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강릉 여자와 서울 남자
여
한 남자를 만났다.
어수룩하고 재밌는 말도 할 줄 모르는 숙맥이다.
그래도 숨김없이 진실된 사람 같아 보여서 싫진 않다.
뭐 웃을 땐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문제가, 나를 보며 항상 웃는다.
남
너무 예쁜 여자를 만났다.
태어나서 이렇게 예쁜 여자를 실제로 본 적 있나 싶다.
말할 때도 예쁘고, 말 안 할 때도 예쁘고, 웃을 때도 예쁘고, 심술부릴 때도 예쁘고, 밥 먹을 때도 예쁘고...
또 뭐냐, 그냥, 항상, 너무 예쁘다.
아, 벌써 그녀가 보고 싶다.
내일이 빨리 왔으면!
여
이 남자, 뜨겁진 않은데 따뜻하다.
재밌지도 않고, 멋도 없는데, 그래서 좋다.
그냥 같이 있으면 편하고 좋다.
자판기 커피 같은 남자다.
내가 외로울 때면, 언제든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달려와준다.
달려와서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뜨겁지 않아서 더 좋다.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요?
남
이렇게 예쁜 여자가 나를 좋아한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결혼식은 언제 하지? 결혼식장은? 애는 몇 명을 낳을까?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는데 무슨 상관이랴, 내가 담가주면 되지!
사랑이란 게 이리도 좋구나!
여
그이가 갑자기 나보고 자기 집에 인사하러 가자고 했다.
내가 김치 담글 줄 모른다니깐 자기가 담가준단다.
내가 앞으로의 계획을 살짝 물어봤을 땐 대답도 안 하고,
같이 무덤을 보며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같이 묻히자고 물었을 때도 대답 안 하고,
함께할 미래에 대해 아무런 말도 같이 한 적이 없는데...
그냥 매일같이 우리 집에 와서 라면 먹고, 자고, 또 라면 먹고, 자고,
같이 좋은 레스토랑 가서 분위기 내본 적도 없고,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한적 없는데...
아니, 뭐 비싼 선물, 고급 레스토랑 따위를 원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진지한 제스처나
미래에 대한 대화 한 번 없이 자기 집에 인사하러 가자 할 수 있는 거지?
사랑은 사랑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는 건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너무 답답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요즘 우리 방송국에 홍보차 온 가수가 자꾸 수작을 건다.
어제는 자기가 좋은 곳 안다고 맥주 한 잔 하자고 해서 오케이 했다.
이 사람은 능력도 있고 말도 잘하고 능숙하다.
여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안다.
하지만 그뿐이다.
항상 그래 왔다.
이런 남자들은...
남
요즘 조금 이상하다.
표정도 어둡고,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어제는 술에 잔뜩 취해서 들어왔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
내가 이렇게 걱정해주는데 되려 나한테 짜증이다.
내가 매일 라면도 끓여주고, 오늘은 해장하라고 북엇국까지 끓여줬는데...
나의 성의를 이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 괘씸하다.
이제 나를 그냥 라면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여
어제 다투고 나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이가 집을 나간 사이 그이 짐을 다 싸놓았다.
근데 정말로 집에 오자마자 그 짐을 들고 서울로 가버렸다.
도대체가...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몰라주는지.
너무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근데 어쩌지?
그이가 벌써 보고 싶다.
남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자는 다 똑같아.
이기적이고 제 잘난 줄만 알지.
혹시라도 그녀가 후회하고 찾아오면 차갑게 대해야지.
받은 대로 똑같이 갚아줄 거야.
그녀가 서울로 찾아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녀, 너무 예쁘다.
보고 싶었어.
여
결국 그이와 함께 강릉으로 돌아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보고 싶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우리의 관계는 여기까지야.
머리는 이렇게 말하는데 가슴은 따뜻한 그이의 품을 원한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했다.
한 달만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남
한 달.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버티지?
절대 이대로 헤어질 수 없어.
그냥 안부 묻는 척 전화해 봐야겠다.
내가 계속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면 분명 그녀의 마음이 돌아올 거야.
다시 이 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행복했던 그때로.
여
그 돈 많은 가수가 차도 사주고 비싼 레스토랑, 호텔들도 데려가 준다.
사람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점점 그이를 생각하는 시간이 줄어간다.
마음도, 생각도, 조금씩 정리가 되어간다.
남
그녀를 보러 강릉에 왔다.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데 웬 남자가 그녀를 차에 태워간다.
그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다.
결국 그런 거였어.
심장이 쪼그라들어 터져 버릴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너무 힘들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 너무 힘들어.
그녀가 새 차를 몰고 고급 리조트에서 그 남자랑 손을 잡고 들어간다.
저 차를 부서 버리고 싶다.
다 부서 버리고 싶다.
여
오늘 정리된 나의 마음을 그이에게 전했다.
그이가 상처받지 않고 잘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그이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 너무 괴롭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덜하다.
남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지만 완고한 그녀의 표정을 보자 왜인지 마음이 좀 편해진다.
희망이 사라진 포기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랄까?
이제 정말 끝이다.
여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이가 요즘 들어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그이의 따뜻한 품이 그립다.
서울로 그이를 찾아왔다.
또 가슴이 머리를 이겼다.
하지만 그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애써 모르는 척하며 그이의 팔에 안겼다.
그이가 조심스레 내 팔을 놓아주고는,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마치 겨울을 이겨낸 봄 햇살 같이.
나도 그를 보며 웃었다.
그대가 나에게 선물해준 시간,
고마웠고, 행복했고, 사랑했어.
-허진호 감독 영화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