕이 두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예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평공주는 그의 등에서 가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디 친왕뿐이겠느냐? 내 정인들과 사통해 낳은 아이들도 수도 없이 많지.”     


공주와 그 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많은 사생아들.      


“그런데 어째서 너의 아이는 생기지 않는 걸까?”     


태평공주는 예현의 목울대를 야릇하게 어루만졌다.      


“내 그리 다른 이들보다 너를 어여삐 여겨 품었거늘. 어째서 너의 아이는 생기지 않는 걸까?”     


젊고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은 여인들의 근본적인 욕심이었다. 

끝없는 탐욕과 권력욕이 결국 도달하는 것은 결국 불로不老.


황제가 불로장생에 대한 욕망을 저버리지 못한 탓에, 결국 진나라는 통일된 지 백 년도 되지 않아 멸망했다. 타락할 때로 타락한 여인의 욕망이 그 정점에 다다랐으니. 결국 이 여자가 죽거나 아니면 이 나라가 망할 것이다.     


“아! 영명하신 마마께서 이 천한 노비의 아이까지 바라시니이까?”

“그래서 말인데 재미난 것을 생각해 내었다.”

“?”

“왕비가 품은 아이의 아비를 누군지 모르게 만들어 버리려는 것이지.”

“마마!”     


예현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이 여자가 하려는 일이 짐작됐다. 태평공주는 음흉하고 사악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오늘 밤! 왕비의 처소로 들어가라.”

“허나!”     


예현은 다급하게 태평공주를 불렀다.      


“왜? 백제의 공주라 못하겠는가? 망국의 왕을 앞세워 장군의 지위를 얻은 예 씨의 후손답지 않는구나! 호호호!”

“이는 황실의 후손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예현은 분노가 솟구쳤다. 그것을 태평공주 앞에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휘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범접할 수 없는 그 고귀함이 처음부터 못마땅했기에.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거두었기에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지성이 마음에 둔 여자였다. 후궁을 들이지 않겠다 작정한 것도 다 저 여자 때문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뭐 하나 제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는 게 그녀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이렇게 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것이다.”     


태평공주의 미소를 보면서 예현은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의 집착은 하나의 쾌락으로 점철된다. 


욕망과 권력은 끝없이 서로를 파먹고, 종국에는 본인의 탐욕에 자신이 먹혀들어 가는 것.      


“그 배에 품은 것이 황실의 씨가 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야.”   

  

그는 얇은 침의만 걸친 채 휘가 누워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현은 침상의 누워있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이게 우리들의 결말이다. 당신은 결국 괵왕비로 살아가지 못할 거다. 

그리고 배 속의 아이도 지켜내지 못하겠지. 


그녀에게 다가가는 예현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입안이 마르고 점점 호흡이 가빠졌다. 그때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진 그는 걸음을 멈췄다. 분명한 살의. 너무나 익숙함 검기가 그의 뒷목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멈춰라!”     


조용하지만 단호한 음성이 곧 제 목을 뚫을 것처럼 가슴을 찔렀다.      


“지금 이래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예현은 움직이지 않은 채로 뒤에 있는 인영을 향해 말했다.      


“소용이 있고 없고는 내가 결정할 일이네.”     


그의 말에 누워있던 휘는 천천히 일어나며 대답했다. 

휘의 투명한 검은 눈에 제 목을 겨누는 검의 날카로운 빛이 반사되어 보였다.

홍비가 뒤에서 그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뜻밖에 이 방에 손님이 있었나 봅니다.”     


예현은 짧은 단검을 든 홍비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검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의 날을 세워 그를 경계했다. 

그는 양쪽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리 이러셔도 이 방에서는 아무도 나가지 못합니다. 내일까지는.”

“그렇군.”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난 휘는 겉옷마저 입고 단정하게 앉았다. 

     

“이 밤이 너의 마지막일지. 나의 마지막일지 한 번 지켜보자꾸나.”     


예현은 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 자신이 모시는 이가 태평공주가 아니라 부여 휘였다면 제 삶은 달라졌을까. 


지금 그녀 앞에 선 제 모습이 추하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언제나 제 선택에 자신만만하던 그였다. 그러나 부여경에 이용당하고, 끝내는 영노의 죽음을 보면서 제 삶의 가치를 다르게 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용감으로 살아온 세월이다. 당차게 내가 그들을 이용한다는 생각은 죽음 앞에 주저앉았고, 권력 앞에 굴복했다. 


모든 이들이 그러한 것처럼.      


“나는 자네가 명광현의 사타무의로 살길 바라네.”


휘의 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명광현의 사타무의. 낙수의 뜨거운 노을을 보면서 풀무질을 하고, 활을 만들고, 영노 옆에서 무기를 연구하던 그 시절이 미치도록 그를 끌어당겼다. 치기 어리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무지막지하게 살던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대가 돌아가, 영노어른께서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하지 않은가!”     


내내 나무토막처럼 서 있던 예현의 몸이 허물어졌다. 

반듯하고 감정 없는 이마에 골이 파이고, 지적이고 예민해 보이는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노어른이 너무나 뵙고 싶습니다. 마마!”     


단 한 번도 제대로 눈물을 흘려보지 못했다. 눈물을 어떻게 흘리는지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휘 앞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흘리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깨닫고 있었다. 정말로 제가 돌아가고 싶었던 곳은.     


“명광현으로 돌아가라! 영노 어른은 그곳에 계시니….”     


명광현의 하늘 연못.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의관을 단정히 하고 그녀 앞에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신은 바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월루의 깊숙한 곳, 예현의 긴 휘파람 소리에 나룻배 하나가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에게 인사를 마친 그는 아무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나룻배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휘와 홍비는 예현을 태운 나룻배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런데 정말 저리 놔주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어차피 오늘 이곳에 있을 마음이 없던 자다.”

“예?”

“저렇게 배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던 걸 보면 모르는가? 그저 내가 말해주길 바란 것이지.”

“아!”


홍비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면 이제 어찌합니까?”

“어찌하긴 이제부터는 전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 나는 몹시 곤하니 잠이나 좀 더 자두어야겠다.”     


휘는 다시 침상으로 올라가 편안하게 잠을 청했다. 


'이 와중에 잠이 올까?'


홍비는 그런 제 주인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범상치 않은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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