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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Nov 16. 2020

#32 하나 되는 마음

지성이 대신관을 찾았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운 뒤였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여율재는 눈앞에 놓은 검과 향로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대신관이 나를 찾았다고?"

  

돌아서 지성을 보는 여율재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러합니다!"

"이유는?"          


한 시라도 휘의 옆에서 떠나 있고 싶지 않은 그였다. 

그러나 그녀가 예 현의 말대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공주께서 깨어나지 않으시는 것은 아마도 이 향로와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향로에서는 약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성은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영노는 어디 있소?”

"영노어른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영노가 죽었다고'   


놀람으로 그의 몸이 굳었다. 무천도 죽었고, 영노도 죽었다. 휘는 그동안 스승과 아비 같은 사람을 동시에 잃은 것이다. 이곳에서 그녀가 겪었을 슬픔에 그의 마음이 아파왔다.    

다시 가만히 잠든 것처럼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영영 잠든 채 일어나지 않는다면.     

설마하니 저를 여기 두고 죽을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지성은 저만 보면 눈썹 휘어지게 호통치고, 소리를 빽빽 지르던 노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왜 죽었소?"

"그의 육신이 이 검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공주가 깨지 않는 것과 연관이 있는가?"

"소인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였지만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이 검으로 향로를 베기만 하면 되는데……."          


지성은 차가운 눈으로 푸른빛을 띠는 검을 살폈다. 휘가 쓰러지기 전까지 손에 들고 있던 검이었다. 절대 무뎌지지 않은 날. 숱하게 적을 베었음에도 날은 새것처럼 벼려져 있었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그럼 하면 되지 않소!"     


지성은 감탄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검을 한 번 들어보시지요!"          


그녀의 말에 지성은 선뜻 검을 들었다. 

목검을 든 것 같은 가벼움. 마치 바람을 타는 것처럼 검은 그의 손에서 놀았다. 

그런데 검을 들고 향로로 다가갈수록 지성의 손에 들려있던 검은 점점 무거워지더니 나중에는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울 만큼 무게가 묵직해졌다.           

두 손으로도 들 수 없는 무게감!          


"놀라셨습니까?"          


몇 발자국 떨어지자 다시 검은 가벼워졌다.           


"이것은……."

"이 검은 영노께서 향로의 거푸집으로 만드신 검이지요!"

"거푸집으로 만든 검이라!"

"그러하옵니다! 향로의 거푸집은 만든 이의 피와 생명이 엮여 있으니, 이 검에 어르신의 신념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신념이라는 것이 향로를 지키는 것인가?”

"향로는 거푸집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요!"        

  

지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해할 수 없다. 대체 향로와 공주가 눈을 뜨는 것과 무슨 관계이길래 향로가 문제면 어떻게든 부수면 그만이다.      


"문제는…."

"향로를 함부로 부수면 정말로 공주께서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뭐라?"

"애초에 이 안에 공주의 영靈도 함께 깃드셨기에, 반드시 이 검으로 향로를 베어야 합니다!"

"베어내면?"

“죽은 자의 혼은 떠날 것이고, 산 자의 혼은 돌아오겠지요.”     


지성도 알고 있었다. 나라의 제를 지내는 향로는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향로는 혼을 부르고 액운을 담아내는 그릇.      

하물며 백제는 삼백 년을 넘게 이어온 나라였고, 그 왕실의 부여 씨는 고대부터 이어온 혈족이었다. 아무리 멸망한 왕국이지만 부여 씨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의 운이 다한 것은 아니었다.      


"향로의 연기만 꺼진다면. 공주가 깨어나는 것이 맞긴 하겠지?"          


지성이 되물었다.      

     

"분명 그러합니다!"         

 

검을 든 손에 힘을 주고 향로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갔다.       

    

"그대의 목을 걸어야 할 거요. 그렇지 않다면 부여씨의 씨족을 말려 버릴 테니!"     


그는 진심이었다. 그녀를 죽인 것이 부여씨의 신물이라면 내 반드시 부여씨의 씨를 말려버리리라!     


'하얀 공자께서 공주를 꼭 지켜주십시오!'           


