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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Dec 10. 2022

고통에 대하여 2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4)

"인간에게는 몸의 모든 느낌들 가운데 고통만이 배를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과 같다."  <Gesammelte Schriften IV>, 발터벤야민


고통은 분명 달가운 손님은 아니다. 그러나 더 유쾌하고 즐거운 삶을 위해서 고통은 반드시 필요하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죽은것과 다름없다. 낙태에 대한 논의에서는 '어디까지를 생명체로 볼 것인가'를 정의하는 기준이 중요한데, 이 기준 중 하나로 고통을 느끼는 감각 기관의 여부를 고려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팔이 잘렸는데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혹은 정말 내 생명에 위협이 될만큼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를테면 트럭에 치였는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람은 죽고 말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몸의 모든 느낌들 가운데 고통만이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준다. 고통이 인간을 살게 해 준다.


나는 정말 편한 삶을 살았다. 돈이 없어 고통 받은 적도, 소중한 사람의 죽음 겪은 적도, 불행한 사고를 겪은 적도 없었다. 건강한 몸으로 화목한 가정에서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며 안온하고 평온한 삶을 살았다. 고통이 금지된 삶을 살았다. 고통이 없는 삶 속에서 나는 죽어가는지도 모른 채 죽어갔다. 철학 공동체에 오기 전 내 삶을 돌아보면 나는 병실과 마취약이 떠오른다. 고등학생 때 했던 맹장 수술이 떠오른다. 수술이 막 끝나고 의식이 들기 시작할 때즈음 마취약에 취해 고통과 내가 괴리된 채로 우주에 표류하는 것 같았다. 고통도 달리고 있고 나도 달리고 있는데 내 주위의 것들이 끈적하게 녹아서 에워쌌다. 매일 하루하루를 몰아붙히며 바쁘게 살아가도 시간은 늘어지고 게으르게 차올랐다. 차오른 것은 방부제였다. 오싹 소름이 돋는 향을 풍기는 녹진하고 미적지근한 방부제가 벌려진 입으로 잘근잘근 욱여 들어왔다. 내 목구멍은 항복하고 체념한지 오래였다. 혀뿌리는 눈치보는 충실한 심복처럼 꿈틀거리며 권태를 삼키고 피로를 삼키고 우울을 삼켰다. 나는 정말 죽은채로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통을 갈망하게 되었다. 나는 살고 싶었으니까. 인간은 누구나 살고 싶다.


살고 싶다는 미명하에 스스로 내 몸에 내렸던 고통은 비겁한 고통이었다. 그 비겁한 고통은 진짜 고통을 내게서 몰아냈다. 아니, 진짜 고통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한 나의 간사한 꾀였다. 고통이었지만 마취제였다. 그렇게 가짜 고통이라는 마취제로 진짜 고통을 사소하게 만들었다. 숨어버린 진짜 고통은 나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되었다. 그러나 진짜 고통은 반드시 우리를 위험으로 몰고간다. 진짜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는 살금살금 암살자의 그림자처럼 방문한다. 마침내 그가 심장에 노크를 했을 때, 내 몸은 암전이 됐다.


진짜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진짜 고통을 가짜 고통으로 바꿔치기 해서는 안된다. 빚진 고통은 반드시 눈덩이처럼 불어나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온다. 어떤것이 진짜 고통이고 가짜 고통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시 이전 글의 주제인 자의식과잉과 지각의 역사 (펼쳐짐)으로 돌아가본다. 스승은 늘 이렇게 말한다. 예민함섬세함은 다르다고. 예민함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고 섬세함은 너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예민함은 자의식이 과잉된 자들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감각이다. 극도로 예민한 사람은 작은 고통에도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낀다. 고통은 크지만 위험은 사소한 경우다. 이 때엔 섬세하게 타인을 살핌으로써 나의 고통이 진짜 고통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에 과도하게 섬세한 사람이라면, 고통은 작지만 위험은 어마어마할 수 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극강의 나르시스트라서 이런 상황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아마 히스테리가 강한 사람은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섬세함이 너무 많이 발달된 사람들은 나를 살핌으로써 나의 고통을 더 돌아보아야 하는 것 같다. 진정한 섬세함은 나와 너의 고통과 기쁨이 연결되어 있는 균형잡힌 상태일 테니까 말이다. 내부에 집중되어 있는 시선을 외부로 돌리고, 외부에 집중되어 있는 시선을 내부로 돌려서 결국은 내부와 외부가 같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 것. 그것이 올바르게 지각을 확장하는 것 아닐까.


