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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Jan 13. 2023

그 뒷모습

단편

건물 외부로 이어지는 유리문을 밀어 열자 내가 모르는 이유로 인해 화가 난 여자 친구가 나를 흘겨보는 눈빛만큼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로 인해 순간적으로 상쾌한 해방감을 느꼈지만, 이내 무감각해졌고, 금세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마음이 거세게 일었다. 항상 우리는 저 산 너머를 무릉도원이라 여겼고, 막상 그 산 너머를 봤을 때는 내가 원래 있던 곳이 무릉도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산을 넘나들기를 반복하다 보면 두 너머의 차이와 의미가 서서히 희미해졌고, 어디든 내가 있는 곳이 무릉도원이구나 하고 깨달을 즈음에는 두 무릎이 산을 건널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 힘없는 무릎을 생각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내쉬며 다시는 산을 건널 수 없음을 알게 된 노인의 자기 합리화를 생각했다. 다시 연기를 들이마시며 무릉도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했고, 연기를 내쉬다 기침을 하며 행여나 무릉도원이 존재한다면 그곳에는 피울수록 몸이 건강해지는 담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관지를 정화시켜 주고 폐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담배 말이다.


하나, 둘, 줄지어 따라오는 무의미한 상념들 때문인지, 체내에 흡수된 니코틴 때문인지 갑작스럽게 정신이 아득해져 오며 눈에 초점을 잃었다. 다시 눈의 초점을 되찾았을 때는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작고 반짝이는 두 눈동자의 초점을 나에게 맞춘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주변의 소음에 따라 살짝살짝 움직이는 뾰족한 삼각형의 귀와 마치 내가 위험한 존재인지 감지하려는 듯 살랑이는 꼬리를 보며 급하게 담뱃불을 재떨이에 짓이겨 껐다. 그 귀여운 존재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매번 길에서 그들을 볼 때마다 나를 두려워하는 눈빛과 경계하는 몸동작이 내심 섭섭했지만 역으로 내가 그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몸보다 최소 15배 이상 거대한 포식동물과 마주했다면, 아무리 그 덩치들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두 팔 벌려 다가온 다고 하더라도, 거리 두기를 몸소 실천하며 언제든 줄행랑을 칠 준비를 했을 것이다. 물론 그 덩치들이 주는 공짜 밥은 얻어먹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남아 왔다. 폭력적이고 위험하지만 잘 이용한다면 쓸모 있는 존재인 덩치들을 길들여가며 말이다. 그들은 벽돌을 쌓아 추위와 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집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벽돌집을 만들어 놓은 덩치들에게 잘 보여 한 구석 차지하면 그만이었다. 옆집의 개들처럼 집을 지키거나 사냥을 하거나 양 떼를 몰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작고 귀여운 것들을 좋아하는 덩치들의 욕구를 충족해주기만 하면 됐다. 가냘픈 ’야옹’ 소리와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유혹해 주면 덩치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집사 노릇을 자처했다. 그들을 영악한 기회주의자라 욕하지 마라. 작고 힘없는 존재가 혹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을 찾은 것뿐이다.


그 덩치들 중 하나인 나는 이미 나를 홀려놓고 무심하게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그 작고 귀여운 녀석에게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내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자신의 몸을 뒤로 더 빼며 그르렁 댔다. 마치 보이지 않는 2미터짜리 나무 막대가 계속해서 우리 둘 사이에 완벽한 거리를 유지시키는 느낌이었다. 아,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멀어지는 매정한 그대여.


결국 더 이상 이상적인 거리가 유지되지 않는다고 느낀 그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뛰어올라 뒤쪽에 위치한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 매정한 뒷모습을 따라 달려가며 한 번만 그 귀여운 털을 쓰다듬도록 허락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매번 그럴수록 더 멀어지는 그대였고, 우리 둘 사이의 나무 막대기는 점점 더 길어질 뿐이었다. 그 뒷모습은 뒤쫓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보내줘야 하는 것이다. 나와 잠시 눈빛을 나누었다고 자신의 털을 만지도록 허락했다는 뜻이 아니다. 나에게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고 집으로 데려가 달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먼저 다가가야 하겠지만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 자신의 요구만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더욱이 당신이 상대적으로 덩치가 더 크고 힘이 더 있는 존재라면 말이다.


나는 그 뒷모습을 따라가는 대신, 담배를 새로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며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뒷모습들을 떠올렸고, 담배 연기를 내쉬며 그 모습들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 연기를 들이마시며 그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했고, 연기를 내쉬며 내 뒷모습을 바라봤을 그녀를 생각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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