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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Dec 20. 2024

이상한 비행기

그 비행기 안에서

내 옆자리엔 술취한 외국인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고

앞자리엔 갓난아이를 안은 남자와

대여섯살은 되어 보이는 사내 아이와 여자가 앉아 있었어

복도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자리에는

바닥에 감자칩을 잔뜩 쏟아버린 젊은이

그 뒤로는 화장실을 시도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사내가 있었어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열이 오른 이마를 지고서 졸고 있었지


책을 읽어보려 했지만 그럴수가 없었어

옆자리의 외국인 할아버지가 쉴새없이 가방을 뒤적거리고

승무원에게 말을 걸고 일어서서 법석을 피우는 통에 말이야

머리카락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 네 옆 얼굴을 보았어

가끔 손가락 끝을 쓸어내리는데, 추운건가 열이 더 올랐나

앞자리의 갓난쟁이 아이가 울지 않길 바랐어

의자 사이로 아이의 얼굴이 보일 때마다 방긋방긋 웃겨 주었어

아이의 미소가 얼마나 심장을 멎게 하던지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사들인 향수를 살충제처럼 뿌려댈 때

너와 나는 경악을 하며 눈을 맞췄지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부산스럽게 들썩이고 있는데

우리 둘만 얌전히 졸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채지 않도록 혼자서 앓고 있는 너의 속이 뜨거웠어

뜨거워 아파. 그리고 웃겼어. 시큼함은 아팠어. 향수냄새는 지독했어.


비행기는 착륙했고 대여섯된 사내아이가 콩콩 뛰며 비명을 질렀어

할아버지랑 나는 갓난아이를 계속 웃겼어

갓난아이가 눈가와 코에 생쥐같은 주름을 만들며 웃었어

우리는 함께 웃었어. "메리크리스마스" 할아버지가 건넸어

한국말로 메리크리스마스가 뭐냐고 묻길래

같은 말이라고 말했어. "메리크리스마스".


쏟아진 감자칩이 마구 뭉개지고

아이들은 구름이 찢어져라 웃고 울고

산타할아버지는 선물주머니를 잔뜩 짊어지고

혼자서 울고 싶은 나와 조용한 무늬의 너는

계단을 내려왔어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하면서

콜드플레이 노래를 흥얼거리자

수수한 풍경은 슬픔과 온기가 되어 입술에 닿았어


이 나라는 밤의 시간이 길어

밤은 무서운 시간인데

밤이 길어서 여유가 생겼어 그럴 수 있다면

이상한 비행기에서의 두시간처럼

너에게는 통이 큰 배가 있잖아 나에게는 복제 돼지가 있잖아

뜨겁고 아프지만, 그래서 밉고 미워하고 지독하지만

웃기기도 했잖아 산타할아버지처럼 메리크리스마스 하면서

이곳은 예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잖니

해괴망측하고 유쾌했던 이상한 비행기처럼


네가 겉과 속이 달라서 좋아

나는 우리가 겉과 속이 달라서 좋아

심장을 가르던 아기의 미소와 산타할아버지의 향수냄새

그리고친절하지 않은 착한 사람들과 밝은 밤도

우리 이상한 비행기를 타고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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