"후설이 초기 현상학에서 하달했던 최초의 지령은 '기술심리학'이어야 한다는 또는 '사물 그 자체'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선 그것은 학문의 부인이다. 나는 나의 신체 또는 '심리현상'을 결정하는 복잡한 인과관계의 결과나 교차가 아니다. 나는 나를 세계의 일부로, 생물학 그리고 사회학의 단순한 대상으로 생각할 수 없고, 나를 학문의 세계에 가두어둘 수 없다. 나는 내가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비록 학문적 인식이라고 할지라도, 나의 관점 또는 학문적 상징들이 의미 없는 것으로 되지 않는 세계의 경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학문의 세계는 직접 체험된 세계 위해 세워지고, 만일 우리가 학문 그 자체를 엄밀하게 사유하고 그 의미와 범위를 정확하게 평가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선 학문이 2차적 표현이 되는 세계의 경험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다." <지각의 현상학>, 모리스 메를로-퐁티
"진실은 내 몸을 진동시키는 대상과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대상 사이에 낀 나의 신경체계는 운동을 전달하고 분배하고 억제하는 단순한 전도체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 전도체는 주변에서 중심으로, 그리고 중심에서 주변으로 연결된 엄청난 수의 섬유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가는 선이 존재하는 그 만큼, 나의 의지를 요청하고 나(의 몸)을 움직이는 활동에 말하자면 요소요소마다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공간의 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제기된 각 물음이 바로 사람들이 지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 87 P, 앙리 베르그손


고통은 '에포케' (판단중지)다. 에포케란, 단독적 개인의 체험을 중시하며 그 경험을 분석하는 학문인 <현상학>에서 나온 개념이다. 우리는 늘 열리던 문이 어느날 갑자기 열리지 않을 때 비로소 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문이 열리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기존의 내가 경험했던 익숙한 관습이나 습관이다. 그렇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의 체험이 아니다. 우리는 문이 열리지 않는 경험을 통해 '문'이라는 존재에 얽힌 수많은 것들 ('문'의 역할 혹은 내부와 외부의 구별 등)을 사유해 볼 수 있게 된다. 편견과 선입견의 판단을 중지하고 새로운 판단을 시작하게 하는 시작점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에포케이다. 우리는 이 에포케를 통해 올바른 판단과 지각에 이를 수 있다.


오토바이 사고가 난 적이 있다. 사고가 나던 순간 받았던 가슴의 충격 때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폐의 존재를 의식하게 됐다. 생물학 교과서에서 폐의 구조와 기능, 흡기와 호기의 원리,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교환 원리 등을 수 없이 공부했지만 그 때만큼 폐에 대해 잘 알게 되었던 때가 없었다. 기도를 통해 산소가 들어와 폐포를 부풀리고 산소가 나가면 폐포가 쪼그라드는 그 느낌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숨이 찰 때마다 점점 작아지는 폐의 모양과 테두리가 그려져서 두려웠다. 그 사고로 갈비뼈에 금이 가고 간에 출혈이 생겼다. 운동은 고사하고 먹는것도 조심해야 하는 시기들이 고역스러웠다. 갈비뼈와 간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그것들이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나는 그 사고로 인해 건강한 나의 몸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 삶과 죽음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 나의 삶과 죽음은 이 세계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한 사건일 뿐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고통은 우리에게 판단을 중지하게 만든다. 오토바이 사고가 없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유쾌한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육체는 젊고 건강하기에 나의 죽음을 제대로 사유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죽음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후회없는 삶을 살 가능성이 요원하다. 우리가 꾸역꾸역 직장에 나가서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만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을 억지로 만나는 이유는 죽음과 내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니까. 그러니 오토바이 사고라는 고통, 그 에포케가 없었더라면 나는 삶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지각과 감정은 고통이기에, 인간의 지각 자체가 판단 중지 상태로 이끈다고 볼 수 있다. 지각은 우리에게 물음을 제기한다. 그 물음은 고통의 형태로 찾아온다. 고통은 달갑지 않은 손님이기에 수동이지만, 손님을 어떻게 맞을 건지에 대해 나의 의지를 요청하기 때문에 능동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음에 답해야 할까? 어떤 물음에 답해야 할까?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모든 학문의 세계는 직접 체험된 세계 위해 세워진다". 하나의 학문이 세워지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뚝딱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문은 보편적이면서도 단독적이다. 각 개별자의 지각과 경험과 시간을 모아서 분류하고 분석하고 연구한 보편적인 체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겪는 일상도 학문의 한 조각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개인적인 고민들과 곤경을 해결하고 해쳐 나가기를 원한다면 그 자체를 엄밀하게 사유하고 그 의미와 범위를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학문(개인의 일상)이 2차적 표현이 되는 세계의 경험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메를로-퐁티와 베르그손은 그 경험 (행동)의 중심이 우리의 '몸'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개개인의 몸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몸'과 '마음'에 어떤 고통이 찾아와서 물음을 제기하는지 면밀히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물음이 제기되었을 때 익숙했던 판단을 멈추고 그 물음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고통이 나에게 위험을 야기하는 고통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고통' 이라는 것에 대해 더 잘 돌아보고 살펴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스승은 늘 말한다. 다양한 종류의 고통을 겪어보아야 한다고. 어떤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모습을 알아야만 하니까 말이다. 그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여러가지 삶의 양식을 직접 체험해 보는것이다. 직장인이었다가 퇴사를 하고 글쟁이이자 철학자이자 백수이자 프로복싱선수이자 두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는 나의 스승처럼. 그 삶들을 모두 횡단하며 다양한 종류의 다양한 강도의 고통을 겪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올때에는 세계가 온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이다. 스승은 매번 글쓰기 수업을 할 때마다 모든 것을 비우고 정말로 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그들의 삶을 느끼고 고통을 느낀다. 진짜 여행이란 것은 그런 것일테다. 부끄럽지만 나는 아직 첫 번째 방법도 두 번째 방법도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를 연약하게 만드는 거대한 힘을 넘어서는 분야에 서 있지 않으면 생각을 할 수가 없다네. 그 무력함을 통해 어떠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찾아내야 하네." <들뢰즈 A to Z> 중 Malady (M), 질 들뢰즈