귓전에 백발의 노인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영노가 향로를 지키는 마음은 부여 왕실을 지키기 위한 그의 신념이었다. 향로를 지키기 위한 대장장이의 신념을 부수어야만 그녀가 살 수 있음을.     


'신념이니 뭐니! 노인장! 나는 그딴 것 말고, 내 여자만 살릴 수 있다면…….'          


점점 무거워지는 검을 두 손 높이 들고 가볍게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가 바람처럼 가볍게 들어 올린 검을 붙들고 화살처럼 재빨리 위로 솟구쳤다. 검을 잡은 손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 따뜻함마저도 그의 절실함을 멈추지는 못했다.     

검은 무겁게 더 무겁게 향로를 향했다.           


“으아아아!”          


지성은 눈을 감았다. 고통에 찬 비명이 누군가의 처절한 절규가 고막을 찢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와 좀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던 여율재는 귀를 틀어막고 쓰러졌다.          

지성이 느낀 푸른 검날에 깃든 영은  지키고자 하는 선량한 마음이었다. 

하나의 티끌도 없는 맑고 순수한 마음. 

그 마음을. 누군가를 지키려는 그 간절한 열망을 베어내는 것이었다. 육신을 찣는 상처보다 더한 고통이 그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지성은 고통스러운 숨을 토해냈다. 

토해낸 숨을 따라 한 줄기 붉은 피가 그의 입가에서 흘러내렸다. 

한 나라의 멸망이 이토록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상처를 남기는 것이라면….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며, 남기는 그 상처의 편린이 이토록 오랫동안 고독과 끝나지 않을 진통뿐이라면.          

백성에게 나라는 무엇이어야 하는 것일까.     

무섭게 내려찍는 힘으로 날 선 검은 비명과 함께 거대한 향로를 깨끗하게 두 조각을 냈다.

고막을 찢을 것처럼 울부짖던 검의 울음소리도 멈췄다.           

향로의 연기가 멈추고,

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깨셨습니까? 공주마마!"          


눈을 뜬 휘의 눈에 제일 먼저 눈에 보인 이는 황태의였다.          


"이제야 눈을 뜨시다니, 참 오래도 주무십니다!"

"제가 오래 잠들어 있었습니까?"          


그냥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은 말끔했다.         

 

"한 달이 지났으니 오래 주무셨지요! 조금 더 누워 계셨으면 여기서 다른 이가 죽어 나갔을 겁니다."     


혀를 차며 말하는 그의 말에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묻어 있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마마의 남편 되시는 괵왕전하 말입니다!”     


그제야 쓰러지는 저를 향해 달려오던 그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전하는 지금 어딨습니까?”          


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누군가 문을 부서뜨릴 것처럼 열고 들어왔다.     

흐트러진 옷자락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그의 반듯한 이마 위에 아무렇게나 들러붙어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갈색 눈동자가 기쁨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지성은 자리에서 일어난 휘를 향해 달려와 와락 껴안았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버들가지처럼 유연한 홍수의 몸을 파묻듯이 감쌌다.      


지성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그녀의 팔이 허공을 휘젓다가 가만히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마지막 순간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 


저를 구해냈던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그에 품에 안겨 있는 지금까지. 어느새 이지성이라는 사내가 그녀 마음에 그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깨어나셨으나 몸에 쌓인 독을 몰아내기 위해 좀 더 힘을 쓰셔야 합니다.”          


황태의가 두 사람 사이게 끼어들자, 지성은 서둘러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독?”          


휘가 반문하자,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렇습니다. 독! 마마의 몸속에 독을 풀어야, 아기씨를 갖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아! 아기씨…….”     


휘의 얼굴이 붉어지든 말든 그는 제 할 말을 다 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황실의 태의입니다. 제 소임을 다하기 위해 이번 기회에 제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황태의는 그녀의 코앞에 검붉은 진액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미나리와 녹두는 해독에 좋은 약재입니다. 그동안 마마께서 누워계신 한 달 동안 꾸준히 드신 약이지요.”          

그는 마치 자기가 얼마나 어렵게 이 일을 하고 있으며,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열심히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황태의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오.”          