베르그손과 들뢰즈의 말처럼 고통 앞에 서면 우리는 무기력하고 연약해진다. 그러나 그 무력함과 연약함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지 찾아야 한다. 고통이 없으면 우리의 지각은 확장되지 않는다. 우리의 자유는 확장되지 못한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실, 얼마전까지 나는 나의 스승을 신격화 해 왔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인 것처럼 아무런 고통도 없이 처음부터 강인한 사람이었고 날 때부터 큰 역량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최근 베르그손 수업을 들으면서 예전에 수업을 들었던 들뢰즈의 A to Z 수업이 떠올라서 영상과 자료를 찾아 보았다. 들뢰즈가 알려주고 있었다. 가장 무력했던 자가 가장 많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나의 스승은 사랑하기 위해 애를 쓰며 사는 사람이다. 제자들의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심지어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아이조차 보듬어 안으려 애를 쓰며 사는 사람이다. 매주 토요일 복싱 체육관에서 스승과 운동을 한다. 몇시간 동안 스파링을 하며 땀을 비오듯이 흘리는 스승의 모습을 본다. 소리를 지르고 근육을 찢으며 거대한 힘을 넘어서려고 진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 스승은 그 누구보다 연약하고 무력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매 순간 생살을 찢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스승의 땀냄새와 거친 숨과 들썩이는 몸이 덩어리가 되어 온몸을 뚫고 들어와 박힌다. 내가 찌르고 찢었을 상처가 펼쳐진 한 복판에 스승은 서 있었다. 스승의 강인함의 그림자에는 연약함이 있었다.


나는 어떤 고통 안에 있는가? 바로 어제까지의 나만해도, 내 고통과 고민에 골몰하고 있지 않았나. 나는 내 고민과 아픔을 함께 짊어져주는 스승과 친구들의 아픔을 몰랐다. 내가 하고 있던 쓸데없는 고민과 자기연민을 모조리 잘라내고 싶다. 나의 역량을 고민하고 있던 나는 또 다시 내 안으로 도망치고 싶던 어리석고 비겁한 술수였다. 역량은 무엇인가. 역량은 행동이다. 사랑하는 행동이 응축되었을 때 비로소 역량이 된다. 어느 좋은 작가의 말처럼, 사랑은 능동적 실천이다. 내 몸을 움직여 악착같이 애를 써서 사랑해야 한다. 당연한 건 없고 준비된 때란 없다. 오늘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변한다. 고통 속으로 뛰어 들어야겠다.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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