그녀 옆에 있던 지성이 허리를 숙여 그에게 공수하자, 황태의는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신은 폐하와 태자 전하의 신하이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반드시 잊지 않겠소!”          


지성의 말에 황태의가 고개를 힐끗 들어 올리며 웃었다.          


“신은 그저 그 말 한마디면 됩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정리하더니 순식간에 왔을 때 모습처럼 보따리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럼 저는 마마가 깨어나는 걸 보았으니, 돌아가겠습니다. 전하! 낙양에서 뵙지요!”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 들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창문에 나란히 붙어 앉아 밖을 구경했다. 구름이 해를 가려 어둑해진 날이었지만 맑고, 상쾌한 기분이 드는 산 공기가 두 사람의 가슴에 달게 스며들었다.     

      

“당신이 보고 싶었습니다.”        

  

휘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의 뜻밖의 고백에 그가 얼굴을 돌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지성이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쓸었다. 서로의 시선이 가까워지고 두 남녀의 더운 숨과 뜨거운 마음이 교차했다. 휘의 맑은 눈동자에 오롯이 그의 모습이 꽉 차 있었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지성은 그 아름다운 미소에 이끌리듯 기꺼이 벅찬 마음으로 그녀의 입술을 삼켜냈다.

누군가 살포시 자리를 피했다. 

조심스럽게 문이 닫혔다.      

열려 있던 모든 창이 닫히고, 실내는 흔들리는 촛불과 다정하게 서로를 보는 따스한 눈길만 있을 뿐이었다. 따스한 눈길은 불꽃처럼 타올라 열정적인 춤을 추었다. 불꽃은 메마른 가슴에 내린 단비가 되고, 어둠의 나락에 내린 구원의 손길이 됐다.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환희의 찬 쾌락으로 두 사람의 붉은 육신을 쓸고 지나갔다.      

불꽃이 사그라들고, 마지막 불씨마저 사라질까, 연인은 서로를 꼭 붙든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땐, 닫힌 창문 틈으로 강한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혹시라도 부끄러울까 염려했지만 이미 그는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반가운 목소리! 찬비였다.         

 

“어떻게?”          


저를 보고 놀란 주인을 향해 찬비는 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왜 우는 것이냐!”

“소인은 기뻐서 우는 것입니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를 보는 찬비의 얼굴에는 눈물범벅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소매로 눈물을 재빨리 훔치고는 서둘러 그녀를 붙잡아 침상에 앉혔다.   


“그것을 어서 내어 주십시오!”

“그것?”

“마마의 피 묻은 속곳 말입니다!”   

       

휘의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저도 그것을 찾았으나 없었다. 

분명 잠들기 전 한쪽에 잘 개어 놓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없다고요?”          


찬비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처녀로 시집와 사내의 여인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근거.           


“에구머니나! 이를 어째!”          


그녀가 발을 동동 굴렀다. 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찬비는 유난히 지성과 자신의 첫날밤을 기다려왔다. 물론 시녀로서 마땅히 생각할 의무였으나, 그녀는 지나치게 기뻐하고 흥분하고 있었다. 꼭 제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휘가 서늘하게 웃었다.           


“그게 자네에게 그리 중요한 물건인 줄 몰랐네.”          


찬비는 재빨리 불안해하던 몸짓을 말끔히 지우고 휘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마마! 주책맞게 제가…….”


그리고는 또 눈물 바람이다. 

휘는 맥이 탁 풀린 사람처럼 손을 저으며 문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어깨에 화살이 전등을 맨 지성이 한 손에 사냥한 꿩을 들고 그녀를 향해 활짝 웃고 서 있었다.         

 

“일어났소?”

“출타하시는 줄도 모르고 잠이 들었나 봅니다.”     


그녀는 서둘러 일어나 성큼성큼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지성을 자연스럽게 맞이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따스함이. 옷깃에 닿는 손끝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오던 그가 천비를 보는 눈이 싸늘했다.     


“왕부에 있어야 할 네가 어찌 이곳까지 왔느냐?!”      

    

그들이 있는 내부의 공기가 다시 무겁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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